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55화 늦게 배운 도둑질
빛나는 며칠 전 있었던 그 일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사실 그녀는 항상 공주처럼 떠받들어지는 존재였다. 비록 남자친구가 있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항상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한도 끝도 없이 높아만 가는 콧대였다. 그런데 임자가 나타난 것이다. 자신이 마음을 주어도 좀처럼 열어주지 않은 상대.
그러던 그가 드디어 자신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도쿄에서 첫 키스. 그 때 그녀는 희망을 품었다. 비록 자신에게 사과를 했지만, 그것은 그가 서툴러서 그렇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일단 자신에게 키스를 했다는 것은 여자로 보고 있다는 증거다. 그가 주장해왔던 친구 사이. 그것의 무용론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 번 반복되면 이제 그것은 그냥 단순한 욕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그냥 밀고 나가든지, 시도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고 나서 중간에 사과라니? 자존심은 완전히 짓뭉개진 상태가 되어 버렸다.
“빛나야, 잠깐 이야기 좀 하자니까.”
그는 자신을 계속 불렀다. 하지만 못 들은 척 했다. 아직까지 그를 대면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을 보면 그 때의 장면이 자꾸 떠오른다. 야릇하면서 비참했던. 얼굴이 다시 화끈거린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결국 우혁은 포기하고 말았다. 보는 시선들이 있다. 다른 선수들. 이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하는 표정들이다. 사실 선수들은 다 알고 있다. 아니 어쩌면 영욱도 대충 파악하고 있을 수 있다. 빛나가 그를 좋아하며 그 역시 약간 마음을 연 상태라는 것을.
“둘이 싸웠어요? 아니, 이런 말은 둘을 연인으로 인정하는 말이지. 취소. 어쨌든 저 쪽이 화가 났는걸요? 그것도 많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시작하는 유카리. 그녀의 목적이기도 하다. 아예 활활 타올라서 둘이 대판 싸우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빛나에게 실망을 하거나 불편해 하는 우혁을 보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정을 한참 모른다. 우혁은 확실히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을 하는 입장이다. 그가 미안하다고 여기면 여겼지 화를 내거나 실망을 할 리가 없다. 아니 예전에 그라면 그럴 수 있다. 지금은 약간 성숙한 상태. 자신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화가 난다면 사과를 하는 쪽이 되었다.
“아까 하던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아요? 계속 해 줄게요.”
결국 뜻하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이제는 다른 쪽으로 떡밥을 던지는 유카리. 그러나 그녀의 귀화 이유는 이제 알고 싶지도 않다. 그의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단지 빛나 뿐이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이다.
“할아버지 할버니가 한국에 같이 가자고 해서요. 그래서 망설이던 중이었어요. 사실 일본 대표 팀 내에서 저는 별로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구요.”
그녀는 그가 듣든 그렇지 않든 계속 지껄여댔다. 그는 빛나가 들어간 여성 라커룸을 계속 보고 있었다. 나오면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려던 중이었다. 따라서 듣고는 있되 건성이었다. 그게 눈에 보일 정도지만 유카리는 상관이 없나 보다. 여전히 계속 주절주절.
“사실 이번 대회 우승이나 하니까 조금 신경 써주는 척 하는 거지, 재일 교포는 찬밥 신세에요. 우리는 우리들 말대로 경계인이라고 불리거든요? 어떤 경우 경기장에 이런 플래카드가 달려 있어요. JAPANESE ONLY. 그럴 때면 사실 마음에 걸려요. 나는 일본인인가?”
“그런 걸 걸어놓는다고? 일본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극우세력이 있거든요. 그들은 반한감정도 높아요. 그래서 매일 시위도 하고 있어요. 어떤 때는 무서워요. 마음이 불편하니 제대로 운동이 되겠어요? 그래서 사실 할머니가 가자고 하니까 고민이 되었죠. 그러던 와중에 대회가 열렸고 그 이전에 연맹 분들을 만났죠.”
“그럼 연맹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구나. 아, 네가 그 때 자유롭게 훈련장을 드나들게 된 이유가 있었군.”
그는 어느새 그녀의 이야기에 몰입이 되었다. 일본의 우경화. 요즘 특히 심하다. 아니 몇 년 전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 때 일본에 있는 후쿠시마 원전 파괴가 있던 그 시기부터 일본의 정부는 국민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보수우익이 정권을 잡았고, 그리고 센카쿠 열도와 독도 등 주변국과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맞아요. 연맹 임원들은 어디든 같아요. 이쪽도 매우 정치적이던 데요?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다 해줄 것처럼. 어쨌든 그래도 일본 수영 연맹에서 저는 약간 찬밥 신세였으니 호감도가 상승했죠. 한국 선수들과 만나게 해달라고 하니까 당연히 허락했고, 그 때 처음으로 오니짱을 만났어요.”
