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연극이 끝난 뒤 (2)
여전히 잠들어있는 승지의 머리 위로 미끈한 다리 하나가 쑥 나왔다.
경악한 성좌가 저도 모르게 뒤로 비켰다.
[! 너는?!]
“쉿.”
큐라가 손가락을 입술에 눌렀다. 그가 사뿐사뿐 허공을 걸어 나왔다.
“승지 자긴 자고 있지?”
[너! 여긴 왜 온 거야!]
성좌가 화를 냈지만 큐라는 신경도 쓰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새 집이 좋다니까. 전에 심판자 집에 있을 때는 들킬까 무서워서 못 나왔는데.”
[왜 왔냐니까!]
큐라의 입술이 하트 윗부분처럼 휘어졌다.
“마왕님의 선물을 받았다면서?”
[뭐?]
“네가 품고 있는 거.”
비로소 성좌는 인벤토리에 넣어뒀던 마왕의 무기를 떠올렸다.
성좌가 허둥지둥 물러났다.
[설마 마왕의 명령으로 빼앗으러 온 거야! 절대 못 줘! 이건 승지 거야!]
“어차피 성좌신이 준 인벤토리는 우리가 못 건드리잖아?”
큐라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물론 우리 마왕님도 노리고 있던 물건이긴 했어. 설마 인간들이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왜 왔어! 돌아가!]
“자꾸 그렇게 쫓아낼래? 나도 선물을 가져온 건데.”
[선물?]
성좌가 쭈뼛거렸다.
[…그럼 그것만 놓고 가.]
“아하, 귀여워라. 그래도 계약자는 챙긴다는 거구나?”
큐라가 잠든 승지를 향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꺄아악!! 뭐하는 거야!]
“마왕님의 전언이다.”
으스스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어쩐지 평소와 달라 성좌가 멈칫했다.
승지에게 가까이 붙은 큐라가 속삭였다. 성좌는 잠든 승지가 언제 깨어날지 몰라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변화는 시작되었다.”
차가운 바람 같은 큐라의 숨결이 승지의 귓불에 닿아 흩어졌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승지가 몸을 뒤척였으나 잠에서 깨어나지는 않았다.
저게 무슨 뜻이지?
성좌는 큐라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평소대로 돌아온 큐라가 입술을 들이댔다.
“자아, 마왕님의 용건은 끝. 그럼 이제 내 볼 일은~.”
[이익! 떨어져!]
승지의 입에다 뽀뽀하려는 큐라를 본 성좌가 급하게 날아왔다.
[미쳤어! 미쳤어! 어딜 감히! 절대 안 돼! 죽어도 안 돼!]
만져지지도 않는 대화창으로 애를 쓰는 성좌가 웃긴지 큐라가 큭큭거렸다.
“왜 그래? 일부러 생각해서 매혹장도 안 열었는데~.”
[승지 정기 빨아먹지 마!!]
무작정 말리던 성좌가 멈칫했다.
[그런데 왜 이번엔 날 안 쫓아낸 거야? 서큐버스면서….]
“마왕님은 네가 먼저 아는 게 좋다고 생각했거든.”
[뭐?]
큐라는 의심을 교란하는 일을 잘했다. 서큐버스를 본 인간이 가장 먼저 하는 게 의심이었으니까.
다 안다는 눈빛과 말 몇 마디면 아무리 확고한 믿음이라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아까 전에 성좌와 승지가 대화하는 걸 듣고 있던 큐라는 지금이 가장 적기라고 생각했다.
랭커들이 있을 땐 도망갔지만 큐라는 내내 승지를 감시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로 지금이다.
마왕이 자신에게 시킨 임무를 수행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가.
큐라가 조미료처럼 의심을 솔솔 뿌렸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도 소용없어. 승지 자기는 스스로 우리 마왕님을 찾아오게 될 테니까.”
[무슨 소리야! 그럴 리 없어!]
“정말?”
큐라가 떠보듯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그럼 넌 아직 승지 자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나보다.”
뒷말을 특히 강조해 성좌의 복장을 부욱 그은 큐라는 성좌가 반박도 할 수 없게 재빨리 사라졌다.
그리고는 혼란스러워하는 성좌의 모습을 몰래 숨어서 쿡쿡 지켜보았다.
자신이 정말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게 가장 즐거운 부분이었다.
성좌는 아직 눈치 채지 못했지만, 자신은 이미 알고 있는 변화가 있었으니까.
잠든 승지를 황홀하게 훔쳐본 큐라가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 걸!”
