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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경계를 넘어서 (1)

땀구멍을 흐르는 체액과 솜털 하나하나까지 곤두서는 느낌이 한꺼번에 전달되었다.

현실에서는 뇌가 필요 없는 정보라고 판단해 차단하는 감각들이다.

그러나 관념의 세계에서는 정보를 관장할 육체가 없다.

오감각이 대책 없이 활짝 열린 상태에서 마주한 그것은 정말로 끔찍했다.

검은 석유가 부풀어 터지듯 거대한 알을 뒤덮은 무수한 수포가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터졌다.

알을 감싼 수포마다 성좌가 죽은 흔적인 검은 액체가 고름처럼 들어차 있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와중에도 자꾸만 수포가 터져 고름이 주륵 흘렀다.

“우우욱! 세상에, 글라세로보다 더 끔찍하게 생겼어!”

“저게 범윤오라고?”

자신의 말이 왼쪽 귀로도 들리고 오른쪽 귀로도 들렸다. 이공간에선 그게 구분이 갔다.

“그런…가봐! 지금 터지고 있는 저것 좀 봐. 윽, 현실에서 다른 각성자들이 인벤토리를 깨트릴 때마다 연동되는 게 분명해!”

불룩 솟은 거품이 빠직 금이 가더니 푸시식 검은 액체를 흘렸다.

지옥의 솥에서 끓이는 액체라면 반드시 저렇게 생겼을 것이다.

불필요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승지는 어떻게든 알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이제 보니 자신의 인벤토리도 반투명한 막이 되어 둥글게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그럼 유월도 같은 상황이려나?

우주처럼 광활한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유월이 들어있는 인벤토리는 없었다.

“누굴 찾아?”

느물거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관종 염병?”

승지가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계속해서 부글거리던 수포가 한쪽으로 밀려났다.

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피막 속에서 범윤오의 머리가 움직였다.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집념 하나는 인정할게.”

“응, 그래. 개처럼 털릴 준비는 끝났냐?”

승지는 흉흉하게 만들어놓은 마왕의 무기를 들어 보였다.

백 개의 무기를 녹여 대가리만 붙여놓은 것처럼 생긴 그것을 보면서도 범윤오는 웃었다.

“솔직히 나 말고 여기까지 도달할 각성자가 있을 줄 몰랐거든. 그건 칭찬해줄게.”

“지랄 떨지 말고 붙자. 근성이 썩어빠진 새끼야. 다른 마왕 새끼들 발 닦개 짓 하면서까지 마왕이 되고 싶냐?”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지.”

범윤오가 양팔을 들어 올렸다.

“공간이 내게 흡수되면서 넓어지는 느낌은 진짜 끝내줘! 고작해야 성좌 하나 분량의 살점이었는데도, 왜 마왕들이 집착하는지 알겠더라니까.”

개소리엔 매가 약이다.

승지는 범윤오의 말을 무시한 채 무기부터 휘둘렀다.

쿵쿠구구!

삐걱거리며 날아온 무기가 한꺼번에 흉측한 알 겉면을 두드렸다.

정확히는, 자신의 인벤토리를 통해 알을 박살내려고 했다.

그러나 매서운 기세로 날아간 무기는 승지의 인벤토리에만 충격을 전할 뿐, 범윤오에겐 닿지 못했다.

“하핫! 소용없어! 이곳에 있는 한 우리의 관념은 서로를 넘지 못하거든.”

“뭔 쌉소리야?”

“같은 공간처럼 보여도 우린 서로 다른 세계에 있다는 뜻이야!”

보다 못한 광대가 끼어들었다. 그가 겁에 질린 채 범윤오를 흘긋거렸다.

“범윤오의 알을 박살 내려면 저걸 통째로 삼켜서 그의 세계를 승지의 세계의 규칙 아래로 복종시켜야 해!”

“저걸 먹으라고?”

“괘, 괜찮아! 먹는 건 내가 해!”

광대는 곧장 실천하려는 듯 인벤토리를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뻗어나가는 인벤토리를 본 범윤오가 말했다.

“성좌를 멈추는 게 좋을걸?”

“왜, 쫄리냐?”

“아니? 별로 성공할 것 같지도 않지만, 만약 성공해도 마왕 프리패스 거든.”

움찔.

그 말에 광대가 인벤토리를 멈췄다. 범윤오가 히죽거렸다.

