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153화 잘 가, 내 사랑
종수는 이제 지난번보다 부담스럽지 않다. 끊임없이 그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는 우혁. 그가 이렇게 말이 많았던 사람인가 생각해봐도 이랬던 기억이 별로 없었다. 오늘까지 벌써 한국 팀이 금메달 세 개나 가져왔다면서 오늘 져도 된다고 한다. 막상 그는 질 생각이 없는데. 이제 승부욕이 부담을 이기는 상황이 왔다. 그리고 그 승부욕은 2번 주자인 그까지 최선을 다하게 만든다.
그의 별명은 원동기였다. 성씨가 ‘원’가라서 어렸을 때부터 붙은 별명.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는 그 별명을 좋아한다. 나중에 원동기라는 뜻을 검색해보니 자연계로부터 에너지를 받아서 동력을 발생시키는 기계를 뜻하는 것을 알았다. 결국 수력 터빈도 그것에 해당이 된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원동기보다 수력 터빈으로 불러달라는 말도 가끔 했었다.
어쨌든 원동기이든 수력 터빈이든, 그 역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힘을 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도무지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의 뒤를 쫓고 있는 팀들에게 말이다. 이제 1위가 아닌 2위를 노려야 할지 모르겠다.
심지어 대기하고 있는 병묵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자신도 모르게 생긴 여유다. 그런 그를 향해 우혁은 다시 한 마디를 한다.
“야, 우리 너무 나간다. 이거 다음 올림픽에는 자유형에서 금메달 다 딸 것 같아. 물론 내가 딸 거지만.”
“무슨 소리세요. 형은 이제 늙어간다구요. 어제 저 한테도 졌잖아요.”
“그거 봐 준거야. 원래 라이벌은 좀 키워서 써야 해. 너무 나만 해먹으면 좌절해서 훈련 안 할 수도 있잖아.”
이기는 팀에서는 그 어떤 농담도 가능하다. 그들의 대화를 보고 미소를 짓는 영욱. 그러다가 얼굴을 굳힌다. 방심은 그 어떤 경우도 용납을 할 수는 없다. 이제 자신이 나설 차례다.
“아직 경기가 반도 끝나지 않았다. 정신들 차려. 그리고 목표를 우승이 아닌 기록에 맞추자. 예선전에서 세웠던 기록. 또 단축해야 하지 않겠니?”
이의는 없었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 마음이다. 사람의 몸이라는 게 최고일 때가 항상 정해져 있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이 그들의 최고 상태일 수도 있다. 다음 올림픽 때 더 정점을 찍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중으로 미룰 필요는 없다. 할 수 있을 때 많이 얻어놓고 많이 기록해 놓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6분 57초 56. 그들이 목표로 삼은 또 하나의 경쟁상대다. 자신들이 세운 예선 기록. 충분히 깰 수 있다. 그 때에는 우혁의 몸이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신나게 출발을 한다. 종수의 뒤를 이어서 병묵이.
“아, 이거 경사 났습니다. 저는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박태원 선수가 은퇴하고 우리나라의 수영이 침체될 거라는 예상이 많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 어린 선수들이 이렇게나 잘해주고 있습니다. 감격스럽습니다. 여러분,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드디어 선주의 속사포 같은 멘트가 불이 붙었다. 옆에서 태원이 웃음을 띤다. 자신에게 묻지도 않고 또 혼자 진행을 하려고 하고 있다. 가끔 흥분하면 저런다. 이럴 때에는 자신이 알아서 치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이미 장일수 선수와 최우혁 선수를 보고 은퇴를 결심했습니다.”
“그런가요?”
“그 때 사실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아시안 게임을 앞두었던 상황. 조금만 더 뛰어달라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때 제가 후배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면 지금 저들의 성장은 좀 더 더뎌졌을 것 같네요.”
“그렇군요, 정말 훌륭한 결정이셨네요. 은퇴 잘하셨습니다.”
“…….”
급기야 이런 말까지 하고 있다. 아마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 기쁜 나머지 은퇴를 잘했다고 하며 칭찬 아닌 칭찬을 하고 있다. 태원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지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은퇴를 잘했다는 것. 선주가 흥분해서 한 말이지만 진짜 그 결정은 후회가 없었다. 대표 팀에 들어가야 할 후배 선수들에게 한 자리를 내어주는 게 그들의 성장속도를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기에. 운명처럼 자신의 은퇴시기에 나타난 우혁. 그를 보고 결심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라면 자신의 뒤를 이어줄 수 있다는 예감.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는 아시안 게임에서 5관왕을 한다. 장치앙린이 평정하고 있던 장거리. 그리고 욱일승천의 기세로 단거리의 제왕으로 불렸던 쇼탸 스카이. 이 둘의 아시아로 양분되었을 상황을 갑자기 나타나 제압을 해버렸다. 그로 인한 수영 붐. 저변의 확대. 여러 가지 긍정적인 요소들이 생겨나면서 한국의 수영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감격스럽다. 약간 눈시울도 붉어지고 있다.
