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Clap your hands (4)
“이제야 우리 둘만 남았어.”
큐라가 사람 참 오해하게 만드는 발언을 해댔다.
[신경 쓰지 마, 승지야! 여기서 이기면 우리가 이기는 거라구!]
체스판이 다시 어두워졌다. 이제 남은 참가자는 둘뿐이었다.
[ 세 번째 대결! ]
팟. 초록색 전광판이 뜨며 익숙한 알림을 띄웠다.
[ 조커! VS 퀸! ]
이번에는 승지와 큐라가 체스판 위에 뜬 채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허공에 선 승지가 자신의 발밑으로 체스판을 내려다보았다.
[ 게임은? 두 사람의 기억! ]
[ 광대와 여왕은 함께 놀았던 적이 있을까? 칸마다 숨겨진 기억을 뒤집어 짝을 맞춰보자! 먼저 자신의 기억을 모두 되찾은 사람의 승리! ]
“기억이라고?”
“직접 해보면 알 거야.”
큐라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승지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칸을 두 개 고르면 되는 거냐?”
“맞아!”
“이거랑 저거.”
처음이니 승지가 대충 손가락으로 칸을 가리켰다. 그러자 딸깍 칸이 뒤집히더니 홀로그램처럼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 승지다!]
승지도 덩달아 놀랐다. 내가 왜 저기서 나와.
지금보다 두 살 정도 어려 보이는 모습이었다. 교복을 입고 있으니 확실하다.
[승지 너 학교도 다녔었어?]
“다녔지. 그럼.”
승지가 어색하게 뒷목을 문질렀다. 와, 갑자기 보니까 저렇게 내 모습이 낯설 수가 없다.
교복을 입은 승지는 허공에서 뭔가에 대고 멱살잡이를 했다. 기억 속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 같았다.
반면 다른 칸에서 나타난 사람은 뜬금없이 외국인이었다.
“저 쪽은 모르는 사람인데?”
“저건 내 기억이야.”
큐라가 살랑거리며 날개를 접었다.
“이 체스판에 갇힌 기억을 누가 누가 더 많이 짝을 맞추는지 볼까?”
큐라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기억 속의 남자가 갑자기 목을 컥컥하고 붙잡더니 털썩 쓰러졌다.
[꺅! 저건 사람을 죽인 기억이잖아!]
성좌가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승지의 미간도 덩달아 구겨졌다.
“기분 나쁜 게임이구만.”
“후후. 이제 막 시작 했는데 벌써 기분 나쁘다고 하긴 일러~.”
큐라가 여유롭게 말꼬리를 올렸다.
“승지 씨 이기세요!”
“힘내십시오!”
밑에서 유월과 류의건이 응원을 보내왔다. 적어도 이번엔 누가 다치거나 죽을 일이 없으니 순수하게 게임으로서 즐길 생각인 모양이다.
난 차라리 싸우고 싶다만.
승지가 한숨을 쉬었다.
“나 대신 기억해 놔라.”
[응! 벌써 기억했다구!]
성좌가 대화창에 체스판을 띄우더니 방금 기억을 본 칸을 작게 표시했다. 승지의 기억은 빨간색, 큐라의 기억은 파란색이었다.
승지가 대놓고 부정행위를 하는 데도 큐라는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도 않았다.
기억력이 중요한 게 아닌가?
찜찜해진 승지가 까딱였다.
“네 차례다.”
“으음~ 난 A7번이랑 E3번을 골라볼까?”
딸깍, 딸깍.
연달아 뒤집힌 칸에서 큐라의 모습만 튀어나왔다. 심지어 모델처럼 각각 다른 포즈로 유혹하는 자세를 취한 상태였다.
[으엑.]
“귀엽지?”
큐라가 눈을 찡긋거렸다.
뭔데 자연스러워? 저거 사실은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고 고른 거 아니냐?
합리적 의심이 싹텄다.
저쪽이 체스판의 위치를 모조리 알고 있다면 성좌한테 대신 기억하라고 시켜도 당연히 넘어가겠지.
하지만 아무리 큐라가 위치를 알아도 짝을 맞추려면 각각의 기억이 무슨 일인지 알아야만 했다.
