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157화 세실리아의 부탁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우혁은 세실리아와 귀국하는 길에 잠시 이곳을 경유하기로 한다. 일단 동남아시아 쪽은 이미 강한 한류의 바람에 힘입어 한국의 스타들을 알아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역시 마찬가지다. 따로 방문 일정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가 나타나자 그를 알아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부모님 때문이다. 지난 대회가 끝나고 갑작스럽게 발표했던 결혼을 자식의 입이 아니라 언론으로부터 듣게 했으니 상당히 미안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어머님.”
“오, 그래. 우리 세실리아 왔구나. 허허허.”
은환과 지연은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마음이 상한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며칠 묵어가라고 권유하였다.
한국에서의 데이트는 아무리 공개연애를 선언하고 결혼발표를 했다고 해도 사실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만남이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인터넷으로 금방 퍼져갔으니, 사생활의 침해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이 감수했던 것이다.
그런데 외국에 나오니 한결 편했다. 독일에서는 아예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으며, 이곳 말레이시아는 그래도 우혁을 알아보는 이들은 젊은 층에 한정이 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세실리아와 그의 데이트를 보고도 한국의 팬들처럼 크게 신경은 쓰지 않는 눈치였다.
“결혼하면 한국에서보다 외국에서 살고 싶다.”
우혁이 이렇게 외칠 정도다. 물론 그것은 당장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결혼을 하고도 선수 생활을 계속할 예정이니 말이다.
세실리아는 로렐라이 강을 갔다 온 후부터 훨씬 안정적으로 변했다. 더 웃음도 많아졌고, 마음 한편에 걸렸던 것이 그래도 약간이나마 해결이 된 것 같아서 항상 밝은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한국말도 많이 늘었고 관습이나 예의 부분도 많이 습득했다. 당연히 은환과 지연이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세실리아는 여기 남으면 안 되겠니? 우혁이 너만 들어가라.”
이런 말을 할 정도로 그녀는 그들 부부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다. 그래도 바늘 가는 데에 실이 따라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은 그들. 드디어 한국에 귀국했다.
기자들은 역시나 많이 나와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들뿐만 아니라 많은 팬들도 있었다. 그들의 결혼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세실리아의 남성 팬과 우혁의 여성 팬들이 등을 돌릴 것 같았는데, 실제로 며칠이 지나니 마음의 상처를 잊은 듯 보였다. 금세 또 이들에게 열광하는 대중들. 그들을 뒤로하고 순빈의 차를 탄 이들 연인.
“저 다음 주부터 다시 훈련이에요. 그동안 특별 휴가를 받아서 놀았더니 몸이 근질근질 해요.”
“그래? 야, 넌 다리가 아팠을 때 어떻게 살았냐?”
“엄청 답답했죠. 그래서 자살을 시도한 거였는데.”
“근데 죽지는 않고 세실리아를 만났네.”
“그렇죠. 하하하.”
주제와는 다르게 밝게 이야기하는 그들. 그런데 세실리아가 표정을 굳히며 우혁에게 당부를 하듯이 말한다.
“다시는 그러지마.”
“다… 당연하지. 널 두고 어떻게 가겠어?”
그는 당황하며 말했다. 자살을 하던 당시에 운명처럼 만난 세실리아. 역설적으로 이제 그녀를 두고 세상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을 하는 우혁이다.
“우혁아, 그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미래가 며칠 없어져서 난리가 났었다.”
“미래가요?”
되묻는 것은 우혁이 아니라 세실리아였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 다음 이야기를 듣기 원했다.
“다시 나타나기는 했지만 소속사도 그녀가 어디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하더라. 우혁이 결혼 발표하고 나서 며칠 있다가 독일 갔다 온 그 기간 동안 잠시 사라졌었어.”
“지금은 괜찮아요?”
“다시 나타났지. 그런데 주연 맡은 드라마를 하다가 그렇게 잠적을 한 거라서 욕을 많이 먹었어.”
우혁은 순빈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름 무심하려고 애를 썼다. 그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없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이 행복한 상황이다. 레지나에게도 맹세를 했었다. 세실리아 하나만을 보고 살기로.