스타트대에 선 우혁.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는 그 누군가를 바라본다. 어디에 있어도 한 눈에 발견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인. 세실리아를 바라보며 그는 손을 한 번 흔들어준다. 관중들의 시선이 그의 흔드는 방향을 살펴본다. 그 곳에 앉아 있다. 여신 하나가.
우혁은 허리를 굽힌다.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해준 그녀를 위해 다시 하나의 금메달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금메달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현재 자신이 해줄 것은 그것밖에 없다. 그녀를 처음 만난 그곳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그는 입수를 마친다.
물속에는 세실리아가 있다. 물론 그녀는 관중석에 있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에라도 있다. 그가 있는 어디에도 그녀와 함께 있다고 생각을 하니 그의 온 몸에 힘이 샘솟는다. 팔을 휘저으면서 온갖 생각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일. 수영을 시작하며 목표를 세웠던 일. 그리고 독일에서 그녀를 만나 한국까지 동반했던 일까지. 그 모든 것을 동력으로 삼아 발차기를 한다.
신형엔진. 그가 앞으로 나가는 모양을 보면 마치 그것을 연상시킨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그가 지나간 흔적이 물길처럼 퍼져나간다. 이제 기록을 향해 전진한다. 지금 그가 헤치는 물길에는 상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과의 싸움에 돌입을 한 것이다.
“세계 신기록이 또 한 번 세워질 것 같습니다. 거의 확정적입니다. 시청자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은 한국 수영의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장소를 보고 계십니다. 그 역사를 만들어가는 영웅들을 보고 계십니다.”
50미터 턴. 깔끔하게 턴을 한다. 잠영 후 머리를 내밀고 100미터를 향해 간다. 그를 뒤따라가는 적수들. 이미 우승을 포기한 몸짓이다. 아니 2위 싸움에 급급하다. 점점 가속도를 내는 그를 쫓아가기는 애시 당초 틀린 것 같았다.
승리의 순간. 그는 흰 수영모와 고글을 함께 벗었다. 그가 본 전광판에 찍힌 기록. 6분 56초 44. 놀라운 기록이다. 예선에서 자신들이 세웠던 그 기록을 1초 이상이나 앞당겼으니 당분간 이 기록은 그들이 아니면 누가 깰 것인가?
환호성. 감격의 눈물. 기쁨의 탄성. 이 모든 것이 경기장에서 함께 어우러졌다. 그가 사랑하는 존재인 세실리아 역시 박수를 치며 일어서있다. 모두가 기립한 상황. 네 명의 수영 영웅들이 손을 나란히 잡고 허리를 굽힌다. 관중에 대한 인사. 그들이 있기에 한국의 수영이 발전할 수 있었다. 관심이 있어야 자랄 수 있는 토양이 생성되기에, 지금 그들은 기록으로 보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날 기자회견장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질문으로 홍수를 이루었다. 그리고 우혁은 폭탄 선언을 한다.
“내년 올림픽이 끝나면 결혼을 할 계획입니다.”
모든 여성들의 좌절을 불러일으키는 핵폭탄 급 발언. 선수들도 영욱도, 그리고 기타 관계자들도 처음 알았기에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형, 이런 게 어디 있어요? 내일 신문에 우리들 이야기가 도배될 예정인데, 형 때문에 망쳤잖아요.”
“아냐, 네 얼굴이 아마 대문짝하게 나올 거야. 너 얼굴 크잖아. 하하하.”
그에게 말을 했다가 본전도 못 건진 일수. 그는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또 울상을 짓는 여자. 가희는 눈물까지 흘린다. 이제 그를 포기해야 하나 보다. 그녀는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짝사랑해 왔던, 그렇지만 몰래 한 것이 아니고 대 놓고 짝사랑한 그 상대를 떠나보내야 했다.
빛나 역시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다. 그와의 추억을 평생 간직하며 살 것이다. 어쩌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 때까지는 늘 그와 마주치면 힘이 들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또 한 명. 미래는 낙담한다. 촬영장에서 기사로 접한 그의 소식. 그것이 주는 충격의 무게는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뭘 기대한건데?’
그녀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기대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세실리아와 친구가 되었다. 그것으로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인가? 결국 그는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될 것인데 말이다.
“휴우…”
눈물도 나지 않는다. 단지 한숨만이 공중으로 떠나고 있다. 마지막 던진 말과 함께…
“잘 가,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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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만 저리지 않으면 더 연참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이 작품 끝나면 며칠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안녕히들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