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던전에서 던전으로 (1)
“아, 오셨네요!”
이화예 길드장이 승지를 보고 반가워했다.
“이쪽이 승지 씨와 함께 던전에 머물 호위팀입니다.”
“반갑습니다. 정준호입니다.”
“미스핏 길드 고어 전문 담당 사라설이에요.”
근육 떡대인 정준호와 어깨가 가냘파 보이는 사라설이 번갈아 인사했다.
“유청 씨와 류의건씨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번에 호위 팀으로 들어오셨어요.”
“그래. 들었어.”
“승지 씨 좋은 아침입니다.”
류의건이 사교적으로 웃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때깔이 좋아 보이는 낯짝이다.
“인원이 생각보다 적은데?”
“전략과 호위팀 말고도 계속 나타나는 메인 미션을 처리할 분들도 필요해서요.”
“그리고 저도 간답니다.”
누군가 뒤에서 와락 재킷을 걸쳐주었다. 승지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연주.”
“이건 저번에 찢어버린 옷 대신이에요.”
이연주가 가져온 기능성 재킷은 가볍고 신축성이 좋았다. 무난하게 스포티하다.
[딱 맞네!]
상의 사이즈가 크게 틀릴 일은 없지만, 너무 정확하니 소름 돋는군.
후루룩 이연주를 털어버린 승지가 옷에 팔을 꿰어 넣었다. 이연주는 마냥 만족한 얼굴로 감상했다.
“그럼 던전 팀은 총 여섯 명인가.”
랭킹 상위권인 류의건과 유청이 있는 만큼 많은 호위가 필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길 봐. 류의건이랑 유청이야.”
“굉장하다….”
“마왕을 담당하는 팀인가?”
“멋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선망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류의건은 저번 고블린 토벌전에서 썼던 칼을 짚고 있었는데, 땅에서부터 똑바로 세워도 명치까지 닿을 만큼 희고 거대한 대검이었다.
검도 그냥 흰색이 아니고 자체적으로 은은하게 빛이 뿜어져 나오듯 환하고 품위가 있었다.
반면 유청은 도포 같은 한복에 소매를 묶어놓고 까만 장갑을 꼈는데, 꼿꼿한 자세에서 풍기는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여기서 머리를 빨갛게 물들이고 재킷 하나만 덜렁 걸친 내가 제일 없어 보인다니.
승지는 괜히 아까 받았던 무기를 다시 꺼냈다. 그나마 붉은 검신이 제법 자신과 어울려 그럴싸한 분위기를 풍겼다.
“저 사람은 누구지?”
“다른 곳에서 불러온 용병인가? 한국 랭킹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외국인?”
“아냐, 아까 한국말 하는 거 들었어.”
“랭커들이랑 있는 걸 보면 저 사람도 대단한 실력자인가 봐.”
음, 좋아. 일단 겉으로 보기엔 안 꿇려.
유청이 잠깐 한심한 표정으로 보긴 했지만, 승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아니야! 다들 보는 눈이 없어! 우리 승지한테는 뿅망치가 제일 잘 어울리는 걸! 무기는 앙증맞고 깜찍하게! 하지만 본인은 날카롭고 멋있게! 바로 이 차이가 좋은 거란 말이야! 승지야! 검 집어넣고 뿅망치 사러가자!]
이러는 성좌보단 참을 만하지.
승지는 성좌가 계속 쨍알거리는 걸 무시했다. 여럿의 목숨이 달린 중요한 미션이니 페널티를 감수하고서라도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나보다 심각하게 높은 페널티를 봤더니 솔직히 현실감이 떨어져서 말이야.
류의건의 머리에 달린 페널티 수치는 변함없이 삼십만 대를 찍고 있었다.
승지가 열쇠장이의 고리를 꺼냈다.
“그럼 더 기다릴 거 없지?”
“네. 마왕 담당팀은 조금 늦으시는 분도 계셔서 회의부터 시작할 거지만 여러분은 바로 출발하면 돼요.”
승지가 가진 열쇠장이의 고리가 워낙 희귀한 물건이다 보니 주변 시선을 고려해 던전 진입은 실내에서 이뤄지기로 했다.
미스핏 길드에서 가장 접근이 어려운 청와각 회의실에 모인 여섯 사람이 동그랗게 섰다.
“잊지 마세요. 적당한 던전을 찾을 때까지 하루마다 이동하고, 식량이 떨어지기 전에는 돌아오셔야 해요.”
“알고 있습니다. 장기전에 적합한 지형이 나올 때까지 간 후, 정착이 어려우면 다시 돌아와 반복합니다.”
