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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95화 순빈의 충고

인어의 음식. 화기가 닿지 않은 음식을 섭취한다. 바다 속에서는 플랑크톤을 먹고 살았을 수도 있다. 그녀의 언어가 있기에 정확하게 무엇을 먹고 살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야채는 잘 먹는다.

하지만 세실리아가 그렇게 먹는다고 우혁도 야채만을 먹고 살 수는 없다. 아침부터 온 아주머니. 그의 식단을 다시 책임지기 위해 순빈이 미리 연락을 해둔 것이다. 누군가 들어오면 그녀는 호기심의 눈빛을 보낸다. 혹시라도 그의 여자 친구가 아닐지 살펴보는 것이다.

“이쪽은 독일에서 온 세실리아에요. 인사해. 이 분은 나에게 항상 고마운 식사를 해주시는 아주머니.”

“아이고, 영화배우가 따로 없네. 애인이야? 어메, 이뻐라.”

“안녕하세요.”

아주머니는 깜짝 놀란다. 단연코 그가 봤던 여자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미의 결집체이다. 입까지 벌린 그녀의 모습. 반면 세실리아는 이미 그에게 들었던 사람 중에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속으로 안심을 한다. 어차피 그의 인간관계는 매우 협소하다. 그러니 주변 사람 중 벌써 둘이나 알게 되었다는 것은 부모님 빼고 3분의 1을 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녀의 인사법. 허리를 90도로 꺾고 인사를 한다. 한국 사람이 예의를 갖추어서 하는 배꼽 인사. 그가 심혈을 기울여 가르쳤다. 본인은 썩 그렇게 예의 바르지 않으면서 그녀는 잘 가르쳐 놓았다. 아주머니는 그녀의 인사를 받고 흡족해 했다. 서양인이 이렇게 인사를 배워서 하는 게 좋아 보이는 것이다.

“애인이 한국 사람처럼 인사도 잘하네. 이쁘고, 예의도 바르고, 우혁이는 좋겠어.”

애인이라는 말. 그것을 부정하려 하다가 설명할 말이 없어 그냥 가만히 있었다. 뭐라고 말할 텐가? 가족과 같은 사람? 피부색이 다른데? 그냥 이렇게 알아도 상관없는 사람이다.

“세실리아는 야채만 먹거든요? 앞으로 그렇게 준비해주시면 되요.”

“오라, 채식 주의자구먼. 알았어. 소스는?”

“필요 없어요.”

“완전 생야채로만?”

“네, 그걸 더 좋아해요.”

아무리 야채만 먹는 사람이라도 소스를 뿌려먹는 게 일반적인데 아무것도 뿌려 먹지 않는다는 것을 듣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 어쨌든 그의 주문에 따라 식사준비를 하고 그들 역시 그녀가 정성들여 만들어 놓은 식사를 마친 후 그는 영욱과 통화를 했다.

- 뭐야, 언제 귀국했어? 깜짝 놀랐잖아.

“어제 귀국했어요. 완쾌되었고 훈련해도 된다고 하니 나가 보려고 하는데요.”

- 이렇게 빨리? 며칠 쉬었다가 나와.

수화기 너머 저 편의 목소리에는 반가움과 걱정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가 생각보다 빨리 귀국했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지난번과 같이 또 몸도 회복되지 않았는데 서두르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는 음성이 가득 담겨 있다.

“그럴까요? 그럼 감독님이 한 번 몸 상태를 체크하고 싶을 때 불러주세요.”

- 그…래. 알았어.

“그럼 끊습니다.”

영욱은 그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빨리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의외였나 보다. 중간에 말을 한차례 더듬은 것은 그것을 의미했다.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게 정확한 말이다.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것. 그래서 그것이 그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조금 있으니까 순빈이 왔다. 그는 아직도 세실리아가 인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판타지 세계에나 존재할 인어. 어린 시절 동화 속에서 읽었던 그 생명체가 이 집안에 있다는 것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AK 스포츠 대표가 한 번 보자고 하더라.”

“네? 왜요? 실장이 아니라 대표가요?”

“응. 아마도 계약 기간 때문에 그런 것 같아. 너 계약이 끝난 것은 알지? 끝난 지 얼마 안 됐거든. 다른 소속사를 찾거나 아니면 그냥 소속사 없이 지내야 하는데, 어떻게 할래?”

“형 의견은 어때요?”