그 다음부터는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 첫 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생각을 하면서. 매력적인 그의 얼굴은 일본에서도 통했다. 소녀의 풋사랑. 일시적인 것이라고 그는 느끼지만 영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다. 그냥 수줍어하며 뒤에 숨어서 짝사랑이나 하지 왜 이렇게 모든 감정을 드러내는 애한테 걸린 것일까?
어쨌든 그 때쯤 빛나가 나왔다. 여자 라커룸에 가까이 있다가는 변태 취급을 받을 것이 뻔했다. 안 그래도 다른 코치들이 그를 주시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다른 코치들이란 남자들이다. 여자 코치들은 그에게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
“빛나야, 잠시만 이야기 좀 해.”
“난 할 이야기 없어.”
이제야 말문이 트였다. 그래도 우혁은 참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녀가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모든 시선이 이 둘에게 쏟아지고 있다. 그래서 그도 그지만 빛나는 점점 감당하기 힘들다 여겨서 그에게 말했다.
“정 할 말이 있으면 오늘 훈련이 끝난 다음에 이야기 하던지. 사람들이 다 보고 있어.”
“으… 응. 알았어.”
어쨌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이렇게까지 말을 했는데 그냥 가지는 않을 것이다. 최소한 자신의 전화를 무시하지 않을 터이니 그는 체력 훈련실로 방향을 바꿨다. 그런데 2층에 있는 그곳을 여전히 따라오는 유카리.
“뭐지? 너 이렇게 맘대로 훈련을 해도 돼?”
“상관없을 걸요? 배영을 가르쳐 줄 코치를 구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를 가르칠 만한 사람이 없어서 해외에서 찾고 있다던 데요…”
“잘 났군. 너 때문에 수영 예산이 또 줄겠네. 다른 선수들 투자할 돈이 네게 갈 테니.”
“엇, 그래요? 그럼 거절할까요? 혼자서 한다고 할까요?”
“알 바 아니야. 그럼 나 훈련할 테니 말 시키지 말아줘.”
러닝머신을 누르고 달리기 시작하는 우혁. 체력 훈련의 시작이다. 호흡이 길다고 체력이 무조건 강한 게 아니다. 어쩌면 그가 수영을 하게 된 필연적인 것이 바로 이 호흡일 지언데, 그 장점을 더 발휘하려면 지구력을 더 길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번에도 1500미터에서 마지막에 역전을 당할 뻔했다.
그 때 자신이 우승을 했지만 잘 실감은 나지 않았다. 아시아에서 장치앙린이 이 종목 최고 기록 보유자인데, 그가 없는 기회를 그나마 잘 살린 셈이다. 그렇다고 다음에 그가 참가한 대회에서 그 자리를 내줄 생각은 없다. 그리고 어차피 그의 목표는 세계 1위다. 그것도 전 종목. 원대한 꿈이지만 못 이룰 것은 없다. 이번에 그가 우승하리라고 예측한 사람도 없지 않았던가?
옆에서는 유카리가 러닝머신을 하고 있다. 그녀가 뛸 때마다 출렁거리는 가슴. 미래만큼은 아니지만 글래머나. 아니 성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녀는 아직 성인이 아니니 더 커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미래가 자유형보다 배영을 선택했다면 더 좋았을 걸 그랬다. 그녀도 큰 가슴을 가지고 있어 스피드를 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프리스타일이었다. 지금 옆에서 뛰고 있는 여인의 출렁이는 가슴을 보면 그런 상념에 젖는다.
그런데 출렁이는 가슴을 본다고? 그는 갑자기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눈이 그쪽으로 가게 된 것일까? 혹시 유카리가 눈치 채지는 않았을까? 아직 미성년자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아야 했다.
이게 다 욕구불만 때문이다. 그는 요즘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 그것에 심취해 있다. 자꾸 떠오르는 미래의 가슴. 그리고 빛나의 브래지어 찬 가슴. 심지어 예전에 보았던 인어의 가슴도 떠올랐다. 스스로가 변태가 되가는 것 같아서 죄책감을 느꼈다. 남자로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동년배 친구와 이런 대화도 없이 자라나서 생겨난 심정이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그 역시 남자였고, 성욕이 충만한 스무 살이라는 것. 그래서 문제다. 좀 충동적인 그가 잘 참아내지 못하고 사고를 칠까 봐 본인도 마음을 졸이고 있는 것이다. 잘 참을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늦게 배운 도둑질. 우혁을 보면 딱 그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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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방향성을 결정하기 위해서 비축분을 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