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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즐거운 나의 집 (5)

50인의 회의.

랭킹 50위 안에 드는 각성자가 참여하도록 되어있는 비정기적인 모임이었다.

정부의 지시가 있을 때마다 모이긴 하지만 정말 1위부터 50위까지 모두 모이는 건 아니었다.

던전에 들어가 있거나 피치 못할 미션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고, 같은 길드에 속해 있다면 보통 한 명만 참석했다.

“안녕하세요!”

“당신도 왔네?”

“길드장이 대신 가라지 뭐야, 귀찮게.”

각성자들이 서로 인사를 나눴다.

원래 50위 안에 들었던 랭커가 새로운 각성자에게 밀려나면, 정보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길드에 소속되었다.

때문에 이미 대부분의 랭커는 길드에 속해 있었다.

새로 만들어지는 길드는 랭커를 확보하기 어려우니 길드 연합에 드는 것으로 정보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했다.

승지와 싸웠던 커넥트 길드장 박편호는 특히 길드 연합의 권력을 즐기는 편이었다.

“길드장님, 안녕하십니까!”

“어험. 그래.”

박편호가 으스대며 인사를 받았다. 다른 랭커들도 적당히 눈인사를 보냈다.

“이번에는 웬일로 어둑시니 길드장이 모임 장소를 제공했군 그래. 매번 빠지기 일쑤더니.”

“본인이 소집했으니 그랬겠지. 언제 봐도 건물 전망 하난 끝내주는구만.”

성자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회의실은 긴 원형 탁자에 의자들이 차례로 늘어선 구조였다. 신식 건물에 어울리는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방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각성자들은 자연스럽게 랭킹 순으로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상석 두 자리가 비었다. 랭킹 1, 2위가 동시에 비어있는 걸 본 각성자들이 웅성거렸다.

“류의건은 아직 안 왔나?”

“그 사람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잖아. 성좌 특성 때문에.”

뒤따라 조용히 들어온 유청도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이런 자리엔 오고 싶지 않았지만 이세계 여행을 갔다 온 유월이 오랜만에 본 동생과 있고 싶다면서 대신 보냈다.

“유청 씨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네.”

유청은 최대한 짧게 인사했지만 상대방의 호기심은 비어있는 소매를 뚫어져라 향했다.

“정말 소문대로 팔을 안 고치셨네요?”

“네.”

“왜요? 천하의 청월량 길드가 이젠 포션 값도 다 떨어졌나?”

싱글벙글 웃는 저 얼굴에 정권을 먹여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유청은 끓는 속을 가라앉혔다.

“신경 끄시죠.”

“왜요? 궁금한데? 새로운 미션인가? 정보 공유 좀 해줘요.”

저 인간. 랭킹 47위였나.

유청보다 한참 아래였던 인간까지 저런 소리를 지껄여대는 걸 보니 정말 자신이 바닥을 치긴 쳤나보다.

유청이 경멸스럽게 내뱉었다.

“남이 고칠 수 없는 부분은 입 닥치고 있으란 말도 못 배웠습니까?”

“아, 오케이. 오케이. 알았어요.”

47위가 선선히 물러났다. 여전히 표정은 기분 나쁘게 빙글거렸다.

“오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덜컹! 뚜벅뚜벅.

앞문이 열리며 번태가 걸어 들어왔다. 웬일로 멀쩡한 등장이다.

“이야! 다들 이렇게 모여 줘서 반갑네!”

“반갑군요, 길드장.”

“오늘은 뭡니까? 또 알러트?”

“훨씬 중대한 사항이지!”

번태가 쭉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다들 착석했나? 서서 듣기엔 굴러 떨어질 만큼 충격적인 얘기라.”

“요란은.”

“벌써부터 밑밥 깔깁니까?”

랭커들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웬만한 미션과 던전을 다 겪어본 각성자들은 크게 놀라는 일도 없었고. 번태의 성격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더더욱 뜻밖이었다.

철컹!

의자에서 솟구친 쇠사슬이 살아있는 뱀처럼 각성자들의 몸을 묶었다.

