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147화 그를 보고 과거의 자신을 떠 올리다
4번 레인. 1위 기록자가 있어야 하는 그 곳. 세계에서 그 종목에 해당하는 가장 빠른 사나이가 위치해야 할 곳이다. 1500미터에서 우혁의 위치가 바로 그 곳이다. 이제 결승. 숨을 죽이고 있는 많은 사람들. 아나운서와 해설까지도 그의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짧은 1초.
- 삐익.
드디어 출발을 했다. 모든 선수들의 잠영. 그 역시 마찬가지다. 긴 잠영이 끝나고 가려는 찰나 문제가 생겼다. 그것을 깨달은 것은 50미터 턴을 할 때쯤이다. 경기가 중단이 되었다. 모든 선수들이 의아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는 상황.
응급구조 요원이 지미를 건져내고 있다. 7레인에서 뛰고 있는 소년. 잠재력만큼은 우혁이 못지않은 이 장래의 기대주가 햄스트링 쪽을 붙잡고 있다. 얼굴이 물에 젖어 보이지는 않지만 눈물을 흘리는 것이 분명했다. 부상이다.
그를 보며 우혁은 과거의 생각이 떠올랐다. 병원에 실려 갔던 일. 그곳에서 얼마나 울었던가? 분명히 어제 밤늦게까지 연습했으리라.
“아, 안타깝습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하나요?”
“…….”
선주의 멘트를 제대로 받지 못할 정도로 태원도 그가 걱정이 되었다. 자신 몰래 연습을 한 것 같았다. 대회 기간 동안에는 따로 연습을 하지 않는다. 간단히 몸만 푸는 정도인데, 햄스트링에 무리가 온 것이라면 대회 첫 날부터 줄기차게 연습을 해오지 않았을까 예측이 되는 상황이다.
“일단 햄스트링 부위로 보입니다. 수영 선수들은 주로 어깨와 허리, 그리고 엉덩이에 부상이 많이 생깁니다. 그런데 뒤쪽 허벅지 쪽에 부상이 온다면… 아마도 과도한 훈령량이 문제일 것입니다.”
“아… 그런가요? 경기 속행은 조금 더 있다가 할 것 같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잠시 후 뵙겠습니다.”
TV의 화면은 넘어간다. 광고로 바뀐 것이다. 미래가 나오는 광고가 시작이 되었다. 맥주 선전이다. 비키니를 입고 큰 맥주 캔에 기댄 모습. 누가 봐도 그 섹시한 모습에 그 맥주를 들이 키고 싶을 것이다.
선수대기실에서 이 화면을 보고 있는 그녀의 옛 동료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침이 꿀꺽 넘어가는 것 같았다.
“야, 정말 쟤는 엄청나게 예뻐졌다.”
“그러면 뭐해? 어차피 못 먹는 그림의 떡인 걸.”
“그런가?”
한편 영욱의 머리는 복잡해지고 있다. 당장 지미가 부상으로 빠져나가서 계영의 한 자리가 모자라게 된 상황이다. 순번대로라면 종수를 배치해야 했다. 그 역시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무게감이 떨어져 보였다.
다시 시작된 1500미터 결승. 한 명이 부상으로 실려 나가서 김이 좀 샌 느낌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혁은 자신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신호에 따라 입수를 하고 잠영 후 머리를 내밀었을 때 그는 자신이 가장 앞에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무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1500미터의 경기 운용의 묘를 깨닫고 있다. 어느 시점에서 스퍼트를 내며 어느 시점에서 완급조절을 할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지금 목표로 하는 것. 우승도 우승이지만 예선에 세웠던 자신의 기록을 깨는 것이다. 고독한 혼자만의 싸움. 개인 종목 선수들은 늘 기록과 싸운다. 그리고 기록을 깨트리려는 자신과 싸워 나간다. 지금 우혁이 그렇다. 오전에 세웠던 그 기록. 이제 그 기록을 세웠던 자신은 또 다른 경쟁자로 삼아야 한다. 그것을 타겟으로 삼아서 물살을 헤치는 것이다.
만약 지미의 부상을 당하는 상황이 없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차례 그런 일을 겪게 되면 소진된 체력과 분산된 집중력이 영향을 끼치게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우승은 우혁의 몫이었지만 새로운 세계 신기록을 세우지는 못했다. 더구나 충분히 감격스러워야 하는 순간에 한국 선수단은 약간 침울해 있다. 부상을 당한 선수가 생기면 이렇게 여파가 있는 것이다.
“가 봐야 하지 않아요?”
“가 봐야지.”
일수의 말. 그리고 영욱의 대답. 병원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선수들은 저마다 우혁의 우승을 축하 해 주었지만 가슴 한 편으로는 지미의 부상이 걱정이 되기도 했다. 비록 싸가지 없는 그였지만 그래도 한 팀의 동료다.
“옛날에 누구 보는 것 같아, 쯧쯧쯧.”
김훈의 말에 우혁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가 말한 대상이 자신이었기에. 어쨌든 그 역시 지미가 걱정이 되었다. 비록 자신에게 한 행위가 짜증이 났지만 넓은 범위에서 보면 그는 한국 수영의 차세대 기대주다. 몸을 망치는 일 없이 잘 커서 나중에라도 자신의 뒤를 이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입원실에 누워 있는 그의 모습. 얼굴은 무표정이다. 그 앞에 팔짱을 끼고 있는 태원. 급하게 온 것이다. 제자의 부상에 걱정스러운 모습이다. 영욱이 오자 인사는 하지만 그 표정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자신의 문병을 왔다면 몸이 불편해 일어날 수는 없을 지라도 얼굴을 돌리는 게 예의였다. 그러나 지미는 그 중에 보기 싫은 사람이 있었기에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는 우혁이 싫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사람. 그를 보면 자격지심이 생겼다.