* * *
이상하게 잠자리가 사나웠다.
쥐가 계속 쏙싹 거리며 찍찍대는 꿈을 꾼 승지는 꺼림칙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게다가 심란한 건 성좌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뜨자마자 이딴 대화창을 번쩍 띄웠던 것이다.
[승지야! 류의건 만나러 가자!]
“…일어나자마자 무슨 개 소리야.”
승지가 한껏 졸린 눈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성좌는 아랑곳하지 않고 띠링 띠링 울려댔다.
[그게! 밤에!]
[큐라가 왔다 갔단 말이야!]
[엄청 의미심장한 소리를 했다구!]
잠깐 멍해있던 승지가 뒤늦게 큐라를 기억해냈다.
“그 서큐버스?”
[맞아! 막! 밤에! 변화 어쩌구 얘기했었어! 마왕님의 전언이라면서!]
열변을 토하는 성좌와 달리 승지가 찝찝하게 이불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그럼 밤에 자는 사람 쳐다보고 갔다는 거냐? 소름 돋네.”
[그 부분이 아니라!! 물론 그것도 찝찝하긴 하지만!]
“아무튼 뭔 짓거리를 하고 갔다는 거지?”
[응!!!!]
[그리고 승지가 받은 마왕의 무기도 뭐라고 했었어!]
“꺼내 봐.”
승지가 지시했다. 성좌가 얼른 이불 위로 무기를 뱉어냈다.
곧장 뜨거운 열기가 후끈하게 이불을 달구며 검의 묵직함이 느껴졌다.
혹시나 이불을 삼키지 않을까 했는데 무기는 얌전히 놓여있기만 했다.
전에 쓸 때보다 새까만 부분도 늘어나, 마치 굳은 용암처럼 보였다. 승지가 천천히 무기를 다시 쥐어보았다.
그러나 윷판 위에서 싸웠을 때처럼 닿은 부위부터 빨려드는 느낌이 없었다.
무생물이긴 하지만, 뭐랄까.
꼭 잠든 것 같다.
승지가 한 손으로 검을 들어보였다. 버프 받은 상태에서 안간힘을 다해도 움직이기 힘들던 녀석이.
“이상하긴 이상하네.”
[허억?! 한 손으로 들었어! 정말로 전과 달라졌잖아!]
“원래 주인한테 물어보면 알겠지.”
승지가 몇 번 검을 들고 휘둘렀다.
묵직하게 후웅, 공기를 가르는 것 빼고는 평범한 검과 똑같았다.
[…호, 혹시 마왕을 만나겠다는 거야?]
“엉? 아니, 이거 번태 아재 거잖아. 그 양반은 알지도 모르지.”
[아! 그랬지 참! 다행이다!]
성좌가 이상하게 안도했다. 승지가 물었다.
“정말로 이게 인벤토리에 있던 물건을 다 삼켰냐?”
[응! 아니, 다는 아니고 거의 전부!]
성좌가 인벤토리를 열어보였다.
[마왕의 무기를 넣었을 때 다른 건 다 삼키고 이것만 남았어.]
인벤토리에 남은 건 딱 두 개였다.
열쇠장이의 고리와 염소 대가리가 주고 간 새까만 던전 열쇠.
승지는 이상하게 열쇠에 시선이 갔다. 노려보는 승지의 눈빛이 향하는 곳을 알아차린 성좌가 말을 떨었다.
[잠, 잠깐만! 승지야,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 생각하는 건 아니지?]
“거슬리지 않냐?”
[아니아니!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난 괜찮은 거 같아!]
성좌는 일단 부정하고 봤다.
성좌는 밤에 큐라가 다녀갔다는 말을 하지 말 걸 하고 후회했다. 그것 때문에 연달아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에 승지가 짜증을 제대로 느껴버린 것이다.
정확히는 알 수 없는 것을 계속 갖고 있다는 불안감이 싫었다.
저렇게 계속 열어볼 테면 열어보라는 듯 남아있는 던전 열쇠도.
이상한 마법과 함께 나타나 잔뜩 겁을 주고 사라진 염소 대가리의 존재도.
마왕을 한두 명 본 것도 아니고 심지어 제 손으로 끝장내기까지 한 몸이다.
아무리 염소 새끼가 꺼림칙해봤자 그 새끼 주인도 어차피 마왕이잖아?
덥석.
승지가 던전 열쇠를 쥐자 성좌가 기절할 듯이 펄쩍 뛰었다.