“?!”

“뭐, 뭐야!”

벌떡 일어나려던 각성자들이 텅, 텅, 죄다 의자에 몸이 파묻혔다.

몇 몇은 힘으로 끊어보려고 하거나 스킬로 벗어나려고 해보았지만. 그들이 오기 전부터 미리 준비되어있던 마법을 피할 수는 없었다.

“자자 앉으라니까.”

“번태 길드장!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세뇌라도 당한 겁니까!”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마지막 말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열려 있던 문으로 승지가 걸어 들어왔던 것이다.

“캬. 확실히 마법이 좋긴 좋네. 공들인 만큼 역할을 하잖아.”

“우리 길드 마법사의 실력이 뛰어난 거라네!”

“어쨌든.”

태연하게 번태와 대화를 나누는 승지를 본 유청이 눈을 부릅떴다.

저 인간이 왜 또 여기서 나와?

“!”

놀란 건 유청만이 아니었다. 길드장 자격으로 와있던 박편호, 김정진, 이연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정확히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만큼의 충격을 받고 있었다.

“어… 어떻게…….”

“더헙…!”

승지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그들의 충격을 감상했다.

무서워 죽겠지? 개자식들아.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영문을 모른 채 쇠사슬을 비틀었다.

“버언태애!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당신은 누구고요?”

“아아! 인사가 늦었군. 이쪽은 채승지 군이라네. 마왕의 저주가 걸려있지.”

“예?”

물론 개 구라였다.

승지는 덤덤한 표정으로 신빙성을 더해 보였다. 얼이 빠진 사람들에게 번태가 설명했다.

“바로 마왕 글라세로를 소환하는 저주지.”

“농담 하지 마십쇼!”

“마왕 소환이라뇨!”

대화를 듣고 있던 유청은 혼자 얼떨떨해졌다.

글라세로는 이미 잡았잖아?

당황한 채 눈을 굴리던 유청은 번태와 승지가 모두 시치미를 떼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여기서 괜히 입을 놀렸다간 승지한테 죽도록 처맞기만 할 거라는 걸 직감한 유청이 바로 그들을 외면했다.

침묵이 금이다.

랭커들은 날뛰었다.

“당신 미쳤어!? 이거 당장 풀어! 어디서 개 잡소리야!”

“마왕이 나타난다는 건 진짜라네.”

“그걸 어떻게 믿어!?”

“거, 거짓말이 아니야!”

박편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바로 걸려드네. 저 머저리.

승지는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

자신이 부활하고 마왕을 사냥한 걸 비밀로 한 이득을 톡톡히 볼 생각이었다.

그것도 손 하나 까딱 안하고.

박편호가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저 인간한테 마왕의 저주가 걸려있다는 건 진짜야!”

전혀 뜬금없는 곳에서 튀어나온 변호에 각성자들의 반응이 싸늘해졌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우리가 먼저 발견했었어! 하지만 분명히 던전에서 죽었다고 했는데….”

“보시다시피 멀쩡하네.”

승지가 비꼬았다. 사태를 파악하면 할수록 박편호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벌, 벌써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저주가 얼마나 진행된 거지?! 맙소사. 지, 지금 당장 마왕이 소환될 지도 몰라!”

“그러니까 정말로 마왕의 저주가 있다는 말인가요?”

“그래요.”

이번에는 이연주까지 동의하는 소리를 냈다. 여전히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현실을 부정하는 것보다 그게 빠르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벌써 셋 이상이 마왕의 저주를 긍정했으니 사람들도 차츰 이게 진짜라고 믿기 시작했다.

“자 그럼 다들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한 거 같으니….”

피싯!

번태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가 손목을 비틀더니 승지를 향해 독침을 날렸다.

[꺄악! 승지야, 위험햇!]

승지를 향해 날아온 독침을 놀란 성좌가 덥석 삼켰다.

“!”

“아니?!”

모두가 놀라 숨을 들이켰다. 랭커의 빠른 상황 판단도 판단이지만, 승지도 힘 하나 안 쓰고 처리해버린 것이다.