“네 걱정해서 온 거다. 말이라도 고맙다는 한 마디를 해야지, 뭐 하는 거냐?”
여전히 엄한 태원의 말. 제자가 이런 상황이 되었는데도 꾸지람을 멈추지 않았다. 영욱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냥 두라는 말이다. 그 역시 경험이 있다. 우혁이 이런 일을 당했던 상황을 겪었다.
그 때 그 자신이 몰아붙였다면 우혁은 지금의 훌륭한 선수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선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잘 못한 것을. 그런데 윽박지르고 채근한다면 부상 회복을 위한 여유를 주지 못하고 편협하게 만들 수도 있다.
“잠시만 제가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응?”
갑자기 우혁이 나섰다. 병실에 있는 사람들은 우려의 표정을 짓는다. 그들도 잘 알고 있다. 지미와 그의 관계를. 별로 좋지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싸… 싸우지 마라.”
“걱정 마세요. 동생인 걸요, 뭐.”
태원마저 그에게 부탁을 하고 나간다. 그를 향해 웃음을 짓는 우혁. 그리고 지미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저 자리에서 자신도 누워 있었다. 같은 병원, 같은 의사는 아니지만 햄스트링을 다치고 누워있던 자신의 모습이 그를 보니 머릿속에 잔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섣부른 충고 할 거면 나가요.”
“충고? 뭐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먼저 알려야 할 게 있다.”
그는 지미에게 무언가를 던진다. 금메달이다. 그것을 보고 지미의 눈이 새빨개졌다. 흥분을 한 것이다. 지난번에 우혁에게 예선 탈락한 것을 조롱했던 그였는데, 보란 듯이 금메달을 가져와서 자랑이라도 하는 것인가?
“그거 보여준 이유. 나도 너와 같았다. 그런데 금메달 땄다고, 그 말 하려고 다른 사람 나가게 했다.”
그는 말솜씨가 그리 좋지 못하다. 남을 설득할 자신도, 감동시킬 생각도 없다. 그냥 진심. 그의 진심이 통하게 하고 싶었다.
“뭐, 네가 나를 싫어하는 것 잘 알고 있다. 나도 너 별로야. 하지만 그렇다고 네 부상을 좋아할 생각은 없어. 어쨌든 선수로서 너는 대단한 놈이니까. 내 뒤를 따라오게 하고 싶을 정도로…”
“무슨 소리 하는 거요?”
“말투하고는… 됐다. 예의 그런 거 나도 잘 못했으니까. 하나만 알려줄게. 나 3년 전까지 휠체어 타고 다녔다. 하반신 마비. 그게 내가 가진 장애의 명칭이었다. 뭐 더 긴 이름의 병명이 있었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아.”
“……!”
“그런데 완치가 되고 나서 수영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우승을 한 거다. 재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처음에 나도 너처럼 사람들이 기대 많이 했었다. 그러다가 부상을 입었지. 마음을 바꿔 먹었어. 그 때부터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회상한다. 햄스트링을 다쳐서 병원에 있었던 그 시간을. 그리고 지미에게 간략하게 이야기를 했다. 말솜씨가 뒤죽박죽이라 얽히고설킨 일을 가끔 이해 불가능하게 전달을 했지만, 상대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너보다 더 심했다. 입원하고 나서 며칠 후 다시 경기를 했으니까 말이야. 그 때 나의 싸가지 역시 너보다 더 심했던 것 같아. 그런데 말이야, 지금 있던 내 동료들. 나를 잘 감싸 주었어.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서 마음을 고쳐먹었지. 세상은 뿌린 대로 거두는 것 같아. 지금 내 말이 너한테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뿌려보려고. 내 마음이 너한테 통하는지 아닌지는 한 번 시도해 보려고 그런다.”
그의 긴 이야기가 끝이 났다. 도대체 우혁은 왜 지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일까? 그가 안쓰러워서? 한국 수영계를 이끌고 갈 유망주를 살려보려고? 그렇지 않다. 그런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병실에 누워있는 그를 보니 예전에 자신이 떠올랐고, 갑자기 충동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우혁의 말을 끝까지 듣고 지미는 말이 없었다. 뭔가 느끼는 게 있는지 아닌지는 지켜봐야 한다. 전혀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성격은 고치기 힘든 법이니까.
“나 간다.”
그는 등을 돌렸다. 더 이상의 말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가 나갈 때까지 지미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은 변해 있었다. 그의 원래 목표는 우혁이다. 그를 이기는 게 목표였다. 그리고 그 목표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는 길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은 느꼈다.
“젠장, 저런 이야기를 왜 해가지고…”
그는 항상 적은 적일뿐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의 우혁도 마찬가지였듯이. 그래서 지금 자신에게 과거를 이야기 해주었던 오늘의 금메달리스트를 적으로 생각해야 자신의 실력을 끌어 올릴 수 있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그를 이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휴우…”
혼란스러운 한숨. 그렇게 지미의 이번 대회는 끝이 난다.
============================ 작품 후기 ============================
이 이야기의 끝은 올림픽입니다. 세계 선수권 대회가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200회 내외에서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