요컨대 상대방에겐 무슨 기억인지 힌트를 주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상대방의 기억을 구체적으로 알아내야 승리한다.
다시 차례가 돌아온 승지는 방금 나왔던 큐라의 기억 중 하나를 찍어 살해당한 외국인이 있던 칸과 맞춰보았다.
[ 정답! ]
운이 좋았는지 기억이 바로 맞아떨어지며 한 쌍의 칸이 뒤집혔다.
[꺅! 우리가 앞서나가고 있어!]
성좌가 좋아라 했다.
차례가 돌아온 큐라가 새로운 칸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둘 다 승지의 기억이었다.
아, 누군지 알겠다. 아르바이트 할 때 봤던 매니저와 담임이었던 선생이네.
“손님들이 싫어하니까 창고로 가라고 했잖아!”
“네가 걱정된다, 승지야.”
각각 한 마디씩 던진 기억은 곧 짝이 맞지 않아 사라졌다.
아무래도 이번 짝 맞추기 게임은 기억의 주인인 승지와 큐라가 한 칸에 있다면, 다른 칸에 상대방이 등장하는 구조가 확실했다.
그래서 짝을 맞추는 게임이 되는 거야.
승지가 다시 칸을 골랐다.
“F7, F8.”
이번엔 큐라의 모습이 하나, 모르는 인간의 모습이 하나 떠올랐다.
“왜 말을 듣지 않는 걸까?”
“난 안 돌아가.”
성별을 알 수 없는 중성적인 목소리였다. 머리에 덮어쓴 로브 때문에 생김새조차 불분명했다.
둘이 대화하는 건가? 바로 또 맞출 줄은 몰랐는데.
그러나 승지의 기대와 달리 칸은 다시 원래대로 뒤집혔다.
“어, 뭐야. 방금 둘이 한 쌍 아니냐?”
“아니야.”
큐라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가 손을 길게 뻗어 체스판을 가리켰다.
“E8, G8.”
[…승지야. 이 게임 그만 하자.]
칸이 막 뒤집히려는데 갑자기 성좌의 대화창이 확 눈앞을 가렸다.
“왜 그래? 비켜봐. 안 보이잖아.”
[그만둬줘!]
성좌가 초조하게 대화창을 연이어 띄웠다.
[저건 내 기억이야…!]
“뭐?”
스르륵. 뒤집힌 칸에서 올라온 인영이 가려진 모습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난 배신자가 아니야! 처음부터 너희들 편인 적도 없었어!”
“다나우…! 어디 있어! 다나우!”
날카롭게 공기를 가른 소리가 귓청을 때리고 사라졌다.
성좌는 힘겹게 승지의 눈을 가리고 있다가 짝이 맞지 않은 기억이 사라지자 어쩔 수 없이 대화창을 치웠다.
그러나 비워진 대화창은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당혹스러워진 승지는 우선 성좌에게 물어보는 건 미루기로 했다.
당장 사태의 원흉이 유유히 떠 있었으니까. 승지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게임 초장부터 장난질이냐? 어디서 남의 기억으로 사기 치려고 들어?”
“무슨 소리실까? 언제나 각성자와 성좌는 한 쌍이었잖아? 체스판이 너흴 구분하지 못하고 기억을 가져왔을 뿐인걸.”
큐라가 시치미를 뗐다.
…그냥 다 부숴버릴까?
승지의 눈매가 더러워졌다. 아직 저번 던전에서 거대 스켈레톤을 잡은 필살기를 메모라이즈 해둔 상태였다.
원하기만 한다면 그때의 폭풍을 다시 불러낼 수도 있었다.
험상궂어지는 승지의 기세를 눈치챈 큐라가 살짝 달랬다.
“자자 진정해. 게임에서 이기고 싶다면 성좌에게 직접 기억에 대해서 물어보기만 하면 돼! 짝을 맞출 거 아냐?”
“개소리.”
승지의 말투가 사나워졌다. 원치 않는 상대방에게 과거를 캐물으라고? 그게 가장 ㅈ같다는 건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역시 마왕이란 족속들도 다 뇌구조가 돌아 버렸구만. 게임 셋이다. 끝났어, 이 새끼들아.”
