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돌리고 돌았냐? (2)
한 때 자신이 헤집어놓았던 빌딩의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가려니 기분이 묘했다.
기시감 쩐다.
입구에 앉아있는 문지기까지 그대로였다. 다만 유 씨 집안 애들과 함께 들어가니 인사하려고 일어났다는 점만 달랐다.
그의 눈이 커졌다.
“류의건 각성자님?”
아, 틀렸네. 조폭식 인사를 하려는 게 아니었잖아. 하긴 맨날 보는 랭커보단 처음 보는 랭커가 더 신기하겠지.
혹시나 침입했을 때의 자신을 알아볼까 했던 승지는 아예 안중에도 없는 걸 보고 허탈해졌다.
“혹시 위쪽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류의건 씨라면 신성 마법으로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정말 별 일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유월이 깔끔하게 잘라냈다. 문지기가 어쩔 수 없이 물러나다가 문득 승지를 발견하고는 눈썹을 들어올렸다. 어라? 하는 눈치다.
[에헴! 우리 승지 뒷모습이 좀 특별하긴 하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어~.]
넌 또 뭐라냐.
괜히 쓸데없는 소리가 나오기 전에 승지 일행이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그렇게 비밀이라더니 여기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대충 다 아는 것 같습니다만.”
“알게 될 수밖에 없었죠. 저희에겐 가족 같은 분들이에요.”
유월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지나치게 가까워서 문제였지만.”
드디어 내부에서도 바깥에서도 침입할 수 없었던 청월량 길드의 문이 열렸다.
다른 층처럼 깔끔한 인테리어나 도장이 있을 줄 알았더니, 뜻밖에도 진한 풀냄새와 함께 탁 트인 초원이 나타났다.
들판?
자박.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정말로 풀이 밟혔다. 인공 잔디가 아니잖아. 승지가 놀라 둘러보았다.
모든 벽을 트고 숲과 초원을 그대로 구현해놓았다. 천장에 줄을 이은 조명은 원래 창문이었던 곳을 다 막아놓았는데도 낮처럼 환하게 만들어주었다.
[우와우와! 세상에! 던전이 아닌데도 이런 공간을 만들어낼 수가 있는 거야?]
그러게? 돈이 엄청나게 들었겠는데?
유월은 승지가 이곳에 적응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말했다.
“량아.”
바스락. 멀리서 무언가 움직였다.
그렇게 크게 부른 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들은 거지?
그리고 이름이 량이라면…?
승지는 얼핏 상황을 깨달아갔다.
“아까도 말했지만 절대….”
“알았어. 알았다고.”
승지가 또 당부하려는 유청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정작 풀숲에서 인영이 하나 튀어나오자 반사적으로 흠칫할 뻔했다.
그만큼 끔찍한 생명체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털북숭이 인형 탈을 절반만 뒤집어 쓴 다음 속과 겉을 뒤집어버리면 저것과 비슷해 보일 것이다.
[우욱…! 맙소사!]
성좌가 참지 못하고 대화창을 토해냈다. 그만큼 끔찍한 모습이었다.
몸의 절반이 다른 동물과 뒤섞여있었다. 붉은 갈기가 잘못 튀어나온 혈관처럼 얼굴과 팔을 가로질렀고, 팔딱거리며 뛰는 심장과 위장이 잘못된 위치에서 꿈틀거렸다.
신이 있다면 무언가 단단히 잘못 건드린 게 분명했다.
[말도 안 돼…. 저렇게 어린애한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유청은 누군가 한 명이라도 구역질을 한다면 당장 붙잡아서 끌고나갈 준비를 하듯 승지와 류의건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러나 안색이 조금 어두워진 것 말고는 승지와 류의건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놀라긴 했겠지만.
유청은 도망가지 않고 살짝 쳐다보는 유량을 보고서야 비로소 긴장을 약간 풀었다.
유월은 유량이 놀라지 않도록 계속 무표정을 유지했다.
“량아 이리 온.”
“…….”
보다 못한 유청이 유월을 말렸다.
“됐어, 그만 해. 보여줬으면 됐잖아.”
“량이는 짐승이 아니야. 난 인사시킬 거야.”
