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뒤풀이
치이익.
달궈진 불판 위로 삼겹살이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기름이 고이더니 불꽃 위로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다들 군침을 흘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냄새는 오지네.
여전히 승지는 삐딱함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승지 씨! 고기 드세요!”
“여기 쌈장 있어요! 소스도요!”
“상추 쌈 싸드릴까요?”
미스핏 길드원들이 너무 속이 빤히 보이도록 잘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생전 처음 보는 인간들이 노예를 자처하며 눈이 반짝반짝한 채로 고기를 갖다 바쳤다.
일회용 접시에 가득 쌓이는 고기만큼 승지의 심정은 착잡해져갔다.
글라세로의 저주가 대체 얼마나 심각하길래 이것들이 이렇게 나와. 대련에서 졌으면 이미 끝난 얘기지.
질척거리며 자기 실험체 좀 되어달라는 미스핏 길드원들의 구애의 고기짓을 이연주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미인이면 뭐하냐. 저 표정만 보면 식욕이 떨어진다고.
승지가 애써 그쪽을 외면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하루를 굶은 상태였다.
자글자글하게 올라온 기름이 바삭하게 튀겨진 껍질과 노릇하게 올라온 속살이 시각을 자극하고,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저대로 집어서 마늘이 섞인 쌈장에다 한 번 푹 찍어다 그냥 먹기만 해도…!
꼬르륵.
배에서 요동을 친다.
참아보려고 하던 승지가 뱃속의 요구에 굴복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먹고 보자.
나중에 먹어놓고 딴 소리한다는 욕은 못 하겠지.
염치고 뭐고 일단 승지가 젓가락을 집어 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고기가 내밀어졌다.
[맛있겠다!]
성좌도 인정한 고기의 때깔을 승지가 마구 흡입했다.
입 안에 넣자마자 쫄깃하게 씹히는 육질이며 풋풋한 야채와 기름진 쌈장이 조화롭게 퍼져나가는 맛과 향이 기가 막혔다.
시발, 이건 먹어야 해.
“맛있죠?”
“잘 드시네요!”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는 승지를 본 미스핏 길드원들이 굽는 대로 잘라주었다.
누가 고기를 구워주고 먹기만 하는 건 또 처음이라 승지가 열심히 먹었다.
“천천히 드세요.”
누가 안 뺏어먹습니다, 라는 뒷말을 생략한 류의건이 물을 따라주었다. 그는 아예 먹을 생각조차 없는지 젓가락 껍질도 안 깠다.
승지가 깻잎쌈을 우적거렸다.
사실 수북하게 쌓인 접시 위의 고기는 승지뿐만 아니라 바로 옆의 류의건을 의식한 것이기도 했다.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류의건만 보면 얼굴 근육이 풀어져서 잘해주려고 안달을 냈으니.
잘난 인간이 성격까지 착하니 뭔들 안 해주고 싶을까.
목적이 있어서 잘해주는 자신하고 목적이 없어도 잘해주려는 류의건이 새삼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느껴졌다.
그래도 고기엔 죄가 없지. 맛있군.
[나도 먹어보고 싶어! 으아아 신은 왜 이곳으로 올 때 육체까지 주지 않으신 거야~!]
내가 먹는 거나 많이 봐라.
일부러 더 야무지게 먹던 승지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승지 씨! 고생하셨습니다. 제 잔 한 잔 받으시죠!”
어느새 소주병을 들고 나타난 최자림이 천연덕스럽게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입안에 잔뜩 고기를 우겨넣고 있던 승지가 고개를 저었다.
“난 술 안 마셔.”
“에엥? 정말요? 뜻밖인데요.”
“왜. 생긴 거만 보면 존나 퍼먹게 생겨서?”
“오. 생긴 것과 달리 객관적이시군요.”
승지의 표정이 구겨지자 최자림이 캭캭 웃었다.
“그럼 콜라라도 드실래요? 뭐든 말씀만 하세요.”
“먹는 걸로는 안 넘어간다.”
승지가 뚝 상추를 꺾었다. 최자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승지 앞에서 양손으로 꽃받침을 만들었다.
“…입맛 떨어지니까 머리 좀 치우지?”
“미인계 쓰는 중인데요?”
“킇거.”
괴랄한 소리를 내며 뿜어낸 승지를 보며 최자림이 턱을 이리저리 돌렸다.
“이상하다. 토할 정도는 아닌데.”
