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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너른 들판으로 (4)

목적지에 가까워진 배는 어느 순간 상승이 아니라 추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승지는 갑판으로 나와 배가 착륙하는 걸 구경했다. 거대한 별이 점차 지상으로 보일 때가 되자 배가 크게 선회하더니 별과 수평을 맞췄다.

수우욱.

멀리선 보이지 않던 푸른 점이 점차 커졌다.

[와! 호수가 있었구나!]

바다라고 해도 믿을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호수를 따라 착지한 배들은 연이어 물살을 가르며 상륙했다.

“도착했군.”

오크가 삐걱 경사로를 내렸다.

“간만에 즐거웠다 인간.”

“그래, 재밌었다 오크.”

덕분에 일주일동안 심심하지 않게 왔다.

“승지님, 승지님!”

“같이 가요!”

땋은 머리와 곱슬머리가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당장이라도 다른 배에서 습격자가 나올까 두려운 듯 둘 다 승지에게 꼭 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주변에 아무것도 없네.”

휑한 들판엔 이제 막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시끌시끌하게 짐을 내릴 뿐, 사람이 사는 흔적은 없었다.

“여긴 마무자님의 소유가 된 지 얼마 안 됐거든요.”

“저희는 신전까지만 가면 돼요.”

“사람이 없는데 신전이 있다고?”

“예전에는 사람이 살았던 곳이니까요.”

승지는 웃자란 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응시했다. 산사태나 화산이라도 터져서 싹 쓸려버린 다음에 아무도 오지 않은 것처럼 온통 평원뿐이었다.

“여기서 다시 배가 뜨려면 언제지?”

“배마다 달라요. 우선 약속했던 배부터 찾아드릴게요!”

땋은 머리와 곱슬머리가 번갈아 달려갔다. 한 명은 식량을 사고, 다른 한 명은 배를 구하러 갔다.

그러다 습격자의 존재를 기억해내곤 화들짝 놀라 승지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다행히 사람이 많은 곳에서 둘을 해칠 수는 없었는지 습격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참 만에 보따리를 품에 가득 안은 곱슬머리가 장보기를 끝냈다.

“으, 짐이 너무 많네요.”

“다 줘.”

승지가 대충 인벤토리를 열고 짐을 슉슉 던져 넣었다. 곱슬머리의 눈이 커졌다.

“마법도 쓸 줄 아셨나요?”

“아니라니까.”

승지는 머쓱해졌다. 이세계 신이 준 인벤토리인데 이세계 인간이 감탄하니 뭔가 어색했다.

[인벤토리는 걱정하지 마, 승지야! 여기도 이세계라서 존재 증명치는 착실히 쌓이고 있어!]

“다행이네.”

[게다가! 여기도 결국 던전과 이어진 세계라서 던전 카운트도 올라가고 있었어! 완전 이득이지?]

[ 서브 미션 : 광대의 순회공연

방문한 던전 (18/99)

보상 : 스탯 분배치 10, 스킬 ‘광대의 친구’ ]

잊고 있던 서브 미션까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하니 오히려 좋았다.

배를 구하러 갔던 땋은 머리도 돌아왔다.

“안타깝게도 클랩의 성으로 가는 배는 없대요. 하지만 일이 끝나면 저희 별로 같이 돌아가요! 거기선 훨씬 더 배가 많으니까요.”

“알았어. 그럼 출발할까?”

승지는 웅성거리는 인파를 잠깐 넘겨다보았다.

“빨리 출발하면 거리 벌리기에도 좋겠지.”

“네!”

땋은 머리와 곱슬머리가 앞장서서 걸었다.

승지는 경호원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별로 걱정하진 않았다. 성좌의 넓은 시야가 알아서 경계해줬기 때문이다.

[전방 100m! 수상한 인간 발견!]

성좌가 네비게이션처럼 상태창을 띵 띄웠다.

[돌아갈까?]

“경로 뽑아봐라.”

성좌는 당장 보이는 지점만큼 밝아진 미니맵에 쭉 선을 그려보았다. 장애물처럼 간단하게 사람을 피할 수 있어서 편했다.

“좋아. 고맙다.”

[(๑˘ꇴ˘๑)]

땋은 머리와 곱슬머리는 같이 걸으며 혼잣말을 해대는 승지를 흘긋흘긋 바라보았다.

“아가씨 정말 괜찮을까요?”

“그래. 저렇게 혼잣말을 하시는 것도 어쩌면 다른 신과 소통하시는 걸지도 모르잖아?”

“어머나!”

이동은 순조로웠다. 밤이 되어도 보초를 설 필요가 없었다.

