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33화 선의의 경쟁자
요즘 빛나는 우혁의 개인 훈련에 함께 할 명분이 없다. 이제 자신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여자 선수의 기록은 중등 남자 수영 선수에게 뒤처지기도 한다. 자신을 능가했을 때부터 이미 그녀는 경쟁 상대가 아니다. 그렇다고 남아서 저번처럼 스포츠 마사지를 해주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다행한 점은 그가 집으로 갈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미 얼굴이 만천하에 공개가 되어서 번거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하지만 AK 스포츠에서 곧 그의 매니저를 선임해서 보낸 준다고 하니 이것도 시한부이다.
그 핑계로 개인 훈련을 같이 한다. 이제 그녀가 그의 도움을 받는 것 같다. 그와 연습 경기를 하다보면 그를 따라붙으려는 승부욕으로 인해 기록 경신에 도움이 된다. 그런데 오늘은 한 명이 더 남았다.
“형이 남으면 이제 저도 남을 게요.”
어느 순간 일수는 그를 따르게 되었다. 아직은 그가 더 기록에서 우위다. 그러나 발전 속도를 보면 위기감이 든다. 간당간당하다. 차라리 마음을 놓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배울 점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그와 같이 훈련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혁도 반색을 한다. 개인 트레이너가 열의가 없지는 않다. 나름 그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준다. 국가에서 고용한 것이니 당연하지 않은가? 월급을 받는 선에서는 확실하다. 다만 퇴근 시간도 확실하다. 그래서 늘 아쉬웠다.
그런데 경쟁자가 같이 훈련을 한다고 했다. 일수는 아주 좋은 상대다. 그와 함께 연습 경기를 몇 번 하면 실력이 쑥쑥 늘 것 같았다.
“그럼 연습 경기 한 판?”
“그… 그러죠.”
더운 여름이다. 실내 수영장의 수온이 아무리 그들의 땀을 식혀준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더구나 자신을 향해 승부욕을 불태우는 우혁을 보고 그는 등에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빛나가 기록을 재주기로 했다.
시작된 경기. 일단 50미터다. 일수의 승리다. 그가 두 살 어리더라도 그는 노련하다. 어디서 스퍼트를 내는지, 각각의 경기에서 힘의 배분을 어떻게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좀 쉬었다가 100미터 하자.”
“네? 네…”
강철체력이다. 자신과 다르다. 일수는 장거리보다는 단거리가 주 종목인 선수다. 그런데 50미터에서 힘을 빼고 다시 100미터에서 힘을 뺀다. 도무지 만족을 모르는 우혁은 이길 때까지 할 것 같았다.
“자, 이제 200미터다.”
100미터에서 또 진 그는 다시 그에게 승부를 청한다. 이번에는 쉬자는 말 조차 하지 않았다. 불공평한가? 동등한 조건이다. 따라서 일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그와 다시 경주를 했다. 간발의 차로 50미터, 100미터를 이겼는데, 이번에는 정말 미세하게 이겼다.
“흠. 아직 멀었군.”
일수는 조마조마한 심정이다. 400미터를 하자고 할까봐. 이번에는 확실하게 질 것이다. 자신이 지치지 않은 상태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그를 이긴다는 게 무리다.
“마무리 훈련 하고 오늘은 끝내자.”
“네, 형. 하하.”
그런데 다행히 여기서 끝내자고 한다.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들에게 다가오는 빛나. 그녀의 얼굴 표정이 진지해졌다.
“일수야, 너 200미터 최고 기록이 얼마였어?”
“1분 47초 73이요.”
“1분 47초 02. 그리고 우혁이가 1분 47초 10.”
“정말이요? 정말이에요?”
“뭐 비공인이니까…”
비공인 신기록은, 특히나 연습 때 선수들이 가끔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기도 한다. 그래도 기분이 좋다. 일수 역시 점점 실력이 늘고 있다. 원래 그가 제 2의 박태원이었다. 잠재력이 엄청났던 신예. 그런데 그만큼 활약을 하지 못했다. 경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또래에 같이 승부를 나눌 수 있는 경쟁자.
지금은 다르다. 어느 새인가 그는 우혁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를 미워하거나, 시기 또는 질투로 시간을 보낸다는 말이 아니다. 그가 수영하는 모습을 관찰하고, 배울 점은 이제 배우고 있다. 자신이 그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성격이 좋았다. 매우 긍정적인 자세. 그리고 승부를 즐기는 성격.
“와아, 다시 한 번…”
여기까지 말을 하다가 중단했다. 우혁의 반짝이는 눈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느꼈다. 그가 400미터를 자신에게 제안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자신을 배려한 것이라고. 그런데 지금 흥분해서 자신이 하자고 하면 분명히 기를 쓰고 덤벼들 것이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고 싶다. 3전 3승. 게다가 자체 최고 기록 경신. 괜히 마지막에 김이 새는 패전을 맛보고 싶지 않았다.
“마무리를 하고 이제 저는 가 봐야겠습니다. 형은요?”
“나도 들어가야지.”
“오늘 즐거웠어요.”
그 말을 듣고 우혁은 웃었다. 순간 환해진다. 일수는 남자의 미소가 이렇게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느꼈다. 그리고 왜 그렇게 오빠 부대가 출동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만약 자신이 여자라면 홀딱 빠질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빛나를 살짝 보았다. 역시나였다. 그녀의 눈은 우혁의 얼굴에 고정이 되었다. 아마 여러 여자 울릴 남자 같다. 본인만 마음을 먹는다면.
