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은밀하게 시끄럽게 (3)
“꼭대기는 청월량 길드라고 쳐도 건물주는 제정신이냐? 어떻게 다른 업종이 하나도 없어.”
체력 단련에 평생을 헌신해온 부자가 제발 후학을 양성해달라며 전 재산을 바치지 않는 이상 나올 수 없는 건물이었다.
“유청 놈 집안에 대머리 유전자가 흐르는 게 분명하다. 절벽에서 아들을 떨어트릴 집안이야.”
[으응? 유청은 머리숱 많았는데?]
“늙으면 양쪽으로 갈라질 거다.”
승지는 좀 더 낮은 건물로 뛰어내렸다. 옥상에 걸려있던 빨랫줄에서 모자 하나를 빌려간 승지가 머리에 꾹 눌러썼다.
무술 빌딩의 불은 여전히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밤에도 운동하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낮에 들어가나 밤에 가나 별 차이도 없겠군.”
[설마 직접 들어가려고?!]
“기왕 숨기 좋은 상황이잖아.”
어차피 자신의 얼굴을 아는 건 유청 하나뿐이다.
능력만 숨기면 완전히 일반인처럼 보이는 자신을 의심할 자는 없다.
조용히 바닥으로 착지한 승지는 평범한 행인처럼 빌딩으로 들어갔다.
환하게 밝혀진 빌딩 내부는 접수원마저도 떡대 덩치였다.
“거기 누구십니까?”
“도장 등록하러 왔는데요.”
“여긴 외부인은 받지 않습니다. 나가주세요.”
“그래요?”
승지가 깊이 눌러쓴 모자로 짧게 안쪽을 훑었다. 전면 유리창으로 된 양쪽 복도에 도복을 입고 수련하는 인간들로 가득했다.
가운데에는 거대한 계단이 있었는데 그쪽으로 올라가야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구조였다.
청월량 길드는 가장 꼭대기 층.
그 밑으로는 다 한가닥씩 하는 주먹들이라 이거지.
“손님. 나가주셔야 겠는데요.”
승지가 제자리에서 움직이질 않자 접수대에 앉아있던 덩치가 슬슬 다가왔다.
“빨리 나가주십시오.”
“청월량 길드로 가려면 몇 층을 눌러야 됩니까?”
“…당신 누구야.”
승지가 씩 웃더니 그대로 승룡권을 날렸다.
“소류겐!!!”
“커억!”
[ 1콤보! ]
한순간에 턱을 맞고 날아간 덩치가 쿵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때까지 기합소리로 시끄럽던 1층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든 수행을 멈춘 인간들이 유리창 너머로 승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승지야!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페널티 걱정은 하지 마.”
승지가 가볍게 손을 털었다. 스탯이 없었을 때도 길드장 하나 정도는 가뿐했던 몸이다.
스탯까지 얻은 지금은 과연 누가 막아낼 수 있을까?
승지가 손바닥을 까딱였다.
“모두 원콤에 끝내줄게.”
“잡아!”
쿠웅! 거칠게 문이 열린 도장에서 사람이 쏟아져 나오는 동시에 승지가 계단을 뛰어올랐다.
“잡아라!”
“어떤 새끼가!”
우르르 몰려나온 수련생들은 조폭만큼이나 험악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우와아악!! 어떡해! 다 몰려나왔잖아!]
개중에는 각성자도 섞여 있었는지 인간에겐 불가능한 높이로 뛰어오른 자들도 있었다.
“하아압!”
“돌개바람!”
“니들은 각성자구나?”
승지가 계단 너머로 올라온 수련생의 다리를 걷어찼다.
정면으로 날아오는 동작을 보고 피하려던 수련생은 이상하게 느려진 반응속도에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모르면 맞아야지.”
“크학!”
[ 1콤보! ]
[ 2콤보! ]
따닥! 연달아 두 명을 쓰러트린 승지가 재빨리 물러났다.
[승지야! 콤보 콤보! 절대 쌓이면 안 돼!]
“알고 있어!”
승지가 계단이라는 장소를 택한 덕분에 그 많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한꺼번에 덤벼들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간혹 난간을 타고 올라온 수련생들도 있었지만, 승지의 동체 시력은 양각을 허용하지 않았다.
[ 3콤보! ]
승지가 재빨리 물러났다. 대부분의 놈들은 한 방에 쓰러졌지만 강한 놈들도 3콤보 안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사범님!”
“젠장…! 치고 빠지기만 하다니!”
“틀림없이 각성자야! 이상한 스킬을 쓰고 있잖아!”
타악!
빠르게 정상을 차지한 승지가 승강기 버튼을 쾅 때렸다.
곧 버튼이 눌린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하나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승지가 단순히 소란을 피운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수련생들의 안색이 변했다.
“막아!”
“놈이 노리는 건 위층이다!”
“절대로 못 올라가게 해!”