[스스스승지야! 그거 아니야! 그거 놓자! 좀 더 실력이 향상된 다음에… 아니, 다른 사람들을 모아서!]
“그러다 언제 갈래? 나 환장하면?”
승지가 급하게 닫히는 인벤토리에서 열쇠를 빼냈다.
이렇게 계속 마왕 부하들이 뒤쫓아 다니는 것도 귀찮다.
만약 큐라가 지금도 감시를 하고 있다면 어디 이것도 한 번 따라와 보라지.
한 손엔 검 다른 손엔 열쇠를 쥔 승지가 허공에다 열쇠를 푹 찍었다.
“쫄지 마, ㅆ발.”
어차피 이것도 던전에 불과해.
승지는 던전 열쇠를 꽂자마자 나타나는 던전 문을 기다렸다.
글라세로 던전처럼 끈적거리는 덩어리로 변해가던지, 헬바티아 던전처럼 튀어나오던지.
어쨌든 던전은 문이 열리고 나서 들어가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승지가 꽂아 돌린 열쇠 끝에서 무언가 툭 터지는 느낌이 났다.
그리고 암흑이 손을 타고 빠르게 올라왔다.
[! 승지야…!]
성좌의 단말마와 함께 승지의 몸이 앞으로 쑥 쏠렸다.
마치 큐라의 포탈을 타는 것과 비슷했다.
“뭐야?”
앞으로 몸이 쏠린 승지가 반 바퀴를 돌아 바닥에 착지했다.
손을 덮은 암흑을 보고 예상했던 것처럼 끝없는 어둠이 펼쳐져 있진 않았다.
오히려 갑자기 환한 빛이 내리쬐어 승지는 손을 들어 눈 위를 가려야 했다.
찌르듯이 강렬한 햇살에 눈이 부셨다.
[승지야! 괜찮아!?]
띠링, 하고 호들갑을 떠는 성좌의 대화창이 나타난 걸 보니 일단 무사히 들어오긴 한 모양이다.
빛에 눈이 적응할 시간을 준 승지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빠아앙. 요란하게 귀청을 찢으며 달려가는 소리가 너무도 익숙했다. 저 건물, 이 콘크리트 바닥까지도.
악마 같은 염소 대가리가 준 던전 열쇠이기에 승지는 인간 내장이 꿈틀거리는 던전이 나와도 놀라지 않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워낙 던전이라는 데가 이상한 곳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이건 전혀 예상 밖이었다.
“…여긴 서울이잖아.”
현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거리 풍경에 승지가 당혹스러워 했다.
내가 아직 잠을 덜 깼나.
그러나 승지의 티셔츠 밑으로 숭숭 들어오는 겨울바람은 너무도 차가웠고, 잠옷 바람인 그를 힐끔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지나치게 현실 같았다.
[뭐, 뭐지? 승지야 사실 던전이 아니라 순간 이동을 한 거야?]
성좌도 영문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승지는 쥐고 있던 주먹을 천천히 폈다. 다행히도 손 안엔 아직 검은 열쇠가 쥐어져 있었다.
좋아, 내가 미친 건 아니군.
여차하면 다시 열쇠를 돌려 현실로 돌아가면 되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확실히 던전은 던전인 모양인데.”
[정말? 그치만 모르겠어. 여긴 너무 승지가 사는 동네 같은 걸!]
동감이다.
거리가 어딘가 익숙한 걸 보니 정말로 자신이 사는 곳 근처로 옮겨온 것 같았다.
이게 정말 던전이면 던전 클리어를 무슨 수로 하라는 거지? 이러다 갑자기 몬스터가 나타나나?
승지는 제자리에서 좀 기다려보았지만 침입자를 발견한 던전이 보낸 몬스터 같은 건 나타나지 않았다.
맨 발로 서있느라 발가락만 좀 시려워졌을 뿐이다.
신발은 신고 던전을 열 걸 그랬나.
승지는 한 쪽 발을 다른 쪽 발등에 얹어 문질렀다. 계속 마왕 비스무리한 것들이 주변에 어슬렁거리니 보통 짜증이 나야 말이지.
때려 부술 준비를 하고 들어왔는데 때려 부술 게 없으니 좀 당황스럽긴 하다.
결국 몬스터 그림자도 보지 못한 승지가 탐색에 나섰다.
“일단 움직여 보자고. 던전이면 뭐라도 적이 나타나겠지.”
[응! 알았어!]
승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혹시 모를 적을 대비해 마왕의 무기는 계속 손에 들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성좌가 소리쳤다.
[승지야 저길 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