“형, 여자 친구 있어요?”
“아니…”
“그럼 우리 누나 소개 시켜 드릴까요? 형이랑 동갑인데…”
이렇게 말을 하는 이유. 빛나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녀와 그는 나름 몇 년 동안 오누이처럼 지낸 사이다.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그녀지만 그래도 성격이 밝은 그를 남동생처럼 봐주고 있다.
“너희 누나?”
“네. 솔직히 제가 이렇게 잘생긴 것은 집안의 유전자 때문이죠. 그러니 저희 누나는 얼마나 예쁘겠어요?”
“난 괜찮아. 아무래도 수영만 하고 사니까 여자 친구가 생기면 잘 못해줄 것 같아.”
“노노…”
일수는 검지를 세우고 살짝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힐끗 빛나를 보니 역시나 그녀의 얼굴이 경계의 빛을 띠었다. 자신을 잡아먹을 듯한 표정이다. 그녀 입장에서는 미래도 벅찬데 또 다른 경쟁자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우리 누나는 그런 것 잘 참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역시 안 되겠네요. 하하. 형 옆에는 어쩌면 수영하는 여자가 잘 어울릴 수도…”
결국 그는 눈치를 챈다. 빛나가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대충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들이 자주 붙어 다니는 것을 목격하니 말이다. 심지어 영욱은 그녀에게 조심하라고 했다. 미래처럼 부진에 빠지면 이곳은 냉정한 곳이니 쥐도 새도 모르게 모습을 감출 수 있다고.
“됐다. 그런 이야기는. 어쨌든 앞으로 나랑 훈련할 거니?”
“그럼요. 형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서 형 훈련 량과 똑같이 계획을 세울 거예요.”
그는 야무지게 말했다. 그래도 표정은 익살스럽다. 그 모습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난 환영이야. 앞으로 잘해보자.”
우혁은 승부욕이 매우 강하다. 자신을 이긴 일수를 겨냥해서 항상 훈련에 매진할 것이다. 둘의 경쟁은 대표팀에 플러스로 작용할 것이다. 국내에서 최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해외에 수영 강자들이 득실거리니 말이다.
당장 일본에 쇼타 스카이와 그보다 더 빠른 중국의 장치앙린. 아시아권만 해도 이들 둘을 넘어서야 한다. 세계무대로 가면 더 심하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호주 등 여러 강자들이 포진 되었다. 올림픽 금메달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 내에서 비슷한 경쟁자들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승부를 하면서 기록을 경신하게 되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박태원이 국내에 제대로 된 경쟁자만 있었어도 더 완벽한 수영선수가 되었을 것이다.
짝. 짝. 짝.
한 사람의 박수소리. 바로 빛나다. 그녀는 이 장면이 너무도 기쁘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드디어 든든한 친구가 생긴 것이다. 항상 모난 성격 때문에 주변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고독하게 혼자 싸우고 있다. 그런데 일수가 그에게 마음을 열고 있으니 얼마나 훈훈한 장면인가?
“자, 자. 미래의 두 금메달리스트. 이제 마무리하고 집에 가야지. 일수 서초동에 살지? 내가 태워다 줄게.”
“아, 정말요? 땡큐, 땡큐.”
그는 두 손을 모아서 다시 익살스럽게 고마움을 표현한다. 그것을 보고 빛나는 오랜만에 밝게 웃어본다. 요즘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일기예보는 흐림이었는데…
일수를 바래다주던 길. 요즘 둘은 대화가 부쩍 끊겼다. 그 일 이후다. 원래 우혁은 말이 없고 그녀 역시 공감대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 이전에는 대화의 화제를 찾기가 어렵지 않았는데 그 때 그 사건 이후로 머릿속에 온통 이상한 상상으로 가득 차 버렸다.
“그 때 아무 일 없었어.”
갑자기 그가 입을 뗐다. 그 역시 불편하긴 마찬가지였을까? 그럴 수도 있다.
“아아… 그래?”
“응. 하지만 무슨 일이 있을 뻔하긴 했어. 네가 와 줘서 고마웠다.”
미래가 들으면 섭섭할 말이었다. 듣고 있는 빛나는 속으로 안심할 말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는 진짜 고마워하고 있다. 그는 여자와의 관계가 복잡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지금은 오로지 수영뿐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보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욕망은 스무 살에는 정말 참기가 힘드니 말이다. 아마도 빛나가 오지 않았다면 선을 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한 것이다. 자신도, 그리고 미래도 지켜줄 수 있었던 상황을 만들어준 그녀에게.
듣고 있는 그녀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속으로는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다. 아니 패배를 면했다고 해야 하나? 그동안 미래에게 그를 빼앗겨 버렸다는 심리 때문에 우울했었다. 사실 그녀와 대략 그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상하기 싫었지만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이제 속이 시원했다. 다만 마지막 그의 말에 좋았던 그녀의 기분이 살짝 상하기는 했지만.
“앞으로 너도 그렇고, 미래도 그렇고 아파트 출입은 자제해 주었으면 좋겠어. 지금은… 나 수영만 신경 쓰고 싶어.”
============================ 작품 후기 ============================
외국에서도 통하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심지어 인어한테도 통하는데요, 뭐. ㅎㅎ 정작 이 글을 쓴 사람의 얼굴은 별로지만. 제가 만들어 낸 주인공이니 제가 맘대로 외모를 만들어낸 거라서 사실 대리 만족이 충분히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