“유월!”
둘의 목소리가 커지자 갑자기 승지가 무릎을 숙이고 앉았다.
“이름이 량이야?”
“……네.”
유월이 느리게 답했다. 승지는 흠하고 쪼그려 앉은 무릎위로 양 손을 펼쳐 보였다.
“손님이 와서 놀랐겠네. 사탕이라도 가져올 걸.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때 사탕이라는 말에 반응하듯 유량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귀가 좋군.
“사탕 대신 나랑 놀까?”
“…….”
한 쪽만 비대칭적으로 큰 눈이 반짝이더니 드디어 유량이 달려왔다.
“…!”
놀란 유월과 유청이 동시에 승지를 바라보았다. 덩달아 놀란 성좌가 중얼거렸다.
[…승지는 애들을 꼬실 때가 더 능숙하게 작업하는 거 같아.]
이놈 자식. 성좌라고 못하는 말이 없어.
가까이 다가온 유량의 모습은 더욱 끔찍했지만, 승지가 별 말 없이 손만 내밀고 있자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만져보았다.
“…느으?”
유량은 제대로 말을 못했다. 그륵거리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대충 듣는 시늉을 하며 승지가 고개를 숙여주었다.
“어, 봐라. 빨간 색이네. 너도 나랑 똑같잖아?”
마치 매우 엄청나게 놀라운 사실을 이제야 발견했다는 듯 승지가 말했다. 그가 겁도 없이 유량의 팔에 난 붉은 털을 만졌다. 유청이 기겁했지만, 유량은 까르륵 웃었다.
비로소 정신이 든 유월이 따라 소개했다.
“량아. 이쪽은 승지 씨야. 채승지 씨.”
유량은 듣는 둥 마는 둥 킁킁거리며 승지의 머리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승지는 아예 실컷 맡으라고 살짝 그를 들어 안아주었다.
음, 상상 이상으로 무겁네. 힘 스탯 안 찍었으면 못 들었겠다.
유청은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
“어… 떻게…….”
“알바 할 때마다 보는 게 애들이다.”
유량 정도면 껌이지.
승지가 오만 진상을 다 상대해본 경험으로 넘겼다. 물론 전부 잘 대처했다는 건 아니었다. 고객이랑 대놓고 싸우다가 잘린 알바도 꽤 있었으니까.
“얘 정도면 얌전한 거야.”
승지가 진심으로 말했다.
유월도 놀람과 안도가 잔뜩 뒤섞인 얼굴이었다. 조금은, 점수 땄을지도 모르겠다.
이 와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나쁜 놈인가.
승지가 그대로 유량을 안은 채 바닥에 앉았다.
“자 이제 인사도 나눴으니 설명 좀 들어볼까.”
“……량이가 처음부터 이런 모습이었던 건 아니에요.”
유월이 목이 멘 채로 설명했다.
“저희 남매가 1차 각성 때 한꺼번에 각성한 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도장으로만 가득한 미친 빌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유 씨 삼남매의 집안은 원래 무투 쪽에서 유명하고 뼈대 있는 집안이란다.
종목별로 국제 대표 선수를 양성하는 건 물론, 체육계 쪽에서도 인맥이 넓어 운동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못 듣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고.
“원래 무술을 수련하고 있던 저와 청이와 달리 량이는 아직 어린 동생일 뿐이었습니다. 원래라면 절대로 같이 싸우지 않겠지만 량이의 성좌가 아주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바로 몬스터를 길들이는 능력입니다.”
유청이 침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각성 초기는 이제 막 미션을 받고 스탯을 올렸던 시기입니다. 당연히 잘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죠. 그런데 우리 셋 중에 량이가 제일 강했다고 하면 믿어지십니까?”
“저도… 기억납니다.”
류의건이 문득 입을 열었다.
“몬스터 테이머, 유량. 열두 살의 나이로 크로아티아 국제 미션에 참가해서 성과를 올렸었죠.”
“맞습니다.”
“량이에게는 미션이 그저 놀이고 장난이었어요. 걱정하던 부모님을 안심시킬 만큼 뛰어났죠.”
“하지만 어린애가 갖기엔 지나치게 강한 능력이었습니다.”