“소속사가 있는 게 아무래도 낫지. S 생명 일도 그 쪽에서 추진해 주었고, 광고 같은 실질적인 수입도 다 연결이 AK 스포츠를 통해서 오고 있어. 내가 사실 네 개인 매니저라는 게 창피한데, 하는 일 없이 밥만 축내고 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요. 형이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데요. 일단 알았어요. 언제쯤 만나면 될까요?”

“아마 연락하면 시간은 그쪽에서 잡아서 다시 연락해 줄 거야. 네 상품성 때문에 어쩌면 오늘이라도 보자고 할 것 같은데…”

그의 말이 맞았다. 오늘 보자고 한 AK 대표. 그래서 그들은 집을 나서야 했다. 이때가 앞으로 고민인 게 세실리아를 같이 데리고 나갈 것인지 집에 두어야 할지에 대한 것이다. 당연히 항상 데리고 갈 수가 없다. 그리고 그가 워낙 유명인사라서 같이 동반하면 언론에 알려질 게 뻔했다.

“세실리아, 나 일이 있어서 나갔다 와야 해. 집에 혼자 있을 수 있지?”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미소까지 보여준다. 그것을 보고 순빈은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인어의 미소는 그 자체로 마력이 있나 보다.

“자, TV를 틀어 줄게. 말 배우기도 좋고 아마도 재미있을 거야. 조작하는 방법을 설명해 줄게.”

그는 리모컨 조작 방법을 그녀에게 설명했다. 버튼을 누르는 방식. 별로 어려울 게 없지만 문명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그녀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게 알려주고 나서 그는 다시 당부를 하고 문을 나섰다.

“절대, 아무에게도 문은 열어주지 마. 알았지?”

“응. 우혁, 잘 갔다 와.”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나온 그들. 차 속에서 순빈은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다시 한 번 그와의 대화를 통해 극복하려고 애를 썼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해. 혹시 어제 이상한 것을 다리에 덮어 쓰고 그런 것 아니야?”

“아니야.”

“왜 영화 같은 데서 특수 분장 하면 그렇게 되잖아.”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형을 그렇게 까지 속여서 뭘 얻는데?”

“그… 그렇지?”

맞는 말이다. 아마도 순빈이 현실감을 찾게 될 때까지는 시간이 걸려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히 더 이상 그와 세실리아를 정신병자 취급하지는 않을 것 같다. 또한 그의 고민에 대해 의논의 상대도 되 줄 수 있다는 게 그에게 인어의 존재를 밝힌 한 가지 이유이다.

“미래에게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이야.”

“그러게. 내가 너라도 고민이 될 것 같아. 뭐라고 조언을 못 해 주겠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사실대로?”

“그녀가 인어고, 나를 도왔는데 종족을 버리고 왔기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태라는 것.”

그는 이미 순빈이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 한 상태다. 이것만 보아도 그를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어쩌면 자신과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그가 마음에 들었을 지도 몰랐다. 원만한 인간관계. 지극히 평범한 성격. 선량하고 한 번 정을 준 사람은 끝까지 믿어주는 뚝심.

“그게 다야?”

“응?”

“그녀가 인어라서, 그리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태라 그녀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이유. 그게 다냐고? 네 맘은 미래인데 그녀를 가족과 같이 생각한다는 것. 그런 정도의 이유를 미래에게 말해서 뭘 얻을 건데?”

“…….”

“말하려면 솔직히 말하고, 그렇지 않으려면 철저히 감춰. 어떤 것을 선택하든 난 최선을 다해서 도울게.”

정면을 보고 운전하며 말하는 순빈. 우혁이 생각을 하도록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그는 사실 망설이고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 그것이 핑계가 되어 미래에게 말을 하고 선택을 그녀에게 넘기려고 했던 것이다. 비겁한 짓이었다.

최소한 자신이 저지른 일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사실 그는 그렇게 살아오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하반신 마비가 회복된 후 말이다. 모든 자유를 맛보았으니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당당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의 성격이 모나고 고집쟁이이기는 해도 항상 남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당당해졌다. 장애를 벗어난 다음 더욱 그랬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이 잦았을 지라도 자신의 의지와 뜻대로 행동을 했었는데…

지금은 뭔가 감추기에 급급했다. 세실리아 탓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할 필요 없이 자신이 솔직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자신의 현재 여자 친구에게 당당히 밝히는 게 나을 거라는 마음. 그것을 순빈이는 충고하고 지적하는 중이다.

“형 말이 맞아. 내가 잘 못 생각했어. 당당하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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