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기다린 자 (3)
허허벌판에선 도망치기 쉬웠다. 걸리적거리는 게 없어서 달리기만 자신 있다면 끝도 없이 피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쫓아오기도 좋았다.
“우왁! 저 괴물 새끼!”
새가 귀엽게 팔락팔락 날갯짓하는 거랑 차원이 다른 파공음이 울렸다.
쑤우웅!
높이 솟아오른 심판자는 독수리나 매처럼 날개를 활짝 펼치고 매섭게 하강했다.
광대의 영역을 사용한 승지도 인간답지 않은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건만. 같은 속도라면 날아오는 쪽이 더 살벌하긴 하지?
“승지 님…!”
인벤토리에 들어간 땋은 머리와 곱슬머리가 어쩔 줄 모르고 울먹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죄송해요, 설마 심판자까지 데려올 줄 몰랐어요!”
“심판자는 손속이 가혹하기로 유명해요…! 그냥 저흴 버리고 도망치세요!”
“정신 사나우니까 조용히 해봐!”
승지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그는 지금 프레임 컨트롤을 자신이 아니라 심판자의 스킬에 쓰느라 바빴다.
심판자는 갑자기 멈췄다가 이리저리 왜곡되는 푸른빛을 보며 묵묵히 공격을 계속하기만 했다. 승지가 무언가 기술을 쓰고 있다는 건 짐작했어도 곧 지치리라 판단한 것이다.
…정확하네. 빌어먹을.
계속 이렇게 달릴 수는 없다. 지금도 이미 허파가 터질 듯이 아파왔다. 거의 관성으로 달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저걸 어떻게 쫓아 보내지?
역시 류의건이 어떻게 되든 말든 저 성좌를 죽여 버려야 하나?
승지가 힐긋 돌아보았다. 날아오는 심판자는 기괴하긴 했지만 여전히 사람이라고 판단할 부분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저 놈을 인간이 아니라고 해버리면 내 성좌는 도대체 뭐가 되냐고.
승지는 바람이 더 이상 땀을 식혀주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너무 멀리까지 왔다. 호흡이 꽉 막힌 덩어리가 되어 갈비뼈를 압박해댔다.
자신이 꼭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40km를 뛰었다는 어떤 얼간이가 된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까먹고 있던 지성이 욕을 퍼부었다.
멍청아, 그건 얼간이가 아니었어. 그 놈을 따서 올림픽 경기도 만들어졌다고.
어떤 일은 가끔 고귀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명예에는 관심이 없어! 젠장, 누가 미래의 일을 위해서 뛸 거 같으냐!
“다 지금! 내가 살려고 하는 짓이지!”
승지가 치솟는 피로 자글자글 타는 다리를 멈췄다. 승지가 멈춘 바람에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날아오던 심판자는 검 대신 직접 목을 부러트리려는 듯 검은 손아귀를 밑으로 뻗었다.
승지가 기합을 내질렀다.
“으아아아!”
[ 기 모으기 발동! ]
[승지야! 결국!]
결국 죽여 버리려는 건가 싶어서 성좌가 눈을 질끈 감았다. 붉은 기운이 피어오른 승지가 다가오는 심판자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 메모라이즈 발동! 저장된 콤보형 스킬을 발동 대기 상태로 전환합니다! ]
승지의 공격은 심판자를 향했으나 목표는 성좌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목표는 저 놈의 스킬이다!
뭐든 제거할 수 있다면 이런 것도 가능하겠지!
[ 필살기 발동! : 성좌 연동형 (웃고 있는 광대 1)
목표를 바꿀 수 없습니다. 대상의 제거를 실행합니다. ]
무언가 감지했는지 심판자가 손끝을 움찔했지만 이미 프레임으로 자신을 가속한 승지의 일격이 그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너도 뛰어와 봐, 이 새끼야!”
콰앙!
승지의 주먹이 심판자에 닿은 순간 푸른빛이 폭발했다.
“!”
섬광을 본 승지와 심판자가 동시에 눈을 가렸다. 지금까지 있었던 필살기는 모두 프레임이 한 순간 정지하고 완벽한 콤보가 발동하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과정마저 생략해버리고 단 한 점에 시간이 집중되었다.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 능력이기에.
심판자에게서 빨려나온 푸른빛이 아흔아홉 번 진동하고는 터져버렸다.
