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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너른 들판으로 (2)

쾅! 콰광!

흡사 대포알처럼 밑창을 부수고 올라온 승지가 펼쳐놓은 돛대에 얻어맞고 다시 갑판으로 떨어졌다.

[꺄악! 승지야! 괜찮아?]

“젠장, 어디까지 올라온 거야.”

하도 부딪쳐댄 충격에 승지가 머리를 싸맸다. 요란하게 튕겨난 것치고는 신기하리만큼 부상이 없었다.

이젠 이정도 공격은 간지럽지도 않아진 건가. 완전히 게임 캐릭터 다 됐네.

“…….”

부스러기를 털면서 일어나던 승지는 기묘한 시선도 함께 알아차렸다.

지금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바… 바닥을 뚫고 올라왔어. 어떻게…?”

머리를 한 쪽으로 땋은 여자가 말을 더듬거렸다. 그와 같이 서 있던 곱슬머리 여자도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뭔 상황이야 이건 또.

칼을 든 인간들이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나기 직전에 승지가 나타난 게 분명했다.

어, 이런 장면 많이 봤는데. 위기에 빠졌을 때 나타나는 거. 뭐라 그러더라.

“용사님이시다!”

멍하니 있던 곱슬머리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납죽 엎드렸다.

“용사님이 오셨어요! 아가씨! 아가씨를 구하러 오신 거예요!”

“정… 정말?”

“내가?”

땋은 머리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승지를 바라보았다.

얼 타는 승지와 달리 칼을 든 놈들은 상황파악이 빨랐다. 일단 승지를 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저 놈부터 죽여라!”

“아니.”

승지가 휙 날아드는 칼을 피했다. 숫자가 많아서 약간 긴장했는데 인간들이라 그런지 별로 위협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원래 사람이 공격할 때 저렇게 느렸었나.

프레임 컨트롤을 쓸 필요도 없었다. 새삼 각성자로 살아온 시간이 빡세긴 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쉽게 느껴지는 걸 보니.

누가 봐도 대충대충 움직이는 승지를 본 적이 노호했다.

“네 이놈! 똑바로 싸우지 못할까!”

“아니 글쎄,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라.”

“흥! 생긴 것과 달리 대화로 이 상황을 해결해보겠다는 거냐!”

“돌겠네. 너네 다 내가 여기 어떻게 왔는지 잊어버렸냐?”

승지가 아래를 가리켰다.

“이거 곧 추락한다고.”

뚫고 올라올 때 용골처럼 두꺼운 나무에 부딪친 기억이 있으니 뭐든 제대로 하나 박살나긴 했을 것이다.

어떻게 배가 하늘에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바닥이 뚫리면 가라앉는 건 똑같겠지.

“크윽!”

다른 사람들은 그제야 눈에 띄게 기울어진 배를 알아차렸다. 칼을 든 인간들이 주춤거렸다.

“하는 수 없지, 후퇴다!”

배에서 도망갈 곳이 어디 있나 했더니, 뚫린 배 밑창에서 박쥐처럼 생긴 와이번들이 수십 마리 날아올랐다.

공격자들은 끽끽거리며 뱃전에 내려앉은 와이번을 붙잡고 하나씩 탈출했다.

오오, 저건 제법 신기한걸.

승지가 구경만 하고 있자 곱슬머리가 물었다.

“부, 붙잡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왜?”

“악당이 도망치니까….”

“그것보단 탈출하는 게 먼저지?”

“아! 저희를 구해주려고 남으신 거군요!”

살짝 실망할 뻔하던 땋은 머리와 곱슬머리가 다시 감탄하는 눈빛으로 승지를 바라보았다.

분실물처럼 용사 노릇을 잠깐 맡겨두려는 두 사람에게 승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탈출하려면 너네도 빨리 잡아.”

“예에?”

“빨리. 곧 추락하겠다.”

애매하게 친절한 승지의 말에 당황하던 두 사람은 기우뚱 흔들리는 배에 크게 휘청거렸다.

“꺅!”

“자, 잡아요, 아가씨!”

제 목숨은 제가 챙겨야 한다는 사실이 기억난 두 사람이 후다닥 난간으로 달려갔다.

파닥파닥 거리는 와이번은 붙잡기 쉽진 않았지만 사람들이 붙잡는 걸 크게 거부하지도 않았다.

