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우르릉 쾅쾅 (1)
“그어어어어!”
[ 타탕 출현! ]
투구게처럼 생긴 머리가 하늘을 뚫고 나왔다. 그 아래쪽은 지네처럼 생긴 다리가 발버둥 치듯 나머지 공기를 밀고 나왔다.
척 보기에도 흉악하게 생긴 대형 몬스터였다.
[ 메인 미션 : 타탕 처치하기
자격 : 스탯 종합치 300이상, 미션 클리어 횟수 100회 이상, 성좌 연결도 50 퍼센트 이상 중 하나라도 해당하는 각성자.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배분됩니다.
처치 실패 시 미션 구역이 마왕의 권역으로 변경됩니다. ]
“이럴 수가!”
“갑자기 뭐야?”
“다들 무기 꺼내!”
갑자기 출현한 대형 몬스터에 각성자들이 바로 공격 준비를 했다.
그러나 어둑시니 길드원만 다른 곳을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악! 저기 조경한지 얼마 안 됐는데!”
타탕의 다리가 무지막지한 폭력을 가한 곳은 다름 아닌 깔끔한 정원수가 심어진 정원이었다.
알바 할 때 봤던 값비싼 정원수의 모습에 저기 돈 좀 썼겠다 싶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지금 그게 문제냐?
어둑시니 길드원은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괴물을 보고도 나무가 아까워서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 쪽 손으로 다른 쪽 팔꿈치를 잡더니 기지개처럼 기묘한 포즈를 취했다.
“길드장니임! 나타나주세요!”
……저거 설마 길드장 소환이냐?! 정말정말 중요하고 위급한 상황에서만 쓴다며?
승지가 당황할 틈도 없이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콰르릉!
천지를 찢어발기는 굉음이 사방의 소리를 단번에 압살시켰다. 폭풍우가 밀어닥치기 전에 모든 소리를 빨아들이듯이. 거대한 정적이 살아 움직이듯 머리를 내리눌렀다.
그리고 정적을 지배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누군가 나를 부르신다면!”
번쩍.
새하얀 뇌전이 화려한 조명처럼 그를 감쌌다. 바람도 구름도 없는 곳에서 치는 날벼락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괴물의 머리로 날아갔다.
“나타나는 게 인지상정!”
콰아앙!!
벼락은 창이 되어 괴물을 꿰뚫었다.
“그어어어어!”
비명을 지르는 괴물의 머리로 분출하는 것은 피가 아니라 새하얀 불꽃이었다.
빛은 열이 되어 흔적을 남긴다.
흰 불꽃이 벼락처럼 빠르게 번지고 불태웠다. 희게 타오르는 불꽃은 순수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무시무시한 화력을 자랑하는지 순식간에 타탕의 갑피를 끓이듯이 녹여버렸다.
굉장하잖아…!
괴물 따윈 아랑곳할 필요도 없는 압도적인 힘이었다.
[ 메인 미션 완료! ]
승지는 순식간에 나타난 미션 완료 창을 볼 틈도 없이 번개와 불꽃이 번쩍이는 인간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무대효과로 이보다 더 화려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번개에 그슬린 것처럼 뻗친 머리카락을 한 남자는 하와이안 셔츠에 반바지, 슬리퍼 차림이었다.
수염에 선글라스까지 낀 얼굴이라 도무지 몇 살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인간적으로 개 멋있다.
등장할 때부터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내가 랭킹 1위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 않아도 딱 한 방으로 정리해버리는 힘. 저 여유.
그리고 일단 패션센스가 죽여주잖아.
남자가 영웅처럼 위풍당당한 기세로 선글라스를 밀어 올렸다. 의외로 수염 위로는 꽤 젊었다.
“다들 오래 기다렸나! 내가 바로 어둑시니의 길드장 번태일세!”
“뭐라고?”
승지는 잠깐 귀를 의심했다.
“변태?”
“하하! 발음에 주의하시게! 번개 태양의 번태니까!”
“누가 이름을 그 따위로 지어?”
“바로 나일세!”
