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넌 마왕이고 동시에 버러지다 (3)
하루에 마왕 두 마리라.
좀 과하네.
하늘을 메우는 거대한 크기로 보아 나르키스는 클랩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할 게 분명했다.
칼질 몇 번으로 죽진 않을 테니 완벽한 콤보를 써야만 사냥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나한테 비행 스킬이 없다는 거지.
까마득하게 높은 하늘을 올려다 본 승지가 허공답보로는 어림도 없다고 깔끔하게 인정했다.
“저것들은 또 뭐야?”
밀려드는 구름 옆으로 조그마한 그림자들이 보였다.
처음엔 마왕의 부하들인 줄 알았다.
그러나 떠다니는 사람 같은 것이 계속해서 마왕을 공격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르키스가 나타난 곳에서부터 따라온 해외 랭커들이 분명했다.
비상시라 그냥 여기까지 날아왔나? 나중에 된통 깨지겠군.
그래도 근성 하나는 인정해주겠다. 한 번 본 마왕은 놓치지 않고 따라왔으니까.
“어떡할래. 외국 놈들한테 맡길 거야?”
승지가 재촉했다.
“난 직접 조지고 싶은데. 대충 해결 됐으면 나 좀 날려줘.”
치료에 열중하던 번태가 약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승지 자넨 의외로 범윤오를 죽여서 마왕을 돌려보내잔 얘기를 안 하는군?”
“응. 지멋대로 깽판 친 것들을 그냥 돌려보내면 성질나서 밤에 잠을 못 자거든.”
승지가 발을 탁탁 굴렀다.
“아무튼 띄워줄 수 있냐?”
“…잠시만 기다리게!”
번태는 허리에 쏟아 붓던 포션과 수포를 뜯던 단검을 유월에게 넘겼다.
“뭡니까?”
“뒤는 자네가 치료해줄 수 있지?”
“싫습니다!”
“끄아아악!”
유월이 단검을 그대로 범윤오의 허리에다 꽂아버리자 그가 비명을 질렀다.
“저도 싸우겠어요.”
“자네도 비행 스킬은 없잖나. 류의건 선생이 올 때까지만 부탁하겠네.”
번태가 빠직거리며 지팡이에 번개를 불러 일으켰다. 뇌룡을 소환해 그 위에 태울 작정이었다.
승지는 약간 지체했다.
“유월 씨. 걱정하지 마세요.”
“네?”
“일단 날개부터 잘라놓으면 여기다 떨어트릴 테니까. 같이 잡죠.”
광대는 간신히 입술을 깨물었다. 왜냐하면 이건 하늘에서 별도 따다주겠다는 승지식 구애였으니까.
여기서 웃으면 창피해 할 테니까 절대로 웃지 말아야지. 절대로…!
물론 참기 무진장 어려웠다.
“크흐읍… 크흑. 마왕을, 마왕인데, 크허읍.”
광대가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동안 승지는 진지하게 유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월은 생각에 잠기듯 범윤오의 몸에 박아놓은 단검을 빙글빙글 돌렸다. 승지와 유월의 교감에 조미료처럼 비명이 곁들여졌다.
“끄아앗! 끄아아악!”
“좋아요. 약속했어요.”
만족한 승지가 씩 웃었다.
연애처럼 오글거리는 거 보다는 이렇게 전장에서 유월과 함께 하는 게 가장 편했다.
광대가 둘을 흐뭇하게 보더니 속삭였다.
“거기까지! 사망 플래그 세우기 전에 빨리 올라타!”
“뭔 플래그?”
번태가 굽이치는 뇌룡의 목덜미에 다리를 걸쳤다. 승지가 미심쩍게 찌직 거리는 번개를 응시했다.
“이거 사람이 타도 되는 거 맞아?”
“내 조종 하에 있으니 겁내지 말게!”
승지는 똑같이 번태의 뒤에 올라탔다. 착석감은 아주 기묘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이 아니라 밀어내는 힘 자체에 올라탄 느낌이었다.
“오오, 신기한데.”
“꽉 잡게!”
그가 올라타자마자 뇌룡의 꼬리가 꽈르르릉 흔들리며 바닥을 때렸다. 그리고는 곧장 나르키스를 향해 날아올랐다.
“우와아아아! 무지 흔들리잖아!”
옆에 있던 광대가 정신없이 볼 살을 푸들거렸다. 상승할 때마다 계속 용의 몸이 굽이쳐 귀가 먹먹해지도록 바람이 강타해댔다.
폭주하는 기관차를 다리로 붙잡는 느낌이었다.
구름과 같은 높이까지 올라오자 비로소 흔들림이 멈추고 뇌룡의 움직임이 완만해졌다.
번태가 외쳤다.
“내가 여기까지 자네를 데려온 건 마왕을 잡을 수 있는 건 자네뿐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네!”