“……제가 최자림 각성자님 대신에 사과드리겠습니다.”
고기를 굽던 명구가 차마 듣기 힘든 발언에 눈을 질끈 감았다.
“왜애? 혹시 승지 씨 취향이 어떤가 해서 해봤죠. 여자들한텐 제가 또 잘 먹히거든요. 그리고 우리 명구한테도.”
“저도 싫어요!!!”
최자림이 온몸으로 거부하는 명구의 어깨를 강제로 끌어안았다. 그래봤자 비전투 계열이라 꼼짝도 못 했지만.
어쩌다 최자림을 만나가지고. 불쌍한 놈.
명구의 명복을 빌어준 승지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댁 같은 각성자를 데리고 있느라 길드도 겁나 고생하겠구만.”
“으응? 누가요? 우리 길드장님이요?”
“그래.”
지금도 미스핏 길드장들은 열심히 사과를 해대며 고기를 대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 승지 씨도 은근히 순진하시네. 저만큼 길드장님 뜻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뭔 소리야? 그럼 이 개판을 처음부터 계획했다고?”
“물론 그건 아니지만! 전투 계열 각성자가 적은 우리 길드가 목소리를 높이려면 정공법보단 화려한 게 좋잖아요?”
최자림이 쌈장에 푹 찍은 오이를 씹었다.
“제가 시선을 끌면 그때 중요한 일은 길드장님들이 처리해주시는 거죠. 글라세로의 저주 문제 때문에 우리는 승지 씨를 살려두고 싶었거든요. 다른 길드장님들이 그렇게 빨리 행동할 줄은 몰랐지만.”
“아…! 그래서 그렇게 요란하게 승지 씨를 납치해온 거군요! 승지 씨를 목격한 사람이 많을수록 관심이 쏠릴 테니 간단하게 처리해 버릴 수가 없었겠죠.”
“그렇죠! 역시 류의건 씨! 바로 알아차려 주시네요!”
최자림이 신나서 떠들었다.
아니, 그렇게 계획적으로 날 데려간 거라고?
잠시 확성기와 도로 위의 추격전을 회상해본 승지는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그냥 제멋대로 행동한 다음에 끼워맞추는 거 아냐?
승지의 의심어린 눈초리에도 최자림은 천연덕스럽게 인벤토리를 열었다.
“아 그리고 이건 깜박하고 두고 가신 물건이에요.”
최자림이 꺼낸 건 방에 뒀던 마무자의 항아리였다. 물건을 건네받은 승지가 대꾸했다.
“이건 일부러 놓고 간 거야. 처음부터 돌아올 생각이었다고.”
“엥, 정말요? 다들 승지 씨가 토낀 거라고 생각해서 제가 잡으러 간 거였는데.”
“애초에 도망갈 놈이 여길 왜 기어들어와?!”
“아!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촤하핫!”
승지의 항의를 가볍게 인정한 최자림이 웃어대자 승지는 포기했다.
말도 알아먹을 놈한테나 하지.
승지가 인벤토리에 항아리를 쑤셔넣는 사이 류의건이 진지하게 되물었다.
“하지만 몹시 위험한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실질적으로 위험에 빠진 건 승지 씨 였으니까요.”
“뭐 저도 생각보다 분위기가 살벌해서 쪼끔 놀랐지 뭡니까. 그래도 원활한 마무리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목이 다 쉰 거 보면 느껴지시죠?”
“웃기지 마라.”
“이런! 제 크나큰 뜻을 몰라주시다니 서운하네요! 역시 저를 알아줄 분들은 우리 길드장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걸까요!”
“…말이 저렇다는 거고 실제로 길드장님들이 홧병 치르는 일이 더 많으니 알아서 감안해주세요.”
반쯤 목이 졸린 명구가 덧붙였다.
“이 녀석, 서운할 소리 할래! 어쨌든 승지 씨가 열심히 실력을 보여주시는 동안 길드장님이 다른 랭커에게도 연락을 모두 넣었답니다.”
“랭커 누구누구?”
“그야 당연히 1위부터 100위까지 시간 되는 사람은 싹 다 아니겠어요? 다행히 2위인 류의건 씨는 벌써 여기 계시고, 랭킹 1위도 흔쾌히 응답해주셨답니다.”
“…그렇군요.”
류의건이 복잡한 표정으로 잔을 내려다보았다. 최자림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각성자들이 모이면 아마 두 팀으로 나뉘게 될 거예요. 현실에서 마왕 잡을 준비를 하는 대기조, 던전에서 시간을 끄는 호위조.”