승지는 얼빠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온 몸으로 실화냐고 묻는 승지를 본 번태가 수염이 부숭부숭 난 턱 밑으로 브이 자를 그렸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은 성인이 된 기념으로 성을 만들 수 있게 해준다기에 아주 고심해서 지은 이름이지! 멋지지 않은가?”
“설마 성이 번?”
“바로 그렇다네!”
어떤 정신 나간 공무원이 저 이름을 승인해준 거냐. 근데 씨발 이게 어울리네?
강렬한 첫 등장에 정신을 못 차리는 승지를 보며 번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아, 여기서 묻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군! 자네는 누군가?”
“난….”
“길드장니이임!”
승지보다 먼저 어둑시니 길드원이 번태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방금 한 방에 괴물을 해치운 길드장의 등짝을 서슴없이 때렸다.
“길드장님도 진짜! 괴물이랑 같이 정원수를 태워버리시면 어떡해요! 다 같이 심기로 약속했었잖아요!”
“아아, 미안하네! 생각을 못했지 뭐야. 저거 복구비용은 다음 달 내 용돈에서 까주게.”
“그거랑 별개로 주말에 같이 다른 길드원이랑 나무 심으러 나오셔야 해요!”
“알겠네!”
번태가 스스럼없이 길드원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보통 저딴 걸로 자신을 불러내면 화를 낼 만도 한데 오히려 엄청나게 친근한 태도였다.
저게 바로 랭킹 1위의 인성이구나!
승지는 그만 감탄해버리고 말았다.
번태가 나타날 때부터 불편해 보이던 류의건이 뒤늦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둑시니 길드장님.”
“이야! 이거 류의건 선생 아니신가! 우리 사이에 너무 딱딱한 것도 좋질 않지. 편하게 번태 형님이라고 부르라니까!”
“…괜찮습니다.”
짤각짤각. 번태가 걸어올 때마다 고무 슬리퍼가 짝짝거리며 떨어졌다.
“이런. 그러고 보니 또 나 혼자 메인 미션을 먹어버렸군. 미안하네. 자네가 잡고 있던 괴물이었나?”
“아, 그것도 아닙니다.”
류의건이 어색하게 사양했다. 보아하니 류의건은 이 컨셉에 쩔어 있는 랭킹 1위를 상대하는 게 몹시 어려운 것 같았다.
대신 완전히 그에게 흥미를 느껴버린 승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채승지입니다. 이번 일에 끼려면 일단 제 이름부터 입단속해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지! 만나서 반갑네!”
그가 악수랍시고 손을 마구 잡아 흔드는데 어깨가 탈골될 지경이었다.
급하게 승지가 꽉 힘을 주어 붙들자 번태의 눈이 도깨비처럼 번쩍거렸다.
“호오, 자네 힘이 제법? 나랑 한 번 붙어 볼 텐가?”
“그거 괜찮….”
“무슨 소리십니까! 안 됩니다!”
류의건이 겁도 없이 수락하려는 승지를 급하게 말렸다.
그가 서둘러 목소리를 낮췄다.
“비밀리에 해결하고 싶은 미션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전한 곳에서 말씀드리겠지만… 길드장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알았네!”
번태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다. 마왕의 마, 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말이다. 오히려 승지가 되물어볼 정도였다.
“뭔 미션인지 안 물어봅니까?”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어떻게 거부하겠나! 게다가 류의건 동생의 정직함은 내가 알고 있지!”
번태가 인벤토리를 열더니 손목시계 하나를 건넸다.
“자아, 이건 손님용으로 만들어둔 일회용 소환부일세. 사용법은 우리 길드원한테 물어보고. 싸울 때 소환해주시게!”
이거 완전 장난감이잖아?
승지가 옛날 변신 장난감처럼 생긴 시계를 들어보았다. 설마 이걸 차고 아까 길드원처럼 포즈를 취해야 하는 거냐고.
아무리 승지가 광대 짓을 많이 했다지만 이건 다른 의미로 무지하게 쪽팔릴 것 같았다.
류의건은 출장 나가려는 상사를 억지로 붙잡고 결재를 맡으려는 것처럼 다급히 말을 이었다.