“길드 구경 좀 하자는데 너무들 하네.”
승지가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벗어났다. 우르르 몰려온 놈들을 따로따로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 1콤보! ]
[ 1콤보! ]
[ 1콤보! ]
자유자재로 난간을 타고 올라간 승지는 손바닥만한 벽에도 쉽게 매달렸다.
층이 다른 공격범위에 수련생들이 주춤한 사이 승지는 손쉽게 덤벼드는 수련생들을 하나씩 쓰러트렸다.
[굉장해! 맞아! 승지 정도 되는 각성자가 일반인을 상대로 질 리가 없지!]
“상대에 다른 각성자도 포함해라!”
혀를 차며 승지가 체격 차가 두 배쯤 되는 수련생을 날려 보냈다.
퍽! 쿠우웅!
승지가 흘끗 내려오는 층수를 곁눈질했다.
3층… 2층… 1층.
때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잽싸게 올라타려던 승지가 바닥을 박찼다.
“어이쿠!”
위험해라.
엘리베이터 안은 다른 층에서 지원을 나온 수련생들로 꽉 차있었다.
“저기다!”
급해서 목검을 그대로 들고 온 수련생도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인벤을 열어 무기를 꺼낸 각성자들도 있었다.
분위기 살벌하고 죽이네.
공중으로 뛰어오른 승지는 머리카락이 빠져나오지 않도록 더욱 모자를 단단히 썼다.
“잡아라!”
벽을 박차고 오른 승지가 허공답보를 이용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복층 구조였던 2층에서도 수련생들이 승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빠악!
[ 1콤보! ]
“크아악!”
[ 2콤보! ]
“젠장!”
[ 3콤보! ]
빠각!
가볍게 프레임 컨트롤을 써가며 하나 씩 쓰러트린 승지가 숨을 내쉬었다.
기왕 유청의 본거지에 들어왔으니 좀 더 소란을 피워볼까.
수련생들 사이로 파고들며 승지가 크게 폐를 부풀렸다.
“녀석이 위층으로 가고 있다! 알러트의 수하였어!”
“!”
“알러트가!”
“감히…!”
“유청 님께 알려!”
“길드장님!”
분기탱천한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목청들도 좋으셔라. 그들의 분노한 목소리에 건물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였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는 당연히 목소리의 주인보다는 내용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충분히 어그로를 끈 승지가 훌쩍 그 틈을 빠져나갔다.
“저기 있다!”
“이 자식!”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나머지 알러트도 다 데리고 들어올 테니까.”
승지의 도발에 귀신같이 표정이 변한 수련생들이 몰려왔다.
“네 이놈!!”
“살아서는 못 돌아갈 줄 알아라!”
수련생들이 자신을 똑똑히 볼 때까지 기다린 승지가 미리 봐뒀던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정확하게 위로 솟구친 순간 기다리고 있던 성좌의 인벤토리가 승지를 삼켰다.
[타이밍 완벽했지!]
“자알했어!”
몸을 은신한 승지가 창틀에 매달렸다.
뒤늦게 우르르 창문 쪽으로 몰려나온 수련생들이 시뻘개진 눈으로 사방을 훑었다.
“사라졌어!”
“방심하지 마라! 위쪽으로 올라갔을 거야!”
“경계를 늦추지 마라!”
그들이 희번덕거리며 주변을 뒤지는 동안 승지는 나직하게 휘파람까지 불어가며 기다렸다.
“야, 내가 인벤토리에 있는데 움직여서 쟤네들이랑 부딪칠 수도 있냐?”
[응! 각성자는 언제나 지금 있는 세상이랑 연결되어 있으니까!]
쳇. 이대로 관심 빠지면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볼까 했더니.
승지는 몸을 다시 창틀 위로 끌어올렸다.
“그냥 창문 바깥쪽으로 들어가는 게 빠르겠다.”
[그리고 승지야! 우리가 던전에서 존재 증명치를 많이 벌어두긴 했지만 인벤토리에 사람을 넣는 건 엄청난 속도로 존중치가 줄어들어버려!]
“인벤에 숨는 건 오래 못 쓴다고?”
[응응!]
“자주 안 쓸게.”
[승지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짜내볼 테니까 너무 무리하지만 말아줘!]
승지는 벽면에 아주 좁게 나있는 틈을 밟았다. 일단 밟기만 하면 광대의 균형이 완벽하게 그를 외벽에 붙여주었으니까.
“하, 그럼 소란도 다 피웠으니 6층 등반 시작해볼까.”
[꺄아 파이팅!]
승지는 거미처럼 소리 없이 건물을 타고 올라갔다. 그동안 창문 너머로 우왕좌왕하는 수련생들과 각성자들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쯧. 없는 놈 찾느라 고생 좀 해봐라.
