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럭키 던전 (1)
끼기긱.
팽팽하게 당겨진 어깨가 목표를 향해 화살 끝을 놓았다. 쏘는 이의 실력은 별로였지만 그에 담긴 힘이 월등했기에 화살은 매섭게 날아갔다.
투웅!
“끼익!”
[ 1콤보! ]
화살에 맞은 박쥐가 뱃속에 있던 핵을 쏟아내며 떨어졌다.
[꺄악 성공! 잘 맞췄어!]
성좌가 환호했지만 승지는 쯧하고 탐탁지 않게 활을 내렸다.
“역시 활은 별로다.”
승지가 활을 내려놓았다. 유청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가 내민 활을 받아 인벤토리에 넣었다.
승지가 빈집털이를 나간다고 했을 때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들은 유청은 처음에 못하겠다고 뻗댔다.
나중에서야 승지가 말한 집이 던전이고, 비어있다는 뜻은 글라세로가 죽었다는 뜻인걸 알고 민망해했다.
“처음부터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되잖습니까.”
“내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
주인인 마왕 글라세로가 죽었으니 남은 던전은 털어주기만을 기다리는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겸사겸사 성장도 하고.
[ 서브 미션 : 광대의 순회공연
광대의 공연은 한 곳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다양한 무대를 돌아보며 경험을 쌓아보자!
방문한 던전 (12/99)
보상 : 스탯 분배치 10, 스킬 ‘광대의 친구’ ]
성좌에게 받은 서브 미션을 끼고 승지는 계속해서 던전을 돌았다.
성좌신의 가호가 걸려있을 때 최대한 보상을 뽑아내야지.
열쇠장이의 고리를 되찾은 승지는 매일 한 번씩 던전을 열어 만만한 던전을 탐색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가장 털어먹기 좋은 건 글라세로의 던전이었고, 마무자의 던전은 그냥 비싼 물건이 많이 나와서 좋았다.
유청은 짐꾼이자 정찰, 잡몹 사냥, 밥하고 불 피우고 기타 머슴이 할 법한 일은 다 했다.
물론 하는 내내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이었지만 소리 내어 말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계속 던전에서 던전으로 이동하는 상황이 승지를 살해했던 상황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으니.
죄책감에 쩔어있느니 그냥 입 다물고 밥이나 하는 게 현명했다.
[유청이 묘하게 얌전해졌네!]
“벌써 지쳤나?”
승지는 이것저것 시험해보던 무기를 집어넣고 돌아왔다. 유청이 청월량 길드의 무기 창고를 싹 털어온 덕분에 온갖 무기를 마음껏 시험해볼 수 있었다.
칼은 확실히 콤보 없이도 쓸모가 많아서 좋았고, 창은 동작이 길고 단순해서 콤보가 끊길 위험이 높았다.
곤봉이나 너클도 좋았지만 이세계에선 발견이 잘 안 되는 종류였고, 손에서 잘 미끄러지는 게 단점이었다.
도끼와 망치도 괜찮았지만 무작정 힘으로 돌격하려니 뭔가 안 맞았지. 활같은 원거리 공격은 별로고.
일단 힘 쓸 일이 많아서 힘 스탯을 주로 올리긴 했는데 잘못 찍었나? 콤보를 생각하면 앞으로 민첩을 주로 올려야겠어.
승지가 돌아오자 유청이 박쥐가 삼키고 있던 아이템을 주우러 일어났다. 대부분은 얼마 가치도 없는 철광석이나 가죽이었지만 잔뜩 모아다 팔면 어느 정도 코인이 나왔다.
게다가 지금은 성좌신의 가호 버프로 제법 좋은 물건이 나올 때도 있었다.
“또 열쇠가 나왔군요.”
“다른 던전?”
“네.”
유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지가 잡동사니 사이에서 열쇠를 집어갔다. 생긴 걸 보니 글라세로의 열쇠였다.
지금 그들이 들어온 던전도 글라세로 던전이었다. 성좌신의 가호 버프로 처음 떨어진 던전 열쇠가 바로 이곳이었으니.
[꺄아 벌써 두 번째 열쇠야! 버프가 좋긴 좋나봐! 이 귀한 게 두 개나 나오다니!]
“연달아 글라세로의 던전 열쇠만 나오는 걸 보면 성좌신이 아예 글라세로 집을 털어먹으라고 내준 모양이야.”
[당연하지! 승지가 잡은 마왕이니까 던전도 승지가 털어야 하잖아?]
성좌가 괴상한 논리를 펼치며 동의했다.
뭐 어차피 자신한테는 열쇠장이의 고리가 있으니 던전에 크게 구애될 필요도 없었다.
던전은 갖고서 적당히 땡겨먹다가 목돈 필요할 때 팔아넘기면 되겠다.