유청의 말에 사라설이 뒤를 이어 설명했다.
“식량은 한 달 분이에요. 만약 최선의 경우라면 던전과 현실 시간의 차이를 삼일까지 줄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게까지 시간이 달라?”
“최대치로 계산했을 경우예요. 같은 던전에서 오래 머무르는 만큼 현실과의 시간이 점점 더 차이가 나게 되거든요.”
“최악의 경우 2주밖에 시간을 못 번다는 뜻이군.”
“처음부터 잭팟이라면 바로 3일 찍겠죠. 그 정도면 남은 사람들이 마왕을 잡고도 남을 걸요.”
저마다 다른 감상에도 이화예는 걱정을 숨기지 못했다.
“부디 다들 조심하세요. 다른 던전이라고 해서 글라세로보다 약하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안심하세요. 여기 있는 사람들 정도면 어떤 던전이든 충분히 버틸 수 있습니다.”
믿음직스럽게 손을 잡아주는 류의건 덕분에 이화예는 약간이나마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준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 발로 마왕 앞에 나서야 하는 승지는 묵묵히 고리를 꺼냈다.
“그럼 출발한다.”
삐걱. 고리가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껍질이 파라락 펼쳐지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가루가 날리는 껍질은 겹겹이 쌓이더니 마치 꽃이 피는 것처럼 입구를 활짝 열었다.
만지면 곧장 부서질 것 같은 던전 입구에서 농밀하고 진한 향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승지가 코를 씰룩거렸다.
“이게 무슨 냄새야?”
“…빨리 들어가요!”
이연주의 재촉에 그들이 서둘러 던전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물 위에 뜬 유막처럼 무지갯빛 광채가 던전 안을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었다.
늪지대처럼 곳곳에 웅덩이가 고여 있는 던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듯한 색채로 번득였다.
“읍.”
“마스크 쓰세요.”
류의건이 급하게 마스크를 입에다 갖다 대었다. 빨판처럼 달라붙은 검은 마스크가 귀까지 안전하게 감쌌다.
순식간에 냄새가 사라졌다.
그러면서도 숨은 평소처럼 쉬어지는 게 신기했다. 돌아보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마스크를 급히 착용하고 있었다.
“어딘지 아는 거야?”
“첫 던전부터 골치 아픈 곳이 걸렸네요.”
이연주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냄새며 색이며, 모두 나르키아의 던전이 확실해요. 사람 뇌수 뽑아먹는 걸 좋아하는 마왕이죠.”
“그엑.”
승지가 질색을 했다.
“하필 뇌수라니. 역겹게.”
다른 사람들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라설 씨와 승지 씨는 절대 떨어지지 마시구요,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세요. 마왕 닮아서 몬스터들도 다 예민하니까요.”
설마 두 번이나 건들겠냐.
승지는 잔뜩 긴장한 사라설을 잠깐 바라보았다. 같이 묶어서 보호 대상이 되긴 했지만 그나마 싸울 줄 아는 자신이나 이연주와 달리 사라설은 완전히 비전투 각성자였다.
승지가 무심코 그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섰다. 같은 보호대상이라도 자기랑 급이 다르니까.
던전 안에서 유청은 주로 정찰을 맡았고 정준호는 뒤쪽에서 그들이 있는 흔적을 지웠다.
나르키아의 던전은 가만히 있는 것보다 이동하는 편이 던전이 존재를 알아차리는 게 느리다고 했다.
“소리도 내지 말아야 해?”
“아뇨. 차라리 마주친 다음엔 소리를 지르는 편이 나아요.”
어째서, 하고 묻기도 전에 작은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키득키득.”
방울이 울리는 것처럼 작고 귀여운 웃음소리였다.
앞서가던 유청이 우뚝 멈춰 섰다.
“사라설 씨 보호하세요.”
쿠구궁. 이연주가 재빨리 보호 스킬을 사라설에게 썼다. 승지와 싸웠을 때처럼 책이 완전히 사라설을 감쌌다.
“채승지 당신은 본인도 전력이라고 했으니 눈으로 직접 보시죠.”
“그래, 존나게 바라던 바다.”
승지가 투덜거리는 동안 웃음소리는 점점 더 넓게 퍼졌다.
던전 곳곳에 버섯처럼 생긴 석순이 있었는데, 거기에 뚫린 구멍에서 푸르스름한 무언가가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귀엽게 생겼잖아?
흔히 말하는 요정처럼 생긴 작고 푸른 생명체가 파르르 날개를 떨며 날아올랐다.
눈은 물방울 모양으로 길었고 더듬이가 달렸는데 하나같이 작고 깜찍했다.