유유자적하게 벽을 올라간 승지의 미간이 굳었다. 청월량 길드가 있는 층에 다다르면 그대로 바깥에서 창을 깨고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막혀 있잖아!”
투웅.
승지가 철판으로 가로막힌 부분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정찰하고 왔는지 성좌가 보고했다.
[다른 벽면들도 마찬가지야!]
겉은 강화유리였지만 안에서 막아뒀는지 빈틈없이 철판으로 덧대어져 있었다.
이대로 부숴버려?
시간은 걸리겠지만 콤보가 쌓이면 못 부술 것도 없었다. 승지가 찡그린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젠장, 번화가라서 유리창을 깨버릴 수도 없고.
빌딩 밑은 늦은 시간에도 여전히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다들 술 처먹지 말고 빨랑빨랑 집에 들어가야 할 거 아냐.
승지가 표정을 구겼다.
“이렇게 된 이상 조용할 때 다시 와서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야하나?”
[그치만~ 아까 보니까 엘리베이터 안엔 5라는 숫자까지밖에 없었는걸!]
“뭐야? 6층부터는 운행을 안 한다고?”
[응! 아마 길드로 들어가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할 거 같아! 아까 올라오면서 봤는데 5층은 아예 계단도 없이 한 층이 통째로 비어 있었어!]
시야 하나는 끝내주는 성좌의 말이니 안 믿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수상해지네. 아예 출입도 막아놓고 뭘 키우는 거야? 마약?”
[에이 설마!]
“설마가 사람 잡지.”
승지는 창틀을 꽉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삐이이끼이이이!
인벤토리에서 나온 승지가 벽면을 타고 내려가자 유리에 스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바깥이다!”
“아직 바깥에 있었어!”
“내려간다, 잡아!”
어차피 더 미련이 없던 승지는 그들이 쫓아오든 말든 신경도 안 썼다.
“오늘 탐색은 여기까지다.”
[그런데 아까 알러트 이름은 왜 얘기한 거야? 그냥 시선 집중용?]
“유청 새끼 똥줄 좀 타보라고.”
그렇게 싫어하는 알러트가 자기 길드 현관까지 들락거리는 걸 알면 속 좀 뒤집어질 거다.
타악.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승지가 떠들썩한 빌딩을 돌아보았다.
더 난리치고, 더 빡쳐 해라.
“내가 살살 말려 죽여주마!”
[와아아~! o(*'▽'*)/☆゚’]
당당한 외침을 남기고 승지가 잽싸게 튀었다.
“어디냐!”
“젠장, 놓쳤어!”
수련생들은 건물 밖까지 몰려나왔지만 결국 끝까지 승지를 찾을 수 없었다.
* * *
“승지 씨.”
“커어어…….”
“승지 씨!”
“……커으!”
번쩍 눈을 뜬 승지가 반사적으로 팔을 치켜들었다.
승지를 들여다보고 있던 오조희가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하마터면 그를 때릴 뻔한 승지가 서둘러 잠기운을 몰아냈다.
“아 미안. 잠이 덜 깨서.”
“어제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다행히 오조희는 이해심 많은 표정으로 웃었다.
“센터에서 주무실 때 뭐 불편한 건 없으셨어요?”
“없었어. 난방도 잘 되고.”
승지가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어제 난리를 쳤더니 뒤지게 피곤했다.
“넌 이제 출근한 거냐?”
“네. 참! 승지 씨 주려고 선물 가져왔어요.”
오조희가 부스럭거리며 가방을 뒤졌다.
꼬맹이 때도 선물 받은 적 없는데.
승지는 약간 기대했다.
“짜안! 뿅망치에요!”
[푸하하하하!]
“…고맙네.”
성좌가 배 터져라 웃는 동안 승지가 떨떠름하게 뿅망치를 받았다. 오조희가 흐뭇하게 웃었다.
“저번 토벌전에서도 손에서 떼어놓질 않으셨잖아요.”
“그래. 내가 그랬지.”
[하, 역시 승지의 운명은 알아서 뿅망치가 도착하는 수준이구나! 어울려!]
장난하냐.
승지가 푸시식 바람이 빠지는 뿅망치를 손으로 눌렀다.
그나마 저번 뿅망치보다는 큼지막해서 때릴 맛은 있겠다.
“승지 씨 문제는 제가 길드 통해서 안전한 던전 열쇠를 잠깐 대여하려고 해요. 그때 같이 가보면 각성자란 것도 확인이 되겠죠?”
“알았어.”
승지가 고개를 까딱였다. 오조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못 보던 거네. 이 모자는 뭐예요?”
“아. 그거.”
깜박했다. 어제 쓰고 안 돌려줬네.
승지가 뭐라고 둘러댈지 고민하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쿵쿵쿵 하고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러더니 문이 쾅 열렸다.
“오조희 선생님! 빨리 나와 보세요!”
“무슨 일이에요?”
“알러트가 나타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