누가 가까이 오면 성좌가 인벤토리를 열고 시끄럽게 깨지는 물건을 떨어트리기로 했던 것이다.

[승지가 마음껏 자도 안전해!]

한 이틀 동안은 승지도 긴장했지만, 걸어도 걸어도 평원밖에 보이지 않는데다 뭐가 나타나는 일도 없이 평화롭자 결국 긴장을 풀었다.

대신 땋은 머리와 곱슬머리가 열정적으로 정적을 메꿨다.

“신을 잃으면 별은 멸망해요.”

땋은 머리가 손가락을 치켜들고 설명했다. 나무에 비스듬히 앉아있던 승지가 느긋하게 고개를 들었다.

“원래부터 주인이 없는 별도 있잖아?”

“그런 곳은 괜찮죠. 문제는 한 번 신께서 지배했다가 사라져버린 곳이에요. 별의 법칙이 완전히 망가져 버리거든요.”

땋은 머리가 무시무시한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별을 지배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별의 법칙을 바꾸게 돼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바꿀 때가 많죠. 그래서 삶이 윤택해진 대가를 되돌려 받는 거예요.”

괜히 저놈들의 신을 우리가 마왕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네.

승지는 그딴 신이 없어도 잘만 살아왔던 세월을 돌이켜보고는 말했다.

“그럼 처음부터 신이 없는 게 낫잖아? 인간들끼리 알아서 하라 그래.”

“그런 말 마세요. 이렇게 별에서 별로 다닐 수 있게 되는 힘도 전부 별의 주인께서 법칙을 바꾼 덕분인걸요.”

“물론 글라세로처럼 사악하고 파괴만 바라는 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신을 모욕할 순 없죠!”

곱슬머리가 열렬히 변호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마왕이잖아? 성좌신이 때려잡으려고 드는 마왕.

성좌가 다나우라는 인간을 마왕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처음엔 이해가 안 갔지만, 저 인간들의 반응을 보니 그럴 만 하다 싶었다.

성좌신이 나타난 이후로 우리의 삶이 나아졌나?

바로 얼마 전까진 나도 각성자 따윈 나타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꾸벅꾸벅 졸던 승지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잠을 깼다.

“놀라지 말고 들어주세요. 우리 아가씨는 위대한 드래곤께서 새로 정복한 별이 어디 있는지 들으러 가는 거예요!”

“네! 놀라셨겠지만, 제가 바로 다음 별의 주인이 될 지도 모른답니다!”

잠이 확 달아났다. 승지가 상체를 젖혔다. 드디어 깜짝 놀란 승지의 반응에 땋은 머리와 곱슬머리가 모두 눈을 반짝거렸다.

“어… 네가 다음 마왕이 된다고?”

“아뇨! 감히 그럴 리가요! 위대한 드래곤의 일부가 되는 거죠.”

마왕이라는 말이 저절로 신으로 번역 되었는지 땋은 머리가 자연스레 대답했다.

“전 그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왔어요.”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오르며 나온 열기가 기묘하게 땋은 머리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어머!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내일 또 걸어야 하는데.”

“먼저들 자라.”

승지는 완전히 잠이 깨어버렸다. 잠깐 만에 땋은 머리와 곱슬머리는 순진한 얼굴로 잠들었다.

[이 사람들 말이 틀린 건 아니야. 다들 마왕을 필요로 하고, 무서워하기도 하고, 복잡해.]

성좌는 제법 아련해 보였다. 승지는 목 뒤로 깍지를 꼈다. 이세계 인생 같은 거 상상이 안 되지만.

“살아있었을 때 마왕을 만들어내야 할 만큼 힘들었냐?”

[…….]

성좌는 그저 광대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고.

[에헷, 지금은 승지가 있는 걸!]

대답 대신 재롱을 피우는 걸 본 승지는 그대로 옅은 숨을 내쉬었다.

“됐다. 잠이나 자자.”

꽤나 불편해 보이는 자세였지만 승지는 나무에 기댄 채로 잠들었다. 불편한 자세로 자는 데 익숙해 보였다.

딱, 딱.

잠든 승지를 보며 성좌는 차라리 적이 습격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강해지게만 만들어주는 게 좋았어. 힘을 얻는 과정을 보며 함께 기뻐하는 게 좋았다.

광대가 아직 살아있었을 시절에도 그랬다.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위해 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마왕을 만들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라. 그게 뭔지 알고 있으니까. 승지가 겪을 일은 없을 거야.]

성좌는 순순히 광대 노릇을 하진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 * *

승지가 튕겨나가 비행선에 탔을 때, 류의건과 유월도 대강의 상황을 파악하고는 다시 클랩을 찾아갔었다.