유청이 분노에 가득 찬 어투로 말했다.
“지나치게 강했기에 알러트가 량이를 노리게 된 겁니다. 고작 아홉 살에 각성한 아이니 얼마나 쉬워보였겠습니까.”
“물론 알러트라는 조직이 알려질 때쯤엔 저도 청이도 량이를 지킬 만큼은 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러트는 정말 생각지도 못할 때 나타났어요.”
유월과 유청은 끔찍했던 과거를 다시 떠올렸다.
아직도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2년 전, 처음으로 2차 각성자가 발생했을 때의 일이다. 유 씨 집안에서 무술을 배우던 제자들 중에서도 많은 2차 각성자가 나왔다.
당연히 삼남매는 가족처럼 함께 지낸 제자들의 각성을 축하하고, 성장을 도우려 함께 던전에 들어갔었다.
그 날은 청월량 길드가 처음으로 많은 길드원을 받는 순간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던전에 갑작스레 나타난 마왕 때문에 순식간에 첫 사냥은 무간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수많은 던전을 소유한 마왕은 보통 자신의 거점에서만 머물렀다. 다른 던전으로 이동하기엔 던전의 규모나 힘이 마왕을 감당하기엔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연과 악운이 겹친 까닭일까.
하필 유 씨 일가와 제자들이 들어간 던전에서 마왕이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나이는 어리나 1차 각성자인 삼남매는 바로 다른 제자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마왕의 존재는 압도적이었지만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 망할 알러트 개새끼만 아니었다면!”
“량이도 듣잖아.”
유청이 힘겹게 욕을 삼켰다. 저 놈이 저렇게 쌍 욕하는 건 처음 봤다. 유청이 화를 삭이는 동안 유월이 말을 이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량이는 자신이 하던 대로 몬스터를 불러내어 사람들이 피할 시간을 벌려고 했죠. 그리고 그 때 알러트의 보스가 나타나 량이의 성좌를 빼앗았습니다.”
“빼앗았다고?”
“훔쳐간 거죠.”
유청의 눈이 이글거렸다.
“알러트의 보스는 성좌를 훔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니까.”
[!!!]
성좌와 승지가 잠시 경악했다.
[승지야 그 때…!]
둘은 동시에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 비각성자인데 보스를 통해 각성했다던 알러트의 쫄따구 백정민!
[맙소사…! 그럼 그 사람이 각성한 것도 다른 사람에게서 뺏어온 성좌를 받았기 때문이란 뜻이잖아! 어떻게 성좌신이 보고 계신 세계에서 그런 일이!]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엄청난 일이었다.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강한 성좌를 빼앗아다가 자기 부하를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성자 한 명, 한 명이 재해급 무기로 취급받는 이 시대에는 더욱 위험한 능력이다. 그들이 강한 이유는 오로지 성좌와 계약했기 때문이니까.
류의건도 자세한 얘기는 이번에 처음 듣는지 놀란 표정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유량이 보이지 않게 된 겁니까? 성좌를 빼앗겼기 때문에…?”
“네, 그래요.”
유청은 눈앞에 알러트가 있다면 갈아 마실 기세였다.
“우연이 아니었을 겁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처음부터 량이를 노리고 마왕을 그 던전으로 불러낸 게 분명해요.”
“어떻게 확신하는 거야?”
“던전에 같이 들어온 제자들 중에서 알러트가 섞여있었어요.”
유월이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루 이틀 같이 지낸 사람이 아니었어요. 적어도 일 년, 어쩌면 그 이상. 저희와 같이 지내다가 준비가 되자 던전으로 함께 들어간 거죠.”
“……그 때 이후로 다시는 새로운 제자를 받지 않습니다. 누구도 이 빌딩에 들이지 않습니다.”
유청이 중얼거렸다.
숨어있던 알러트의 배신은 처음으로 몬스터가 아니라 인간에게서 느낀 위협이었다.
강해진 각성자들이 대부분의 미션을 제압할 수 있게 되고, 2차 각성자까지 나타나던 시기라 미래가 밝아보이던 순간에 터진 위협의 신호탄이었다.
이 싸움은 모두의 예상보다 길어지게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