“내 말이 맞지, 성좌? 너희 하나하나가 성좌신을 이루는 살점이잖아.”

승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마왕이 되는 조건은 성좌신의 살점을 먹는 것이다.

그런데 성좌라니.

지금 인벤토리에 떠 있는 저 작은 광대 모양의 육체가 성좌신의 살로 이루어진 것이란 말인가?

“신의 힘은 생각을 현실로 만들고 현실에 있는 걸 생각에 불과한 것으로 바꿔버리지.”

범윤오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불거렸다. 아무래도 곧 마왕이 되리란 예감에 잔뜩 흥분한 것 같았다.

“그 멍청한 성좌신은 인간에게 성좌를 붙여서 힘을 맛보여준 게 실수였어. 덕분에 더 많은 인간이 마왕이 될 수 있었으니까!”

“지 혼자 다 쳐먹은 인간이 말이 많네?”

승지가 무뚝뚝하게 대꾸하자 범윤오가 잔뜩 이죽거렸다.

“누가 호구처럼 신한테 이용당하죠? 응, 너야~. 난 마왕이 돼서 뭐든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구역을 확장하겠어! 고향이니까 특별히 지구는 첫 번째로 먹어줄 거고!”

꿈은 웅대하지만 주인이 멍청하면 거대한 똥 무더기에 불과했다.

남을 거름으로 삼으려는 짓거리에 완전히 질려버린 승지는 무기를 휘릭 돌렸다.

“자기소개 잘 들었다. 그럼 탈락 소식은 직접 들으시지!”

승지는 마왕의 무기를 밧줄에 매달린 갈고리 형태로 바꾸었다.

그리고는 힘껏 돌리다가 갈고리를 바깥으로 던졌다.

푸극!

“끼야아아악!!”

“무, 뭐하는 짓이야?!”

날아간 갈고리가 수포를 찢으며 걸렸다. 당황한 범윤오보다 광대의 비명이 더 빨랐다.

“승지야악!! 미쳤어! 인벤토리를 찢으면 안 된다니까!”

“나만 밖에 안 나가면 된다며?”

“아무리 관념적인 공간이라도 한순간 찢겼을 때 회복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단 말이야! 무의식적으로라도 외부 세계가 침범한다고 느낀 순간 끝장인데! 우흑, 나 진짜 토할 거 같아…!”

광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승지는 무시하고 팽팽해진 밧줄을 당겨보았다.

잘 박혔네.

그리고 쓸데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단호하게 차단한 채 밖에 있는 알을 이쪽으로 끌어당겼다.

당황한 범윤오가 악을 썼다.

”저 미친놈이! 죽으려고 환장했어? 대가리가 멍청해서 방금 한 짓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거지? 여기서 네 세계를 찢으면 너도 죽어!“

”오, 꼴에 내 걱정 해주냐?“

승지가 코웃음을 쳤다.

지금 안 죽었으면 됐지.

오히려 승지는 사악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네 것도 깨지면 바로 사망이네?“

”야, 야! 저 또라이 새끼!“

범윤오가 급하게 갈고리 주위에 걸린 수포를 터트려 갈고리를 떨어트리려고 했다.

물론 승지는 밧줄 끝에서 다시 갈고리 하나를 더 뽑아냈다.

원하는 대로 바뀌는 마왕의 무기란 정말이지 아주 쓸모가 많다.

푹찍!

두 번째 갈고리마저 인벤토리를 관통해 범윤오의 알에 걸렸다.

”히이익! 또! 나 진짜 제 명에 못 살아!“

광대가 숨넘어가는 비명을 질렀다.

승지는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기 이공간이 생각대로 변화하는 신의 마법 신비 어쩌고라는 거 아냐.

광대가 말한 인벤토리를 나가지 말라는 것도 승지가 생각하는 세계 밖으로 갈 수 없다는 뜻일 터다.

하지만 애당초 승지는 세계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나만 똑바로 살면 된다는 생각은 언제나 승지를 지배해왔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승지가 양팔로 밧줄을 하나씩 잡고 갈고리를 끌어당겼다.

범윤오는 크게 당황했다.

”젠장! 여기서 이런 일이 된다는 소리는 들은 적 없는데!“

”다나우한테 들었냐?“

”네가 뭔데 내 성좌 이름까지 알아?“

”그러게 친구를 잘 사귀었어야지.“

승지가 여전히 졸도할 것처럼 겁에 질린 광대를 흘긋거렸다.