승지가 새로 얻은 열쇠를 고리에 달았다. 신기하게도 고리엔 틈이 없었는데, 던전 열쇠를 갖다 대자 열쇠가 스르륵 통과하며 저절로 고리에 걸렸다.
짤랑. 승지가 세 개가 된 열쇠를 짤그랑거리자 유청이 유심히 고리를 쳐다보았다.
“볼 때마다 신경 쓰였는데 말입니다.”
“뭐가?”
“첫 번째로 걸어둔 열쇠는 저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습니다만.”
유청이 말하는 건 염소 대가리가 남기고 간 검은 열쇠였다. 승지는 굳이 고깃집에서 누가 독에 걸렸고 염소 머리가 어쩌고 설명하기가 귀찮았다.
“글라세로 토벌전에서 얻은 거야. 보상으로.”
글라세로를 잡아서 붙은 녀석들이니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다. 유청이 물었다.
“왜 그 던전은 가보지 않는 겁니까?”
“사라설한테 물어봤더니 모른다고 했었잖아. 너 같으면 모르는 던전에 들어가겠냐?”
“그렇군요.”
게다가 저 던전은 열자마자 염소 대가리가 지옥으로 끌고 갈 것처럼 생겼단 말이지.
이건 더 강해질 때까진 보류다.
승지가 열쇠를 집어넣었다.
“그보다 이젠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청이 은근히 물었다. 하루마다 던전을 바꿔서 열어볼 뿐, 승지가 좀처럼 돌아갈 생각을 안 했던 것이다.
유청의 말에 승지가 찡그렸다.
“뭐야, 애도 아니고 집에 가자고 재촉하는 거냐?”
“가끔은 돌아가도 괜찮잖습니까. 던전에 오래 머물러야 될 이유도 없고.”
없긴 왜 없어.
승지가 국을 휘적거렸다. 사실 그가 던전에서 나가길 꺼려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지만 그걸 말할 수는 없었다. 특히 유청에게는. 왜냐하면….
[전방에 적 등장!]
성좌가 띠링 상태창을 띄웠다.
[질척질척 땅강아지 무리가 백 마리정도 오고 있어! 아마 이 던전은 땅강아지 둥지를 파괴하면 클리어가 될 거야!]
“그럼 둥지만 놔두고 잡아야지.”
황금알을 낳는 참새 배를 가를쏘냐. 오리였나? 아무튼.
승지가 손을 까딱였다.
“무기 던져.”
유청이 인벤을 열고 정말 아무거나 던졌다. 그래도 승지는 콤보를 띄울 준비를 했다. 유청이 조금 뒤에서 방패를 꺼내 신변보호를 할 준비를 했다.
그 둘을 중심으로 땅강아지들이 갈려나가기 시작했다.
* * *
질꺽~.
끈적한 소리와 함께 열린 던전 문에서 오물을 뒤집어 쓴 승지와 유청이 빠져나왔다.
“웩.”
승지가 바닥에 후두둑 점액을 떨쳤다. 뒤에서 몹을 방패로 쳐내던 유청도 같은 꼴이었다.
“거기서 하필 머리가 터지냐.”
“…….”
유청은 특히나 꼴이 심각했다. 익숙하지 않은 무기를 다루다보니 반응속도가 늦어져서, 결국 정수리부터 통째로 땅강아지의 터진 내장을 뒤집어써야 했던 것이다.
둘 다 어지간히 끔찍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승지가 마비되다시피 한 코를 킁하고 훌쩍였다.
“글라세로는 어째 죽은 뒤에도 좋아지질 않네.”
[끈적끈적하고 징그러운 녀석이었으니까! 으으. 얼른 씻자 승지야!]
“그래야지. 너도 대충 알아서 씻고 가라.”
“…예.”
유청이 영혼 없는 대답을 하고는 터덜터덜 사라졌다. 승지도 씻으러 들어갔다.
류의건네 집에 머무는 게 아니었다면 던전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이걸 다 치워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오싹했다.
뭘 하든 집주인이 대신 치워주는 하숙이라니 개꿀. 게다가 마주치는 일도 적었다.
몰랐는데 류의건은 진짜로 바쁜 인간이었다. 처음에만 좀 같이 지냈지, 미션이다 던전이다 회사다 하면서 거의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이 넓은 집을 진짜 자기 집처럼 쓸 수 있었다.
“으아! 죽겠다.”
거대한 침대 위에 엎어진 승지가 축 늘어졌다. 진짜 피곤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을 만큼.
그러나 승지가 불을 끄고 잠이 들라 치면 스르륵 벽을 지나 나타나는 존재가 있었다.
“오늘도 고생 많았네~?”
“꺼져.”
승지가 엎드린 채로 베개를 집어 던졌다. 그러나 서큐버스는 익숙하게 슥 피했다. 벌써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또 왔어! 또! 바보 서큐버스!]