물론 미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녀는 항상 자신을 사랑해 주었고, 어쨌든 그녀의 잘못으로 인해서 이별을 맞이한 것은 아니기에. 그래서 죄책감은 항상 가지고 있다. 그래도 그는 시간이 해결할 것이라고 믿었다. 언젠가 그녀에게 좋은 사람이 생기면 당연히 자신 따위는 잊을 거라고.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세실리아는 아니었나 보다. 그녀는 이제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 서서히 알아가고 있었다. 사람이 잘못된 마음을 먹고 나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녀. 예전에는 로렐라이 언덕에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야 알겠다. 만약 우혁이 자신을 떠나면? 상상도 하기 싫지만 그녀 역시도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가진 성품. 그래서 참 힘들다. 우혁과는 정 반대의 성격이다. 남의 감정과 너무 잘 동화되니 말이다. 그녀는 미래가 잘못 마음을 품게 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귀가 후 더욱 그를 졸라댔다.
“세실리아, 미래는 긍정적인 아이야. 이번만 넘어가면 그녀는 곧 제자리로 돌아올 거야!”
“우혁은? 우혁은 왜 자살하려고 했어?”
“그거랑 달라. 차원이 다른 문제야. 난 세상을 살아갈 의미가 없었어.”
“그녀도 마찬가지야. 그녀에게 우혁은 세상을 살아갈 의미니까.”
이제 오히려 말로 그녀를 이기기 힘들다. 모국어를 익혔다고 익힌 지 얼마 안 된 외국인에게 말싸움을 꼭 이기리라는 법은 없다. 그것이 논리적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달라지며, 세실리아는 의외로 그 허점을 잘 파고들었다.
“그래서,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야?”
“그녀와 친구가 되어 줘.”
“친구? 미래가 바라는 게 뭔지 몰라서 그래?”
“미래가 말했어. 우혁과 친구가 되어서 자주 보고 싶다고.”
“그건…”
그는 답답했다. 지금 상황에서 미래와 친구로 남는다는 것. 그것은 오히려 정을 끊으려 지금까지 노력했던 모든 행위를 다 산산조각 내는 것과 같았다. 잘못하면 그녀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다. 남의 남자가 된 그를 계속 본다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그는 짐작이 쉽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는 있다.
“그건 미래를 위한 일이 아니야. 그건 오히려 그녀에게 잔인한 일이라고.”
“어째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세실리아, 우리는 결혼할 사이지? 그리고 우리 둘 이외에는 결코 다른 사람과는 사랑할 수 없어. 그렇지 않아? 그런데 그녀가 곁에 맴돌면? 분명히 세실리아는 신경이 쓰일 거야.”
“그렇지 않아. 오히려 이렇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는 것을 들을 때마다 더 신경이 쓰인단 말이야.”
“참으면 돼. 얼마 안 있어서 점점 그녀도 제 생활을 찾을 거야.”
“만약 평생 못 찾으면? 아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도는 대화로 돌아왔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말을 꺼낼 힘이 없었다. 세실리아가 고집이 별로 없다는 것은 그의 착각이었나 보다. 이 부분에서 첨예한 대립.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우혁이 내 의견을 묻지 않고 로드를 만나러 가자고 했지? 난 들어 주었어. 이제 내 차례야. 그녀와 친구가 돼 줘. 그녀가 곁에 있는 것. 난 괜찮아. 나 때문이라면 정말 괜찮아.”
그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세실리아가 미래와 그가 친구가 되기를 원하는지. 물론 죄책감도 있기는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궁금해지고 있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서 자신이 미래와 해결을 해야 할 상황은 만들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목숨을 걸고 로렐라이 언덕으로 간 일. 그것을 생각하면 자신도 매우 독단적이었으니 말이다. 결국 그는 미래와 만나는 것을 승낙하고 말았다.
“일단 한 번 만나볼게. 그리고 진짜 그녀가 나와 친구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난 네 말대로 그녀와 친구로서 지내겠어. 하지만 그 이외의 모습이 보인다면 네 부탁을 들어줄 수 없어. 이것은 네가 이해해 줘.”
============================ 작품 후기 ============================
추워졌습니다. 감기 조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