광대의 눈은 점점 인벤토리에 눌리는 범윤오의 알에 꽂혀있었다.

이대로 더 눌리면 안쪽으로 흡수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승지는 잡아당기던 밧줄 아래로 칼 하나를 더 만들었다.

넘어오기만 하면 바로 찢어버릴 생각이었다.

”어림없지!“

범윤오가 괴성을 내지르며 알 겉면을 폭발시켰다. 수포가 폭발하며 마구 고름이 튀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내가 훔쳐놓은 성좌가 몇 갠 줄 알아?! 세계가 터져 죽어도 그건 내가 아니야!“

갈고리가 걸린 부분이 크게 부풀며 터졌다.

쳇, 저렇게도 쓰냐고.

승지가 혀를 차며 갈고리를 회수하는 동안 광대는 크게 몸을 떨었다.

”성좌 하나에 세계가 하나.“

”사람 하나에 세계가 하나.“

광대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저런 잔혹한 짓을 할 수가 있어.“

”뭐라고? 안 들려!“

범윤오가 마구 비웃으며 급하게 승지에게서 떨어졌다.

”어차피 여긴 남들이 올 수 없는 공간이라 피해 있었을 뿐이거든? 좀 일찍 돌아가도 마왕이 되는 덴 지장 없어!“

범윤오가 들어가 있는 알의 윗부분이 보이지 않는 듯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존재가 사라진 건 아닌지 알이 터지진 않았다.

마치 원래 알이 있는 곳 위로 새로운 공간이 덮어씌워져서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현실로 지워버리는 것이다.

”멍청한 놈! 여기서 도망가면 다른 마왕 놈들이 널 삼킬 거다! 그 전에 순순히 내 손에 죽으시지!“

”흥, 허풍 치지 마! 페널티 때문에 마왕이란 게 그리 쉽게 올 수 없거든?“

”저 사람도 못 믿는 쓰레기 같으니.“

진실을 말해줘도 믿지를 않는다.

젠장, 어차피 저새끼가 마왕에게 잡아먹히든 말든 상관 없었지만.

꼭 자기 손으로 조지고 싶었던 승지가 혀를 찼다.

”야, 우리도 돌아가….“

광대를 부르려던 승지가 멈칫했다. 광대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눈물에 젖은 큰 눈이 기묘하게 번득거렸다.

”사과해!“

”?!“

승지가 있던 인벤토리 뒤에서 검은 인벤토리가 뻗어져 나왔다.

그건 새로운 인벤토리가 나오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걸 집어삼켜서 공백으로 만드는 거였다.

광대가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운 공간의 규칙은, 그 주인이 세운다.

공백이 된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 강제로 현실이 소환되었다.

”이게 무슨?!“

…겹쳤다?

범윤오는 더이상 현실로 도망칠 수 없었다. 현실이 바로 이공간이 되었으니까.

현실이 역류하고 있었다.

”그만둬!“

직감적으로 상황을 깨달은 승지가 급하게 광대를 움켜쥐었다.

”미친, 너까지 마왕이 될 생각이야?! 저걸 먹어 치우고 영향을 받으면 마왕이 된다면서!“

”…아니야! 먹지 않아!“

광대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난 아직 성좌신의 규칙대로 움직이고 있어! 사람들에게 이세계를 보여주길 택한 건 신이니까!“

”뭐?“

”난 신의 뜻을 따르는 거야!“

성좌와 마왕들은 이세계를 볼 수 있다. 전자는 신에게 선택받았기 때문에, 후자는 신에게서 갈취했기 때문에.

하지만 각성자는 제한된 미션 조건을 클리어하거나 성좌와 하나로 융화되어야만 이세계를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계약하지 않은 사람은 보거나 알 수조차 없었다.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난 세계를.

광대는 자신이 신에게 받은 능력을 거꾸로 토해냈다.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똑똑히 알 수 있도록.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하는 대신 그들이 구할 수 있도록.

선택받은 자들만이 올 수 있는 세계를 모두에게 베풀었다.

그러자 광대가 삼킨 공간에서 만큼은, 모두가 이세계를 볼 수 있었다.

유월이 칼을 들고 기다리는 세계도 바로 그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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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라면 99콤보까지 - 광대라면 99콤보까지-1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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