다급히 성좌가 아우성을 쳤지만 서큐버스가 다가오자 성좌의 대화창이 밀려나며 지워지고 말았다.
서큐버스가 가진 매혹장은 상대방과 자신을 단 둘만 남게 만들어 홀리게 만드는 주술이었기 때문이다.
서큐버스가 풀썩 침대 옆에 앉았다.
“이제는 넘어올 때도 되지 않았어, 자기?”
“제발 꺼져주라.”
승지가 밀려오는 두통과 함께 신음했다.
젠장, 이래서 현실로 돌아오기 싫었는데.
현실에 있으면 밤이 될 때마다 서큐버스가 나타났다. 염소 대가리 문제로도 이미 골치가 아픈데 클랩인가 뭔가 하는 마왕의 부하까지 그를 괴롭혀댔다.
“너넨 던전도 없냐? 거기서 좀 썩어줄래?”
“우리 마왕님이 있는 던전이 얼마나 근사한데 그래? 여기보다 훨씬 넓고 편안할걸?”
서큐버스가 빙긋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인상을 쓴 승지가 두 번째 베개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목표에 적중했으나 보람도 없이 그대로 서큐버스를 통과하고 말았다.
서큐버스가 깔깔깔 웃었다.
“정말 봐도 봐도 귀엽다니까. 이미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 그건 왜 하는 거야? 애교?”
“닥쳐.”
“사납게 구니까 더 맛있어 보인다. 꺾어버리고 싶어. 머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하나하나. 으음~.”
서큐버스 다운 변태 같은 발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빌어먹을. 류의건 돌아오면 신성마법부터 배운다. 이거 대체 어떻게 쫓아내냐고.
서큐버스 때문에 승지는 매일 밤 가위에 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엿이나 처먹어.”
“인간들 속어는 참 어렵다니까. 나한테 달콤한 걸 준다는 말을 욕처럼 쓰는 게 신기해?”
“잠 좀 자게 제발 가라.”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니까. 거기선 푹 잠들게 해줄게. 오래오래~.”
“응, 괴물이 하는 소리는 안 들려~.”
승지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들었다. 공격도 통하지 않는 서큐버스를 상대하려면 결국 눈 감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서큐버스 쪽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거였다.
“!”
승지가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시뻘개진 승지가 주먹을 휘둘렀다.
“아오! 제발 좀! 건들지 말고 꺼져! 꺼져!”
“왜 그래~. 사양할 거 없다니까? 설마 그 얼굴로 혼전순결 주의자는 아닐 거잖아?”
“누가 ㅆ발 만날 때부터 결혼까지 생각 하냐?”
“아하, 그럼 마음에 둔 사람은 있다?”
서큐버스가 귀신같이 말 꼬리를 잡았다.
승지는 진짜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래서 매일 밤 이 지랄이 난다는 걸 남에게 얘기할 수가 없었다.
만약에 이 얘기가 유월 귀에 들어간다고 생각해봐. 몬스터랑 그 짓을 한다는 오해라도 사면? 우웩, 구에엑! 역겹다!
승지를 피해 날아간 서큐버스가 천장에 내려앉았다.
“이상하네. 다른 인간들은 나보면 좋아해서 어쩔 줄 모르던데.”
“그럼 그놈들이나 가서 꼬셔.”
“안 되지. 마왕님이 원하는 건 바로 당신인데.”
서큐버스가 유혹하듯 길게 다리를 뻗었다. 근데 진짜 유혹이 아니라 사람 신경 거슬리게 발가락 끝으로 자꾸 어깨를 툭툭 두들겨댔다.
승지는 저절로 오만상을 썼다.
“빌어먹을. 마왕 같은 걸 잡는 게 아니었는데.”
“쿡쿡. 후회하기엔 너무 늦은 거 아냐? 하지만 난 기뻐. 덕분에 자기를 만날 수 있었잖아.”
승지의 표정이 더욱 썩어들어갔다. 성좌가 비슷한 말을 할 때는 저렇게까지 빡치지 않았던 거 같은데.
결국 실컷 승지를 괴롭히던 서큐버스는 푸르게 동이 틀쯤이 되어서야 슬쩍 사라졌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큐라를 불러줘~.”
큐라는 무슨. 뻐큐다, 이 새끼야.
결국 그날 밤도 꼬박 새워버린 승지는 진한 허탈감에 시달렸다. 답이 없다. 이놈의 인생.
울화가 터진 승지가 새벽 4시에 유청을 불러냈다.
“야 나와! 던전 가자!”
“…….”
한참을 침묵하던 유청은 차라리 죽여 달라는 요지의 얘기를 중얼거리더니 통화를 끊었다.
그래봤자 넌 4시간이라도 잤잖냐. 승지는 퀭한 얼굴로 다시 던전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