“잘 믿었어!”
순수한 스탯을 제외하고 스킬만 따지자면 이 중에서 승지를 따라올 만한 사람이 없었다.
완벽한 콤보가 내 밥줄이다!
승지가 뇌룡 한 쪽으로 무기를 늘어트렸다. 위치를 고려해 마왕의 무기는 자연스럽게 창의 형태를 취했다.
또한 마왕의 무기는 길다는 형태의 두 번째 이점도 취했다.
승지와 번태가 나르키스에만 집중하는 사이, 늘어진 한쪽 끝으로 게걸스럽게 뇌룡에게서 새어나오는 번개를 삼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네 스킬은 지금 바로 발동할 수 없을 테지?”
“그래, 젠장.”
지금 승지가 메모라이즈 해둔 콤보는 고작해야 10콤보였다.
클랩과 싸웠을 때 생각보다 콤보 수를 많이 채우지 못했다.
애초에 마왕이 바로 뒤에 나타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범윤오를 뒤져라 패서 콤보를 채울 수도 없었다.
어쨌든 훔쳐간 성좌를 복구하려면 목숨은 붙여놔야 하는데, 쇠약해진 저 몸으로 99콤보를 다 채웠다간 바로 요단강을 건너버릴 테니까.
“마왕이 상대라면 꼭 99콤보를 채울 필요도 없어. 80콤보만 채워도 필살기가 발동되어서 저 새끼를 없던 것처럼 만들어줄 테니까.”
“좋군, 좋구만. 과연 구름을 때리는 것으로도 콤보가 쌓일지 시험해 보세나!”
번태가 곧장 나르키스를 향해 돌진했다.
무섭게 좁혀지는 거리 속에서 승지는 비로소 마왕을 따라온 해외 랭커들을 볼 수 있었다.
레게 머리를 한 남자는 번태와 비슷한 용 한 마리를 데리고 계속해서 구름을 조종하려고 애썼고.
구름 겉면에 여러 가지 마법 문양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했다.
하나하나 결코 약하지 않은 공격들이 여러 번 강타할 때마다 나르키스는 귀찮은 듯이 구름 사이를 벌려 요정 무리를 내보냈다.
“캬아아!”
보랏빛 요정 떼가 휩쓸고 간 자리로 반짝거리는 무지갯빛 잔상이 남았다.
한 때 그것으로 마약까지 만들었던 만큼, 효과는 강력했다.
“으아악!”
떠다니던 각성자 하나가 잠시 추락했다가 다른 각성자에게 간신히 구조됐다.
그들이 여러 가지 포션을 머리 위에 뿌리며 계속 전투에 재개했다.
“간다!”
번태는 민첩하게 다른 각성자들 사이를 요리조리 비켜나가며 나르키스에게 돌진했다.
“왓 더….”
놀란 해외 랭커들이 신음하는 사이 번태는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뇌룡을 급회전 시켰다.
그러자 사람이 탄 머리 부분은 안전하게 틀어지며 꿈틀거리는 번개의 꼬리가 구름을 강타했다.
꽈르르르릉!
태풍을 때리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동하는 하늘 속에서 그들이 반사적으로 귀를 감쌌다.
그리고 꼿꼿하게 상체를 세우고 있던 승지가 나르키스에게 창질을 했다.
“하압!”
기합을 내지른 승지가 그대로 구름을 찢어놓았다.
창대에 구름이 실처럼 엉기고 그 안에 들어있던 보랏빛 광채를 얼핏 드러냈다.
구름을 타고 흐르는 번개까지 더해져 빛이 수많은 색채로 산란했다.
크게 선회한 뇌룡이 아까보다 작아진 크기로 꿈틀거렸다.
짧잖아!
승지가 분통을 터트렸다.
“젠장! 닿지도 못했어!”
“아깝구만!”
그들이 이차 돌격을 준비하는데 주변에 떠있던 해외 랭커들이 갑자기 그들에게 미친 듯이 화를 냈다.
“유 머더퍼커! 돈 두 댓 어겐!”
“돈 깁어 쉿 어바웃 댓 몬스터!”
“뭐라고? 이 새끼들 지금 욕했지?”
“자극하지 말라고 하는군!”
다행히 번태가 영어를 할 줄 알았다.
“미국에서도 그렇게 자극하다가 나르키스가 고치에서 성장요정을 내보내서 아래쪽이 초토화가 됐다고 하네!”
“성장요정?”
“사람만한 크기의 요정 말일세!”
번태는 실시간으로 대화창을 받고 있는지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갔다.
“아하, 저들은 저 구름에 깃든 마력에 자신들의 마법을 새겨 넣어 통째로 이세계로 보내버릴 생각이었군!”