콰앙!
엄청난 굉음이 두 사람을 밀어냈다. 그나마 땅에 가까웠던 승지는 바닥에 처박히는 것으로 끝났지만, 허공에 떠있던 심판자는 몰아치는 바람에 점점 거대한 몸과 날개가 뒤로 밀려나더니 대포처럼 튕겨 나가고 말았다.
“커헉…!”
크게 숨을 토해낸 승지가 억지로 눈을 부릅떴다. 쫓아왔던 것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날아가는 심판자의 모습이 보였다.
“하. 저것 좀 봐라.”
승지가 실낱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로 걸어와야 되겠네.
순식간에 끈 떨어진 연처럼 멀어지는 심판자를 본 승지가 킥킥거렸다. 대자로 뻗은 승지를 보며 성좌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승지야! 승지야아!! 정말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한 거야!]
“맙소사!”
“저, 정말로 신의 심판자를…! 날려버렸어요!”
“아.”
땋은 머리와 곱슬머리가 마구 찬양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드레날린이 꺼지자 어마어마한 피로가 몰아닥쳤다.
당분간은 못 쫓아오겠지.
승지는 일단 좀 쉬기로 했다. 아직도 헐떡거리는 숨을 뱉으며 승지가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 * *
그 시각.
토벌전을 진행하고 있던 류의건도 이상을 알아차렸다. 은은하게 그를 강화하고 있던 성좌의 가호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상태창을 열어본 류의건은 당황하고 말았다.
스킬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모든 스킬이 아니라 성좌와 계약할 때 받았던 스킬만이 사라져있었다. 나머지 스탯이나 성좌 연결도는 그대로였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같이 싸우던 랭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류의건이 갑자기 멈춰서있으니 이상할 만도 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류의건이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다시 싸움에 참전했다. 어차피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미션으로 받은 스킬들이 있었기에 싸울 수 없을 정도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등골은 서늘해졌다.
주변에 사람이 있을 때 함부로 사용할 수 없을 뿐, 성좌의 스킬은 자신이 가진 어떤 능력보다도 막강했다.
설마 영구적으로 사라져버렸다면.
류의건이 불안감을 억누르며 싸웠다. 불안의 실체는 스킬의 실종보다 이것이 또 다른 성좌의 시험이 아닐까하는 두려움이었다.
이 난관을 헤쳐나가지 못하면 또 페널티를 받겠지.
그가 죽은 눈으로 몬스터의 허리를 갈랐다. 성좌는 대체 언제쯤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을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다른 랭커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류의건의 성좌 연결도는 거의 바닥을 달렸다. 그런데도 랭킹 2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이 쏠릴 것이다.
류의건은 그걸 원치 않았다. 그는 그저 페널티만 없앨 수 있으면 족했다.
지금까지 만난 페널티 스킬 각성자들은 모두 류의건보다 약했기에 도저히 그의 페널티를 감당할 수 없다고 손사래 쳤다.
하지만 유일하게 자신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문득 그가 생각했다.
유월 씨가 무사히 승지 씨를 만났을까?
* * *
차갑고 부드러운 게 볼에 닿았다.
“으음….”
“일어나셨어요?”
땋은 머리가 바로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찡그리던 승지는 자신의 머리가 땋은 머리의 무릎에 올라갔다는 걸 깨닫고는 화드득 일어났다.
[꺗~ 승지 잘 잤어?]
“뭐, 뭐야.”
“심판자가 사라지고 나서 승지님의 성좌님이 내보내 주셨어요!”
땋은 머리가 여전히 무릎베개 자세를 한 채로 말했다. 어쩔 수 없이 귀가 붉어진 승지가 허둥지둥 일어났다.
[(•⚗৺⚗•)히힛 부끄러?]
젠장, 복장이 아직도 이 모양이잖아.
아까 심판자에게서 도망칠 때 변했던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리스 영웅의 복장도 승지에겐 그저 낯 뜨거운 차림새일 뿐이었다.
빠르게 광대의 영역을 해제한 승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심판자는, 너네 다 무사하냐?”
“네! 지켜주신 덕분에 멀쩡해요! 정말 감사드려요!”
“게다가 좋은 소식도 있어요.”
곱슬머리가 간질간질한 입을 양손으로 눌렀다.