다 박살내고 끝내려던 승지가 주먹을 쥔 순간, 지켜보던 클랩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만.”
뺨이 눌리도록 비스듬히 턱을 괴고 있던 클랩이 하얀 속눈썹을 들어올렸다.
“성좌 때문에 지금 게임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꿔줄게.”
“또 뭔 짓을 하려고.”
“너한테 유리한 거야.”
클랩이 짤막하게 말을 잘랐다.
“체스판이 너희 둘을 구분하지 못해서 불만이라면, 적어도 넌 구분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클랩이 팔걸이를 짚었다.
“수많은 성좌의 기억 속에서 단 하나의 진짜 성좌를 찾을 수 있다면 네가 이겼다고 해줄게.”
따라락. 체스판의 흑백 칸이 파도가 치듯 모두 뒤집히더니 새까맣게 변했다. 딱 한 칸, 마지막으로 희게 남겨둔 칸을 제외하고는.
바로 성좌가 들어갈 자리였다.
“할 거야?”
[ 두 사람의 기억 게임 규칙 변경! 승낙하시겠습니까? ]
[아니야… 승지야! 하지 마! 안 해도 돼! 난 괜찮아!]
성좌가 급하게 말렸다.
“내가 네 기억을 보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거냐?”
[아냐, 아니야…! 그저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어. 승지라면 괜찮아. 하지만, 나 때문에 안 해도 될 일을 해서 지는 건 싫어! 아아, 그래도…! 너무해! 정말 너무해!]
“…….”
성좌는 갑작스런 상황이 당황스러운지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승지는 정신없이 떴다가 사라지는 성좌의 대화창을 보며 문득 자신이 되살아났을 때가 떠올랐다.
꽤나 비슷하단 말이지. 정신 못 차리는 게.
어쨌든 성좌가 말하고 싶은 방식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방식에 빡이 쳤다는 건 확실하지 않나.
그 정도면 싸울 이유로 충분하다.
승지가 선언했다.
“한다.”
[ 새로운 게임을 시작합니다! ]
[승지야!]
다급하게 떴던 성좌의 대화창이 빨려들 듯이 사라졌다.
이번에는 정말 눈 한 번 깜박할 사이 체스판의 불이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 마지막 게임! ]
아까 보았던 로브를 입은 기억들이 칸마다 다시 솟아올랐다. 다만 이번에는 모두 64개라는 점이 달랐다.
로브에 가려진 64명의 모습이 동시에 승지를 바라보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섬뜩하구만.
승지는 천천히 가장자리를 걸으며 그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물론 자신은 성좌의 진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성좌가 어떤 녀석인지는 알고 있다.
바르게 서 있는 성좌의 기억들은 승지가 옆을 지나갈 때마다 움찔하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소곤거렸다.
기억에서 따온 모습이다 보니 성좌의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마왕이 새로 만든 대로 얌전히 서 있는 자세에서 바뀌질 않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손을 떨며 기다리는 것 말고는.
승지가 걸음을 멈췄다.
“반대역.”
“.....”
승지가 볼 수 있었던 건 자꾸만 감추려 드는 손뿐이었다.
평소엔 그렇게 귀찮게 굴면서 정작 중요할 땐 뭐가 그렇게 비밀이 많은지 소심하게 구는 녀석이 할 법한 행동이지.
승지가 손을 까딱였다.
“네 이름 부르기 쑥스럽다. 빨리 돌아와.”
"……!"
울컥한 성좌가 고개를 홱 들었다.
아무리 천 쪼가리로 가려놨어도 다른 놈들이랑 글쎄,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이게 바로 미운 정인가.
단번에 자신을 찾아낸 울컥한 성좌가 승지를 향해서 팔을 뻗기에 그는 포옹이라도 할 줄 알았다.
맨날 상태창으로 하던 짓이니까.
그런데 성좌는 승지에게 바짝 다가오더니,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또 만나.”
"뭐…."
퍼엉! 초록색 전광판이 터지며 빛 가루를 흩날렸다.
[ 게임~ 오버! 조커~~ 승리! ]
[(,,•﹏•,,)]
요란한 폭죽 속에서 다시 돌아온 성좌가 수줍게 대화창을 띄웠다.