“벌써 가시면 안 됩니다, 길드장님! 이건 단순히 싸우는 미션이 아니라 어둑시니 길드원들까지 필요한 대형 미션….”
“그럼 회의 때 다시 부르게!”
번태가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는 지금 건네준 장난감과 똑같이 생긴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 거기서 초록 불빛이 삐용삐용 빛나는 걸 확인한 번태가 씨익 웃었다.
“또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거든! 친구들, 나중에 다시 만나지!”
뒤통수로 양 손을 갖다 댄 번태가 멋진 포즈를 취했다. 정확히는 상당히 하체를 강조해 모른 척 하고 싶어지는 포즈였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꽈르릉!
나타났을 때처럼 번개가 다시 내리치더니 붙잡을 틈도 없이 번태가 사라졌다.
“진짜 갔네?”
[가버렸어!]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인간이다.
“…….”
말을 하다 끊긴 류의건이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정말 번태가 그대로 가버린 걸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할 말이 많은데 차마 할 수가 없는 표정이랄까.
랭킹 2위를 저렇게까지 좌절시킬 수 있다니 랭킹 1위가 맞긴 맞군.
약간 불쌍했지만, 승지는 은근슬쩍 그에게 시계를 떠넘겼다.
“이건 네가 차라. 난 쪽팔려서 저 길드장 부르는 포즈는 못 하겠다.”
“…….”
류의건이 심란한 표정으로 번태를 소환하는 시계를 받았다. 보아하니 그도 어떻게 번태를 불러야 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착한 류의건은 얌전히 명품 시계 밑에 웃기는 장난감 시계를 찼다.
“……저런 분이시지만 부르면 정말 오실… 겁니다.”
“어어, 그래. 그럴 것 같네.”
제 딴에는 위로하려고 한 말 같은데 거꾸로 승지가 류의건을 위로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이미 수명 십 년은 잃어버린 것 같은 얼굴에다가 대고 진짜 오겠냐고? 이럴 수도 없잖아?
어쨌든 길드장을 만나겠다는 목적은 달성했으니 잘 됐지 뭐.
승지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확실히 인상 깊은 인간이었다. 랭킹 1위쯤 되면 잘 미쳐야 되나 싶을 정도로.
하지만 번개로 시작한 폭풍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간 류의건의 집에서 또 다른 폭풍이 승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짜악!
현관을 열자마자 갑자기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월아!”
[꺄악 승지야!!]
당황한 목소리가 얼얼한 뺨 너머로 들려왔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승지는 놀란 눈으로 잔뜩 화가 난 얼굴을 응시했다.
새빨갛게 붉어진 얼굴이 커다랗게 뜬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이 청이 팔을 잘랐어?”
“……그래.”
승지가 약간 느리게 대답했다.
설마 돌아오자마자 이런 일이 있을 줄 몰랐던 류의건이 당황하며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긴 생머리의 여자는 랭킹 2위 따윈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성큼성큼 승지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꽤나 강한 각성자인게 분명했다.
그가 씨근거리며 치미는 분노를 참을 때마다 대리석으로 된 바닥에 금이 갔기 때문이다.
승지는 마구 새어 나오는 그의 막강한 힘을 보면서도 빤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머리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뒤늦게 달려 나온 청이 월이라고 불린 사람의 팔을 붙잡았다.
“거기까지 해! 내가 설명했잖아.”
“네 팔을 잘랐잖아!”
“잠깐 진정하세요…!”
월이라고 불린 그는 다 필요 없고 당장이라도 승지를 죽일 것처럼 다가왔다.
“할 말 있어요?”
“…없어.”
울컥한 그는 한 대 더 칠 것처럼 주먹을 콱 쥐었다. 승지는 더 맞아줄 생각으로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승지를 때리는 대신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이번 일은 청월량 길드장으로서 사과하겠습니다.”
“!”
“월이 씨….”
승지는 예상 밖의 정중함에 놀라지 않았다.
그보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승지는 남몰래 이를 깨물었다.
하필이면 내가 팔을 잘라버린 인간의 여자 형제가 존나게 이상형이었다.
X나 망했군.
원하지도 않는 모쏠의 가호가 승지의 정수리에 냅다 꽂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