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76화 약 올리지 마
다음날은 조금 나아졌다. 사실 크게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정신적인 안정이 그의 고통을 결정하는 것 같았다. 그는 어제 가희가 우승을 했다는 소식에 자신이 아니지만 한국이 한 종목을 석권해다는 최소한의 의미가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자 씻은 듯이 고통이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아침에 의사에게 요청을 했다.
“저 경기 참가는 안 하겠습니다. 하지만 가서 응원이라도 하고 싶은데…”
“사실 어제도 퇴원이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말씀드렸지만 근육이 놀라서 그런 것인데 정신적으로…”
의사는 말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우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그래도 경기 참여는 절대 안 됩니다. 햄스트링 조심해야 해요. 골반이 아프지만 그것은 정신적 트라우마 때문에 발생한 것이고…”
“네, 알겠습니다. 그럼 감사했습니다. 순빈이형, 퇴원 수속 좀. 난 먼저 갈게.”
“야, 너 어떻게 가려고. 어차피 내가 태워 줘야 하잖아.”
그렇게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의사를 뒤로 하고 경기장에 도착한 매니저와 선수. 들어가 보니 남자 800미터 예선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뭐야? 퇴원해도 되는 거야?”
“네, 병원에 전화해 보세요. 정말 괜찮답니다.”
“음…”
영욱은 그의 말을 믿었다. 비록 어제 그의 속을 시커멓게 태우기는 했지만 진심을 못 읽을 정도로 거짓을 일삼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그 거짓이라는 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었다. 본인이 피해를 봐서 탈이지.
영욱과 같이 경기를 지켜보는 우혁. 태릉에서도 선수들이 일부 참가했다. 태형광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 상비군. 하지만 그들의 선전은 없었다. 대체적으로 저조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국제 경쟁력이 있는 선수들을 S 생명 실업팀이 싹쓸이를 해갔으니. 이곳의 시설이 이제 더 좋다. 앞으로 격차는 더 커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국가 대표 상비군의 무용론이 대두될 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지금 만원 관중. 모두 다 돈을 내고 들어왔다. 안타깝게도 우혁이 참가하지 못했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없어도 이렇게 관중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S 생명은 이미 다음 달에 마스터즈 수영대회를 주최하겠다는 신청까지 했다. 심지어 P&A 그룹에서 수영팀을 만든다는 소문도 돌았다. 점점 민간이 주도가 되어 수영을 발전시키는 모델로 가고 있다. 그 핵심이 되는 이는 바로 저기 앉아 있는 우혁이다.
“꺄아아아악! 우혁 오빠!”
“최우혁! 최우혁!”
경기에 참가하지도 않는데 우혁을 불러대는 관중들. 어제 그가 기권까지 했는데 오늘 또 기대감을 안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손 흔들어 줘야지.”
순빈이 그에게 주문을 한다. 항상 그의 뒤에서 묵묵히 그를 챙기는 매니저. 이런 인기 관리도 해주고 있다. 그의 충고에 따라서 우혁은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환호성은 더 크게 나왔다. 그를 부르는 소리. 박자까지 맞추고 있다. 덕분에 800미터 예선 B조에 나온 선수들은 황당해 하고 있다. 방금 A조가 끝나고 지금 이 조에 속한 장치앙린. 그가 바라본다.
우혁은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고글을 잠시 벗고 웃는다. 명백한 비웃음이다. 그 조롱. 참을 수 없다.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경기를 하고 싶었다. 툭.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는 손.
“봐라. 또! 어째 그렇게 흥분을 참지 못하니?”
“아…”
영욱이 아니었으면 진짜 발끈해서 그에게 다가갈 뻔 했다. 그의 약점. 감정 컨트롤. 그것이 문제이다. 승부욕이 강하다는 장점과 항상 공존할 수밖에 없는 단점이다. 그것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게 감독과 매니저일 것이다. 감독은 현장에서, 그리고 매니저는 사생활에서.