분명히 평소에 보던 모습이지만 이상하게도 어색한 위화감이 감돌았다.
저 놈이 사람이었던 모습을 봐서 아직 적응이 안 되는 건가.
승지가 머쓱하게 턱을 눌렀다.
짝. 짝. 짝.
그때 클랩이 박수를 치며 어색함을 끊어놓았다.
"잘했어. 정말 찾을 줄은 몰랐네.”
“…끝난 겁니까?”
류의건이 믿지 못하고 되물었다. 클랩이 대답했다.
"그래. 약속대로 그 인간은 돌려보내고 내 창고에 들어가게 해줄게.”
짝짝. 클랩이 짧게 박수를 치자 쪼그라든 밤송이 같은 부하가 기어 나왔다.
"창고까지 길을 안내해줘."
"잠깐. 가기 전에 볼일 좀 보자.”
게임이 끝나서 바깥으로 나왔던 승지가 다시 체스판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힘껏 발로 내리찍었다.
콱! 콱! 콰직!
헬바티아 마왕의 던전이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형태는 체스판이다. 승지의 공격을 받은 체스판은 테두리가 박살나고 칸이 산산이 부서졌다.
클랩은 나무가 튀고 체스판이 쪼개지는 동안 무표정하게 그들을 지켜보았다.
[ 9콤보! ]
완전히 체스판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되고서야 승지가 부수는 걸 끝냈다.
"됐어, 이제 가자."
"…."
"이쪽으로 오십시오.”
쭈구렁 밤송이가 육중한 문을 밀어젖혔다. 성큼성큼 걸어 나간 승지를 따라 그의 일행도 나갈 수밖에 없었다.
쿠웅.
그들이 나간 문이 다시 닫힌 후.
클랩은 천천히 승지가 부숴놓은 체스판의 칸을 공중으로 띄웠다. 큐라가 얼른 날아갔다.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마왕님!"
"됐어.”
큐라가 울상을 짓는데도 클랩은 가만히 박살난 흰색 칸과 까만색 칸을 돌려보았다.
"시키는 대로 잘했어, 큐라."
놀랍게도 큐라가 수줍게 웃었다. 클랩은 한참동안 조각을 돌려보다가 뚝, 하고 중앙을 부러트렸다.
그러자 체스판이 가져갔던 기억을 다시 토해내며 떠올랐다.
기억의 모습으로 나타난 인간이 허공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다들, 미안해. 하지만 난 더는 못하겠어. 더는 싫어…!”
울먹이는 목소리가 멍멍하게 울리더니 기억과 함께 사라졌다.
클랩이 처음으로 매끈하던 미간에 주름을 그으며 찌푸렸다. 분명히 소녀였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변모했다.
“이번에는 계약자를 선택한 거니? 성좌신의 힘까지 빌려 가면서 또 도망가려고?”
클랩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결국 넌 예언대로 마왕이 될 거야.”
조심스레 지켜보던 큐라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다른 마왕님들도 그러할까요? 새로운 마왕님의 탄생을 기다리자고?"
"다른 마왕들이 무슨 생각인지 나랑 무슨 상관이야."
클랩이 다시 제 나이 대 어린애처럼 투덜거렸다.
"어쨌든 감시는 계속해. 쓸 만한 마왕이 되면 잡아먹을 거니까."
"뼈는 남겨주실 거죠?"
큐라가 애교스럽게 말하자 클랩이 응석을 부리듯 드레스 속으로 푹 파묻혔다.
"글쎄. 그건 저 건방진 빨간머리 꼬마가 어디까지 하느냐에 달렸지."
체스 판을 부술 때 빨간 머리는 자신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끝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약간 흥미가 당긴 클랩이 시선에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주술까지 섞어보았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성좌 녀석이 꽤나 아끼는 모양이지.
"흐아암."
클랩이 하품을 했다.
하지만 네가 정을 주면 줄수록 그 녀석은 망가지게 될 걸. 그녀석도 마찬가지지만.
저주를 삼킨 고양이처럼 클랩이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그게 네 운명이야. 광대 녀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