[무서워…….]
저게? 손바닥 보다 작은데?
성좌가 겁을 먹은 걸 보니 느낌이 좋진 않았다.
“키득키득.”
“꺄르르.”
게다가 슬슬 숫자가 많아지니 부담스러워졌다. 푸른 요정들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날아올라 저마다 편한 자리에 팔을 포갰다. 언뜻 감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꺼림칙했다.
“왜 안 잡아?”
“요정들의 둥지를 먼저 찾고 있는 겁니다.”
류의건이 대신 설명했다.
“둥지에 있는 여왕 요정이 깨어나기 전에 먼저 처리해야 다른 요정들을 상대하기 쉽거든요.”
유청은 요정이 나왔던 석순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있었다. 류의건도 잠시 검을 집어넣더니 근처에 있는 요정 석순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나도 해야 하나?
승지도 따라서 손을 뻗으려고 하자 정준호가 황급히 말렸다.
“안됩니다! 혹시라도 여왕 요정을 만졌을 때 미인이 아니면 바로 깨어나 버리거든요.”
아니, 뭐 이딴?
갑자기 미인이 아니라는 소리로 뚜드려 맞은 승지의 눈매가 더러워졌다.
“장난 하냐?”
“아, 절대 승지 씨가 못났다는 뜻이 아니고… 요정들 취향이 있어서요.”
“저도 요정의 간택은 못 받았으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연주가 어깨를 토닥거렸다. 누가 봐도 이연주는 미인이었기에 승지의 분노가 가라앉았다. 이연주가 슬픈 시늉을 하며 덧붙였다.
“요정들이 우아하고 분위기 있는 쪽을 좋아하거든요. 우리처럼 날카로운 타입은 싫은가 봐요.”
“몬스터 주제에 취향 한번 더럽게 까다롭네.”
“아하하….”
“찾았습니다.”
유청이 조심스럽게 구멍에서 손을 꺼냈다. 그러자 다른 것보다 훨씬 크고 보랏빛인 요정이 손바닥 위에 잠들어있는 게 보였다.
새근거리며 잠든 요정은 유청의 손가락을 베개처럼 끌어안고 있었다. 간간히 기분 좋은 듯이 손가락에 머리를 비볐다.
사람과 꼭 닮은 모습만 아니었으면 귀여웠을지도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보고 있을수록 어딘가 섬뜩했다.
유청이 천천히 여왕 요정을 감싸 쥐는 동안 류의건이 긴장한 얼굴로 다시 검을 꺼냈다.
“전투 준비 하세요.”
홀로 동요 없는 표정으로 유청이 주먹에 힘을 주었다.
빠득.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여왕 요정이 눈을 번쩍 떴다.
“캬아아아악!”
귀청이 쩌렁쩌렁해지는 비명과 함께 푸른 점액이 튀었다.
“옵니다!”
류의건이 제일 먼저 검격을 날렸다.
“캬아악!”
“크아아!”
“끼아아아!”
여왕의 죽음에 돌변한 요정들이 사방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흉측하게 변한 요정의 입에서 송곳니가 튀어나오고 손톱이 뾰족해졌다.
[승지야! 조심해!]
메뚜기 떼처럼 달려드는 요정들은 순식간에 시야를 푸르게 만들었다.
대비하고 있던 승지가 팔을 휘둘렀다.
[ 1콤보! ]
후웅. 갈라지는 느낌도 없이 잘려나간 요정의 몸에서 반짝이 가루가 퍽 튀었다.
“윽, 뭐야?”
“가루가 눈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이미 몇 개 들어갔다고!
눈앞이 빙글 돌더니 던전에 가득 찼던 무지갯빛 환영이 두 개로 겹쳐서 보이기 시작했다.
“젠장!”
[승지야 울어야 해! 요정 가루는 눈물로 씻을 수 있어!]
성좌가 급하게 상태창을 띄웠지만. 이 와중에 울 틈이 어디 있냐.
일단 요정들부터 처리해야 했다. 승지가 반 장님인 상태로 검을 휘둘렀다.
[ 2콤보! ]
[ 3콤보! ]
훙. 후웅. 바람을 가를 때마다 요정이 터져나갔다. 그저 귀여웠던 요정들이 죽을 때 흩날리는 가루 때문에 훨씬 기이해 보였다.
“캬아아!”
“앗, 따거! 긁지 마!”
그 와중에 달라붙은 요정들이 마구잡이로 승지의 피부를 꼬집으며 매달렸다.
[ 7콤보! ]
[ 8콤보! ]
요정들을 팍팍 떼어낼 때마다 콤보가 쭉쭉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