우혁은 차라리 장치앙린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그는 경기를 해야 한다. 무슨 의도인지 모르지만 자신을 계속 자극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출발신호. 800미터를 헤엄치고 나아가는 그의 긴 팔과 다리. 그것으로 모든 선수들을 압도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B조에서 그의 적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C조도 중국 선수가 1위로 예선을 통과했다. 언제나 파란은 있다. 세계 랭킹 4위가 중국 선수고 그는 C조에 속했었다. 그런데 예선 탈락을 맛 본 것도 그였다. 대신 샤오 헤이씽이 올라간 것이다. 그는 우혁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지난 동아시아 대회에서 그와 싸웠고 결국 1500미터에서는 자신이 이겼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그가 대회 2관왕이었다. 결국 자신은 패한 것이다. 최소한 그에게라도 이기는 것을 목표로 삼았건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뜻 밖에 부상. 지난 대회에 장치앙린이 부상으로 불참했는데,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다. 역지사지인가? 아니다. 자신은 그를 자극한 적이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뭐라고 장치앙린이 지껄인다. 그의 앞에 서서. B조에서 경기를 마치고 오면서 라커룸에 들렸다가 나온 것 같았다. 중국어는 아무리 외국어를 잘 알고 있는 우혁이라도 알아듣기 힘들다. 아버지의 근무처였던 곳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따로 공부를 한 적도 없다.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장치앙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답답하기는 했지만 대략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리라. 알아듣지 못하니 더 화가 났다. 누가 대신 통역할 사람이 없나 찾지만 오히려 자신보다 더 못한 사람들뿐이다.
“신경 쓰지 마라.”
“젠장, 이놈이 뭐라고 하는 거야?”
관심을 두지 말라는 영욱의 말에 뒤 이어 김훈이 짜증을 냈다. 그는 800미터를 참가해서 예선탈락을 맛보았다. 그것도 장치앙린이 속한 조에서. 그러니 그가 와서 이렇게 지껄이자 열이 받을 수밖에.
“비켜봐, 우혁아. 내가 대신 욕 한 바가지 좀 하게. 야이, 개새야. 아, 니네 라커룸 가서 놀아, 이 씹새야. 이 수영장 아시아에서 최고로 잘 지어 놨잖아. 라커룸도 크고 삐까뻔쩍. 너희 떼놈들이야 이런데 돈 쓰겠어? 그러니까 여기서 놀다가 몰매 맞지 말고 저리 가라. 응? 우리 우혁이 괴롭히지 말고 저리가.”
이럴 때는 친한 척이다. 항상 국제대회 때는 그래도 같은 편이다. 이렇게 대신 더러운 욕까지 해주니 오히려 우혁이의 속도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적의 적은 친구다. 더구나 같은 나라라는 소속감. 이런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장치앙린은 대충 김훈이 말한 게 욕이라는 것을 눈치 챈 것 같다. 그를 무섭게 노려본다.
“노려보면 어쩔 거냐? 이 씨부랄 놈아. 짜증나게 네가 먼저 우혁이한테 욕했잖아. 내가 대충 떼놈 욕을 아는데, 왕빠단 이런 말 들었단 말이야.”
왕빠단. 대략적으로 우리나라의 쌍 시옷 들어가는 욕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상하게 욕은 금방 배운다. 그 어감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아마 김훈도 그래서 그 욕을 알게 된 것일 터인데…
그 역시 열심히 욕하고 있으니 상대방이 못 알아들을 리가 없다. 그러니 기분이 나쁘다는 눈빛으로 그를 째려볼 수밖에.
“됐다, 김훈. 말이 안 통하는 떼놈과는 말 섞지 말자. 크하하하.”
우혁이 김훈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처음이다. 이런 스킨쉽. 어색하기는 한데 한 번 이렇게 해 놓으니 장치앙린 앞에서 다시 내리기가 싫다. 웃음소리는 또 뭔가? 그의 것 같지도 않은 이상하게 호탕한 척 하는 웃음. 그것을 보고 마지막으로 코웃음 치고 등을 돌리는 상대.
“야아, 최우혁. 네가 모처럼 듣기 좋은 말 하는 구나.”
“너 역시, 내가 해줄 욕을 해줘서 고마웠어.”
둘은 그가 등을 돌리자 이렇게 하이파이브를 하며 손을 맞잡는다. 나름 말로 그를 이겼다고 생각했나 보다. 어디를 가나 이 나이 때에는 가끔 유치하다. 이 둘처럼. 그러다 둘의 눈이 마주치고 장치앙린이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여기는 순간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래도 난 네가 맘에 들지 않는다, 최우혁.”
“누군 맘에 들어서 네 손잡은 줄 알았냐? 다 연기다, 연기. 그리고 넌 800미터에서 저 놈한테 졌으니 내일은 내 몫까지 꼭 뛰어서 좀 복수란 것을 해봐라.”
“우쒸…”
자신을 향해 돌아서는 우혁을 향해 입을 삐죽인다. 역시 아무리 그래도 한 순간에 친해지기는 힘들다. 둘은 상극이다. 이렇게 앙숙이던 그들의 첫 스킨쉽은 대륙에서 건너온 재수 없는 인간 하나로 인해 이루어졌다가 다시 금세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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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