“뭐? 미쳤나. 그러다 실패하면 지들은 마력만 쪽쪽 빨리고 싸우지도 못한다는 얘기 아니야?”
승지가 화를 버럭 냈다.
“그 똥을 우리보고 치우라고?”
“저쪽 말로는 자기들 나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하는 걸 고맙게나 여기라는군! 주술 중간에 나르키스가 이동해서 여기까지 왔는데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이야!”
“오, 개소리가 지랄 맞아.”
머리끝까지 혈압이 오른 승지가 영어는 못해도 잘 알고 있는 국제적인 욕을 마음껏 선보였다. 해외 랭커들의 눈살이 마구 찌푸려졌다.
“마왕도 못 잡고 빌빌거리는 새끼들이 도와주는 척은 지리게 하네. 튈 생각 하는 새끼들은 빠져!”
마음껏 중지를 날리던 승지가 마왕의 무기를 휙 들어올렸다.
“이쪽은 도망가는 취민 없으니까!”
닥치는대로 크기만 키운 망치를 본 해외 랭커들이 급하게 물러났다.
승지는 궤도 안에 사람이 있든 말든 상관없이 휘둘러버릴 기세였던 것이다.
점점 거대해지는 망치에 승지의 팔뚝이 힘껏 부풀었다.
“번태! 다시 들이 박아!”
쩌적, 쩌저적.
다시 힘을 키운 뇌룡이 입을 벌렸다.
번태는 뇌룡을 틀어쥔 힘을 놓기 전에 재빨리 물었다.
“신중해지게! 정말로 요정들이 쏟아지면 그 뒷감당을 할 수 있겠나?!”
“댁은 그렇게 유월을 못 믿어?”
승지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유월이 싸우는 모습을 봤다. 그래봤자 요정들인 주제에 몸집만 커진다고 상대할 수 있을 거 같나?
“어디 한 번 수백 명을 쏟아보라고 해.”
승지의 눈이 번득거렸다. 그 말에 번태가 뇌룡을 붙잡고 있던 힘을 퉁겼다.
슈우욱.
가공할 속도로 뇌룡이 다시 한 번 돌진했다. 가속을 받은 승지는 이미 귀가 찢어지도록 빠른 속도의 뇌룡을 프레임 컨트롤로 계속 가속했다.
더 빨리, 빠르게!
빠드득. 힘이 실린 망치의 끝이 점점 들어 올려졌다.
쿠웅!!
뇌룡이 직접 구름에 박치기를 하는 반동을 따라 크게 망치가 휘둘러졌다.
“으아아압!”
꽈아아아앙!!!
하늘이 쪼개지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아까 들렸던 소리와 비교도 안 될 충격에 그들이 추풍낙엽처럼 흔들렸다. 떠있던 대부분의 랭커들이 어린애 장난처럼 마구 흔들리며 튕겨나갔다.
[ 1콤보! ]
구름 속으로 움푹 들어간 망치 너머로 드디어 반가운 콤보 알림이 떴다.
하, 콤보 하나 올리기도 빡세네.
역시 인간형 마왕보다는 이런 녀석들이 강하다.
망치를 삼킨 구름이 서서히 갈라지며 아까 영상 속에서 보았던 나르키스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났다. 그 눈에는 눈동자가 없었다.
흰 막으로 덮인 눈이 분명한 노기를 띠고 있었다.
“카르르륵.”
고막을 끓이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나르키스 마왕을 축소한 듯한 개체가 고치 바깥으로 수없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해외 랭커들이 경고했던 성장요정들이었다.
인간만한 요정들이 비처럼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어딜!”
승지는 그대로 나르키스의 면상에다가 두 번째 콤보를 꽂으려고 했다.
그러나 성장요정을 내보낸 나르키스는 더 하찮은 인간을 보기 싫다는 듯 다시 구름 속으로 몸을 감췄다.
그동안 부웅, 하는 소리를 내며 보랏빛 성장요정들이 그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승지는 망치를 회수해 다시 검의 형태로 바꿨다.
빠르게 썰어버린다!
번태도 이번엔 지팡이를 빼들었다.
“우리 18위 랭커를 위해 쩔 한 번 해볼까! 내가 기절시킬 테니 막타만 치게!”
“콤보 안 끊기게나 잘 해!”
승지가 퉁명스럽게 외쳤다. 번태는 그물처럼 번개를 펼쳐들어 산개한 요정들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각개전투를 하려던 해외 랭커들도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번태와 승지가 나타난 요정들을 자기들이 다 상대하려고 들 줄은 몰랐던 것이다.
갑자기 싸울 일이 없어진 그들은 곧 지상으로 떨어진 요정들을 대신 처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상에서도 이미 유월이 요정들을 맡아 화려한 칼춤을 추고 있었다.
“캬으아아!”
“크으아악!”
아니, 칼춤이 아니라 화려한 학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