“승지님이 달려온 덕분에 마무자님의 신전도 바로 뒤에서 찾아냈답니다!”
“뭐?”
승지가 고개를 뒤로 꺾었다. 어쩐지 지금까지 시원하더라니, 거대한 검은 신전이 그들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허허벌판에서 만난 다나우의 신전도 낯설기는 했지만, 마무자의 신전만큼 위화감을 가져다주진 않았다.
“끝내준다….”
흠집하나 없이 매끈한 검은 석벽은 그 자체로 예술품이었다. 장인들이 백 년을 달라붙어도 만들기 힘든 건축물이 외따로 서 있으니 정말로 이상하게 보였다.
“야, 근데 난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달려왔는데 왜 신전이 여기 있는 거냐? 너네 정말 제대로 안내한 거 맞아?”
“아뇨, 위대한 드래곤의 말씀대로예요!”
“엿새 동안 길을 찾으면 열리리라.”
땋은 머리가 생긋 웃었다.
“많이 돌아갈 필요가 있었나 봐요.”
“흐음. 어쨌든 찾아서 다행이네.”
“네 맞아요! 이제 함께 들어가요!”
“승지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렸어요!”
꼭 여행 온 것처럼 눈을 빛내며 두 사람이 승지의 팔을 잡아당겼다. 따라 일어난 승지가 천천히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마무자의 신전은 내부도 새까맸다. 창문도 없어 마냥 어두울 줄 알았는데 지하 전시실처럼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다.
신전으로 들어오자 땋은 머리와 곱슬머리도 제법 경건해저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걸었다.
“저기예요. 저희의 목표…!”
[우와!]
성좌가 탄성을 내질렀다. 신전의 제일 안쪽에 거대한 천체가 있었던 것이다.
지구본처럼 위아래를 금으로 고정시켜놓은 천체는 은하수를 그대로 굳혀놓은 듯 점점이 별빛이 반짝였다.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물건이다.
기이한 빛으로 번쩍거리는 천체를 본 승지가 조심스럽게 발을 떼었다.
그런데 앞이 아니라 뒤쪽으로 발이 움직였다.
“……?”
도망치는 듯한 기분에 승지가 아예 멈춰 섰다. 생각이랑 몸이 따로 놀았다.
“뭐지. 못 다가가겠어.”
“앗, 승지님은 아직 준비가 안 되신 거예요!”
땋은 머리가 이해한다는 듯이 웃었다.
“이 앞은 마무자님의 보물, 그분의 성체가 있는 곳이니까요.
“괜찮아요, 승지님. 저도 못 들어간답니다! 아가씨처럼 선택받은 분만 가실 수 있는 곳이에요.”
곱슬머리가 열심히 설명했지만 승지는 보다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있었다.
이거 지능이 더 높은 몬스터를 만났을 때랑 비슷한데?
마무자도 마왕이다. 저 별을 보고 성체 어쩌고 했으니 지금 보이는 천체가 마왕의 일부일 가능성이 충분했다.
글라세로 때도 유청 놈 등에 업혀서 접근하지 않았으면 다가갈 수 없었으니 지금 또 이런대도 납득은 가네.
다음엔 진짜 지능 찍어야지, 나 참.
“그럼 혼자 가야 되는 거냐?”
“네.”
땋은 머리가 갑자기 승지의 손을 양손으로 꼭 잡았다. 손을 빼내려던 승지는 그가 기도하는 것 같아 그냥 내버려두었다.
땋은 머리가 잡은 손을 이마에 눌렀다.
“여기까지 데려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승지님이 아니었더라면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돈 받고 한 일에 칭찬이 과하다.”
땋은 머리가 싱긋 웃었다. 승지가 쑥스러워서 하는 말인 걸 다 안다는 표정이었다.
“위대한 드래곤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길.”
스르륵 손을 놓은 땋은 머리가 천체로 다가갔다. 승지와 곱슬머리는 반짝이는 빛을 받으며 그가 다가가는 걸 지켜보았다.
“그 정화인지 뭔지가 끝나면 다시 드래곤한테 돌아가야겠네.”
“저절로 그리 되실 거예요.”
곱슬머리가 황홀한 눈으로 말했다. 땋은 머리는 조심스럽게 천체 앞에 무릎을 꿇더니 쏟아지는 빛을 향해 양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살점만 남겨둔 채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