승지는 그 둘이 와이번에게 업히듯이 매달린 걸 확인하고서 자기도 와이번을 붙잡고 배 바깥으로 나왔다.

“우와!”

바깥을 본 승지가 순수하게 탄성을 내뱉었다.

단순히 하늘에 떠있는 게 아니라 비행한다는 감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클랩의 성 꼭대기가 점점 작아지고, 멀어지는 지면은 둥글게 변해갔다. 대지가 행성으로 변해가는 광경 속에서 점차 드러난 별빛은 무수한 배들을 유도하듯 나란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광경을 발밑에 두고 있다니.

잠깐, 감탄할 때가 아니잖아.

승지가 다리를 휘적거렸다. 너무 멀어! 대신 날고 있던 와이번이 날개를 퍼득거렸다. 몸부림치면 그럭저럭 아래까지 같이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승지가 아까 날아간 땋은 머리와 곱슬머리를 향해 소리쳤다.

“이봐! 지금 뛰어내리면 내려갈 수 있겠어?”

“내려가다뇨?”

와이번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땋은 머리가 소리쳤다.

“저 밑에 내 일행이 있어. 한 명씩만 붙잡아주면 위험하진 않을 거야.”

“네? 아뇨! 그게 아니라 불가능해서 그래요!”

와이번의 다리를 붙잡은 곱슬머리가 외쳤다.

“한 번 뱃길에 들어서면 바깥으로 나갈 수 없어요! 위대한 드래곤께서 저희가 죽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잖아요!”

“드래곤?”

[승지야! 저길 봐!]

그들이 타고 있던 배가 기울어지며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졌다. 침몰이 아니라 추락한 뱃조각은 천천히 떨어지더니 투명한 막에 부딪친 것처럼 중간에 멈춰버렸다.

완전히 부서진 배는 공중에 잔해를 남겨둔 채 다른 배들이 떠가는 방향대로 흘러갔다.

이건 갇혀있는 상태잖아.

정신을 차려보니 승지는 이미 우주라고 부를 법한 높이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별빛이 산란했다.

그들이나 배나, 이 정체모를 투명한 통로 속이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을 것이다.

땋은 머리가 다시 외쳤다.

“별의 길에선 들어올 수는 있어도 나갈 수는 없어요!”

“이 와이번들도 모두 위대한 드래곤 부르그골께서 마련해주신 장치인걸요? 여행자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말이에요…!”

[승지야! 부르그골이라면 마왕의 이름이잖아! 류의건을 추격하는 마왕 말이야!]

어쩐지 익숙하다 했다.

“여기가 빌어먹게 이세계는 맞는 모양인데….”

승지는 떨떠름하게 보기엔 지나치게 매혹적인 우주를 돌아보았다.

기껏해야 마법 좀 쓰고 칼이나 휘두르는 세계일 줄 알았더니 갑자기 별에서 별로 이동하는 배라니. 스케일 뭐냐.

너무 낯선 개념이라 오히려 현실에서 벗어났다는 실감이 확 왔다.

승지가 바깥 우주를 보고만 있자 곱슬머리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용사님! 저희와 함께 다른 배로 내려가요! 다음별에 도착하려면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는걸요!”

“네! 이대론 오래 버티지 못할… 꺅!”

땋은 머리가 말하다가 미끄러질 뻔했다. 그 꼴을 보니 내려가긴 해야 할 거 같았다.

와이번은 알아서 가장 가까운 배로 날갯짓을 할 뿐, 딱히 목적이 있어보이진 않았다.

“아무튼 일단 아까 그놈들이 없는 곳으로 가면 되겠지. 성좌야, 봐뒀지?”

[응! 안내할게!]

팟. 성좌의 대화창이 흩어지며 가까이 있는 배로 들어간 적의 숫자를 표시했다.

습격자가 절반으로 나뉘어서 탑승한 배를 제외하니 그들이 갈 배는 딱 하나뿐이었다.

“따라와.”

승지는 와이번의 발을 당겨 한 쪽으로 유도했다. 다행히 와이번의 지능은 꽤 높은지 적당히 방향만 이끌어져도 바로 정확한 배로 움직였다.

승지의 움직임을 본 땋은 머리와 곱슬머리가 어설프게 따라왔다.

“끼이익!”

배가 가까워지자 와이번이 한 번 크게 울부짖더니 몸을 크게 흔들어 매달려있는 인간을 떨궈냈다.