“난 당연히 호위조겠네.”
승지의 말에 최자림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야 물론이죠. 의건 씨는 당연히 대기조로 오시겠죠? 의건 씨 성좌가 마왕 사냥 전문가라면서요!”
“아뇨. 이번에는 저도 호위조로 가겠습니다.”
“네?”
“아니, 왜요?”
류의건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지난 번 토벌전 때도 보스 몬스터가 저를 추격해오는 바람에 불필요한 위험이 생겼습니다. 이번 마왕 사냥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 변수는 줄일수록 좋겠지요.”
“세상에… 그럼 의건 씨는 정말 다른 던전으로 피신해 있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승지는 왠지 의건이 호위조로 가려는 이유가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 뒤로도 한참을 떠드는 최자림을 고기가 떨어졌다는 말로 내쫓은 승지가 간신히 조용해진 틈에 슬쩍 물었다.
“보스 몹이 댁을 쫓아온다는 거 말인데.”
“예?”
“당신이 아니라 성좌를 쫓아오는 거지?”
“…그렇습니다.”
류의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가 이세계에 가서 깽판치고 돌아온 것도 아닐 텐데 뭐하러 괴물들이 쫓아다니겠나.
“당신 성좌가 이미 마왕을 죽이고 다닐 정도로 센데 여기까지 집요하게 쫓아다닐 만큼 다른 세계 괴물들이 악독한 거야?”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류의건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같은 마왕의 이름을 갖고 있더라도 힘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왕을 죽임으로써 오히려 다른 마왕들의 분노를 사게 되는 경우도 있죠.”
“그게 바로 당신 경우고?”
“…….”
“대체 이세계엔 마왕이란 놈들이 얼마나 많은 거야?”
[모두 99명의 마왕이 있어!]
“제가 알기로는 제 성좌가 죽인 마왕이 사냥당한 72번째 마왕이라고 했습니다.”
워어, 많이도 죽였네.
그럼 성좌가 말한 마왕의 숫자에서 72를 빼더라도 아직 27명이나 마왕이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젠장, 이런 생고생을 최소한 27번은 더 해야 이세계가 복구된다는 뜻이냐?
심지어 성좌는 라면 엎은 데 노트북을 던지듯 한 술 더 떴다.
[마왕 글라세로가 저주를 걸었던 곳이 묘지라는 걸 잊으면 안 돼! 글라세로는 죽었다가 부활한 마왕이라구!]
미친. 부활까지 하냐고.
까마득한 미래에 승지가 이마를 눌렀다. 그냥 마왕이란 놈들을 보이는 대로 족치는 수밖에 없겠구만, 이거.
“아무튼 내 성좌 같은 허접한 놈들 말고 영웅들도 떼거지로 넘어왔는데 그까짓 마왕 다 못 잡겠습니까?”
“…모두가 노력한다면 반드시 승리를 이뤄낼 수 있을 겁니다.”
류의건이 판에 박힌 듯한 정의로운 대사를 내뱉었다. 남이 말했으면 진부할 텐데 얼굴 잘난 놈이 말하니까 설득력이 생기는구만.
아무튼 류의건의 말대로라면 그도 괜히 능력 있는 성좌 때문에 버거운 싸움을 이어가야만 하는 모양이다.
이유는 정반대지만 성좌 때문에 고생하는 처지가 매우 동질감이 느껴지는군.
승지가 간만에 딱한 마음이 들어 류의건을 위로했다.
“뭐 당신이라면 잘하겠지. 그랬으니까 랭킹 2위까지 간 거 아니겠어.”
승지의 말에 류의건은 미미한 미소를 그리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얘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게다가 이미 승지의 관심은 삼겹살에서 갈비로 넘어간 불판으로 돌아간 뒤였다.
그냥 고기와는 차원이 다른 양념 굽는 냄새가 승지의 콧구멍을 자극한 것이다.
“뭐야! 언제 갈비를 사왔어!?”
“후훗, 인벤토리에 넣어왔지요.”
“돼지고기 굽고 나서 소고기를 꺼내다니 치사하다!”
“승지 씨 건 따로 빼놨어요!”
“더 드세요!”
어느새 미스핏 길드원과 완벽히 동화된 승지가 고기를 처먹는 걸 보며 류의건도 천천히 젓가락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