“저런 건 처음 봐…!”

“아무리 묶여있는 상황이라지만…!”

승지는 여덟 번째 자리에 앉아 있는 각성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표창을 던진 놈이었다.

“뭐냐, 방금?”

“미안한데 난 죽기 싫거든? 진짜 마왕이 소환되는 거면 너나 죽어! 꺼져!”

“너 얼굴 기억했다.”

승지가 쯧 소리를 냈다. 기껏해야 고등학생밖에 안 된 각성자 놈이 벌써부터 사람한테 공격 질이냐.

번태가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자자. 다들 진정하시게.”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사람을 묶어두고 무슨 진정!”

“그게 애초부터 자네들이 잘못하지 않았다면 이 지경까진 안 왔겠지.”

“뭐?”

다른 랭커들은 어리둥절해졌지만 김정진은 뜨끔해선 고개를 떨궜다.

“우리가 뭘 잘못했다는 거죠?”

“정확히는 방금 전과 같은 태도라네.”

“무슨…?”

“사람 쉽게 죽이는 거.”

승지는 이제 아예 노골적으로 세 길드장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자연스레 다른 랭커들도 그들을 바라보았다.

뻔뻔스레 외치던 박편호와 이연주도 의혹이 가득 담긴 시선은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일을 먼저 알았다면 당연히 회의부터 소집해야 하지 않나요?”

“맞아.”

“방금 전은 미성년자가 한 짓이라지만… 설마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길드장님들도 그랬을 리가요?”

좋아, 잘 패네!

궁지에 몰린 박편호가 소리쳤다.

“하얀 길드장! 그것보다 먼저 저 인간 저주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게! 자네들 정말 여기서 개죽음 당할 생각인가!”

박편호의 발악에 이연주가 퍼뜩 눈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스킬은 발휘되지 못했다.

“미안합니다.”

“류? 윽?!”

뒤에서 나타난 류의건의 손에 이연주가 기절했다.

혹시라도 승지의 저주가 이미 풀렸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류의건!”

“당신까지!”

류의건은 매우 머쓱한 표정으로 기절한 이연주의 상체를 조심스레 눕혀주었다.

“승지 씨의 말은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얘기하던 것보다 류의건의 한 마디가 더 강력한지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좋아요. 마왕의 저주가 사실이라니 대비는 해야 되겠죠.”

“하지만 우리까지 이렇게 묶을 필요가 있습니까? 불쾌하군요!”

승지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회의가 아니라 거래를 하러 왔거든. 근데 대화하기도 전에 도망갈까 봐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거래?”

“내가 마왕을 잡아주는 대가로 받을 게 있거든.”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허!”

“어이가 없네.”

“뭘 잡아?”

오만한 눈빛들이 승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승지한텐 간지럽지도 않은 경멸이었다.

“마왕의 저주나 받고, 그걸 어쩌지도 못하는 사람이 마왕을 잡는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이미 잡았는데?

의심받을 때마다 폭소가 터져 나올 것 같아서 표정관리가 힘들었다.

번태는 이미 입술을 푸들거리고 있었지만 다행히 수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음, 상당히 못 믿는 것 같은데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걸 내가 보증하겠네. 랭킹 1위의 보증이면 꽤 쓸 만하잖나?”

“아무리 그래도…!”

“조만간 각성자 관리소에 등록만 되면 바로 랭킹 50위 안에는 들 친구야!”

“아니 그럼 아직까지 등록도 안 된 각성자가 마왕을 잡겠다고 나선 거야?!”

“노망났수?”

“미쳤군. 어디서 저런 인간을 데려와서는.”

고스란히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듣던 유청은 괜히 자기가 수치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다들 닥쳐. 젠장.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거 완전 괴물이라고.

“…정말 만약에 저 사람이 마왕을 잡는다고 칩시다.”

“우리한테 뭘 바라는 거지?”

바로 이걸 위해서 랭커들을 모아놓은 승지가 똑똑히 밝혔다.