우당탕!

거친 착륙에 나동그라진 땋은 머리와 곱슬머리가 앞구르기를 했다. 대조적으로 가볍게 착지한 승지는 곧 두 사람이 얼싸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갑판이다!”

“아가씨! 이제 우린 살았어요!”

둘이 감동의 눈물을 줄줄 흘려댔다.

그동안 승지는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기 바빴다.

배 갑판 위로 올라왔는데 여전히 배 밑창이 보이다니. 기분 묘하구만.

이번에 탄 배는 안전해보였지만 대신 보이는 선원들이 모두 오크였다. 당장이라도 침을 줄줄 흘릴 것 같은 살벌한 송곳니는 의외로 차분하게 다물려있었다.

공격 안하네?

승지가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자 성좌가 대신 외쳤다.

[그렇구나! 여긴 부르그골의 선단이었어!]

“설명 좀?”

[마왕들은 모두 별에서 별로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어! 그래서 승지가 있는 곳으로도 올 수 있는 거야.

마왕 부르그골은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힘을 빌려주고 대신 통행료를 받아가. 황금을 아주아주 좋아하거든!]

“그럼 저런 것들이랑 같이 타도 안전하다는 거야?”

승지가 오크를 가리켰다.

[응! 다 부르그골의 부하들인걸! 탑승료만 가지고 있다면 안전해!]

뚜벅뚜벅. 수금에 착실한 오크가 다가와 큼지막한 손을 내밀었다.

“손님인가?”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되지?”

“어려울 것 없다. 그냥 내리면 돼.”

오크가 숨소리가 새는 입으로 대답했다.

[꺅! 배에서 내던져지면 아무리 달려도 별에 닿기 전에 마왕이 만든 통로가 사라질 거야!]

똑같이 배에서 던져져도 여긴 익사가 아니라 아사다. 우주에서 굶어죽는 경험은 꽤 희소한 경험이겠지만 역시 사양하고 싶다.

땋은 머리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탑승료는 제가 대신 내드릴게요! 생명의 은인께 이 정도는…!”

“그럼 고맙지.”

땋은 머리는 승지 몫까지 세 사람의 탑승료를 계산했다. 오크는 금화를 받자마자 바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승지가 물었다.

“아까 공격한 놈들은 네 금을 노린 거냐?”

“아니에요.”

“저희 아가씨가 귀한 분이라서 나쁜 놈들이 해치려고 한 거랍니다.”

곱슬머리가 비밀스럽게 속닥거렸다. 하지만 은근히 흘깃대는 걸 봐서는 얼른 땋은 머리의 정체를 물어보라는 것 같았다.

응, 관심 없다.

승지는 잠깐 끼어든 용사 노릇조차도 매우 성가신 사람이다. 그가 본론만 물었다.

“내가 왔던 곳으로 다시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은 정말 하나도 없냐?”

“네에. 안타깝게도….”

땋은 머리가 말을 흐렸다.

“하지만 도착하고 나면 다시 클랩의 성으로 가는 배편을 알아봐드릴게요!”

“알았어.”

승지는 이걸로 얘기를 끝내버렸다. 땋은 머리와 곱슬머리는 안절부절하며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결국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승지가 이미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이다.

승지는 살면서 달을 바라본 적도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지구와 달에 대해서 하는 말은 대충 알고 있었다.

달에서 바라본 지구는 푸른 별이다.

그리고 지금 배의 목적지인 저 별은 푸르다라는 말에서 물기를 모두 짜내고 남은 것처럼 푸르렀다.

온통 풀과 숲으로만 가득한 연둣빛 행성을 향해 뱃머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광활한 벌판을 올려다보며 승지는 이곳이 정말 별세계 같다고 느꼈다.

“성좌야.”

[응?]

“어차피 돌아가려면 한참 남았는데 여기 있는 동안 아까 못 들은 얘기나 마저 들을까?”

승지가 어디 있는 지 모를 성좌 대신 대화창을 바라보았다.

“기왕 네가 있는 세계까지 왔으니까. 알아야겠다.”

[…응!]

성좌가 반짝 대화창을 띄웠다.

[모든 걸 말해줄게. 승지에게 모든 걸 보여주면서. 왜 우리가 승지가 있는 곳까지 나타났는지. 그리고 왜 강해져야만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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