“튕겨 나갔다고?”

찌뿌둥한 자세로 웅크리고 있던 클랩이 되물었다.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클랩에게 따지느라 류의건은 이성을 단단히 발휘해야 했다.

“당신의 창고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를 돌려보낼 방법이 있습니까?”

“내 창고에 그런 게 있는 줄 나도 몰랐어.”

클랩이 짜증을 냈다. 유월이 덤덤하게 마왕을 상대로 다그쳤다.

“당신 책임입니다. 해결하세요.”

“…….”

클랩은 잠깐 눈동자가 뾰족해지며 그들을 공격할 듯이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귀찮아졌는지 손을 내렸다.

“큐라.”

“네! 마왕님!”

“네가 알아서 해결해.”

“그러지요, 마왕님!”

일을 떠넘기는 데도 큐라는 방긋방긋 웃었다. 포르르 날아온 큐라가 류의건과 유월의 목을 동시에 감쌌다.

“자아, 두 사람. 나한테 자기가 어디로 날아갔는지 안내해주겠어?”

류의건과 유월이 동시에 큐라를 쳐냈지만, 승지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움직였다.

창고로 간 큐라는 부서진 인형과 벌써 멀어져버린 비행선의 꼬리를 올려다보더니 작은 악마를 소환했다.

“필레!”

“큐라 주인님!”

“배의 주인과 도착지를 물어와.”

“넵!”

큐라가 작게 손을 벌리자 나타난 차원문으로 작은 악마가 사라졌다.

“소식이 올 때까지 좀 기다려. 그 다음에 데려다 줄 테니까.”

류의건과 유월은 이틀을 기다렸다. 그러나 작은 악마가 돌아와서 전한 말을 듣고는 큐라는 일단 돌아가야겠다고 말을 바꿨다.

“그럼 아무 소득도 없었단 말입니까?”

“어딘지 위치는 알았지만 그냥 따라가 봤자 자기를 찾을 순 없어. 그 별이 대체 얼마나 큰 줄 알기나 하니?”

큐라가 뾰로통하게 면박을 줬다.

“너네 별로 돌아가서 자기가 아끼는 물건 하나만 집어와야겠어. 그럼 자기가 어딜 가든 위치를 정확히 알고 쫓아갈 수 있을 거야.”

“승지 씨의 물건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그렇게 해서 유월과 류의건은 큐라를 데리고 현실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상황을 전해들은 유청과 번태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허어! 또 엄청난 모험에 끌려들어 갔구만!”

“대체…….”

유청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어째 승지란 인간은 있어도 없어도 사람을 빡치게 만드는 걸까?

“기껏 이세계 인간 뒤처리를 맡겨놓고 본인은 튀어버리다니….”

“걱정… 마세요. 바로 가서 데려올 수 있을 겁니다.”

류의건이 애써 상황을 진정시켰다.

“실례인 건 알지만 제가 잠시 승지 씨방에 들어갔다 오겠습니다.”

“그래! 얼른 가져와!”

큐라가 싱글거리며 재촉했다. 졸지에 서큐버스의 명령에 따르게 된 류의건이 피로한 얼굴로 들어갔다. 여태 듣고 있던 번태가 수염을 쓸었다.

“그럼 당분간 보기 힘들단 얘기로군!.”

“길드장님은 승지 씨를 찾아서 뭘 하려고 그러세요?”

“음? 그건 돌아오면 같이 말해주겠네! 지금 말하면 김이 새잖나!”

번태가 유월의 질문에 대답하고는 팔짱을 꼈다.

“자아, 어쨌든 내 볼일은 사라졌으니 돌아왔을 때 다시 보도록 하지! 무사 귀환하면 연락 주게나!”

번쩍! 번태가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류의건이 낭패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큰일입니다. 승지 씨 개인 물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방을 다 뒤졌는 데도요?”

“예. 이렇게 까지 없을 줄은….”

류의건이 난감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각성자라 인벤토리가 있다보니 중요한 물건은 전부 거기 넣어둔 모양입니다.”

“그럼 어떡하죠.”

유월은 별로 의욕 없이 되물었다. 유청 때문에 승지 일에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시간을 무한정 투자할 순 없었다.

그도 길드장이고 돌봐야 할 가족이 있다.

류의건은 곧 유월이 이탈할 걸 직감했는지 다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전에 사망을 알리러 갔을 때 승지 씨의 부모님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쪽으로 간다면 물건 하나쯤은….”

유심히 그들을 보고 있던 큐라가 말했다.

“꼭 물건이 아니어도 돼.”

“응?”

“이 여자만 데려가도 되겠는걸.”

큐라가 유월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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