“조건은 간단해. 앞으로 나한테 간섭하지 말 것. 남한테 내 얘기를 떠들고 다니거나 괜히 연합이니 길드니 뭐니 하자고 집적거리지 말라고.”

서로 신경 끄고 갈 길 가자고.

몇 번 겪어볼수록 이 연합이니 회의라는 게 아주 귀찮기 짝이 없었다.

승지가 기껏해야 돈이나 무기를 뜯어낼 줄 알았던 랭커들이 웅성거렸다.

“별로 어려운 조건은 아닌데….”

“안 어려워? 내가 지목하는 인간한테 무슨 짓을 하든 뭐라고 못한다는 뜻인데?”

그제야 뭘 요구하는지 알아차린 랭커들이 조용해졌다. 류의건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려보았다.

“승지 씨.”

“이건 양보 못한다.”

승지는 단호했다. 유청 때 한 번 방해받은 걸로도 충분했다.

“자네 지금 치외법권이라도 만들어달라는 건가?”

“정확해.”

“그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우린 각성자지 정치인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법과 상관없는 각성자 문제에 있어선 너희들만 입 다물면 괜찮다는 뜻이잖아.”

“…….”

승지는 그들을 쭉 훑어보았다.

“난 니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 알기도 귀찮고 믿지도 못하겠거든? 길드장이란 놈들이 사람 하나 희생시키는 꼴 아주 잘 봤어. 다른 놈들도 비슷하고.”

류의건은 참담한 표정으로 승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몇 번이나 그의 말에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냥 건드리지 마라. 그럼 나도 너희들을 놔둘 테니까.”

승지가 말을 마치자 빙긋빙긋 웃고 있던 번태가 넙죽 덧붙였다.

“참고로 이 거래는 자네들이 동의하면 류의건 선생이 상호의 믿음 스킬을 걸 예정이라네. 그 맹세는 깰 수 없다는 거 다들 알고 있겠지?”

상호의 믿음은 계약을 어기면 상대방의 스킬과 스탯을 모두 빼앗고 페널티를 추가로 부여하는 강력한 신성 스킬이었다.

결국 승지와 번태는 류의건까지 이 일에 협력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거래 성립?”

“…정말 우리가 간섭하지만 않으면 마왕을 잡을 수 있단 말이지?”

“엉.”

“나, 내 안전은…!”

“물론 날 먼저 건드린 놈들은 예외고.”

뭐라고 외치려던 박편호가 그 말에 희망을 잃어버렸다. 김정진은 작게 앓는 소리를 냈을 뿐. 기절한 이연주와 비슷한 반응을 보냈다.

번태가 신이 나서 외쳤다.

“자! 동의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게!”

하나, 둘. 차츰 랭커들의 손이 올라갔다.

그동안 류의건은 조심스레 이연주를 깨웠고, 설득을 들은 그도 마지못해 손을 들어 올렸다.

모두의 손이 올라간 순간 류의건이 말했다.

“그럼 상호의 믿음 사용하겠습니다.”

파아앗!

푸른빛이 방안에 원형으로 퍼져나가더니, 계약에 동의한 사람들의 몸을 한 번씩 통과하여 지나갔다.

유일하게 류의건보다 스탯이 높은 번태에겐 빛이 통과하지 못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승지에게 호의적이었으니 굳이 계약을 걸 필요는 없었다.

번태가 호탕하게 웃었다.

“계약 성립이군!”

철컹철컹.

드디어 랭커들의 의자에서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 랭커들은 불쾌한 듯 옷을 탁탁 털거나 어깨를 풀었다.

쉽구만, 쉬워.

만족한 승지가 그대로 나가려고 하자 개중에 한 명이 놀라 붙잡았다.

“잠깐! 어딜 가는가! 그래서 이제 마왕의 저주는 어떻게 하면 좋지?”

“대책 회의를 해야 할 거 아닌가!”

“아 그거? 이미 잡았어. 다들 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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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라면 99콤보까지 - 광대라면 99콤보까지-1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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