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56화 우정으로 남다
오늘 순빈이에게 먼저 퇴근하라고 말을 했다. 빛나와 같이 귀가하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훈련 스케줄이 끝나고 영욱이 잠시 우혁이를 불렀을 때 그는 그녀가 먼저 갈까봐 불안했다.
“우혁아, 빛나에게도 이야기를 했는데 내부 규칙은 없지만 금기는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네, 말씀하십시오.”
“절대 선수들끼리 연애를 하는 것은 안 된다.”
“…….”
“이해 못 하는 표정이구나. 그럼 이렇게 말을 하마. 선수들끼리 연애를 하는 것을 절대 들키면 안 된다는 것으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말뜻을 알아들었다. 안 걸리게 조심하라는 말. 그런데 그가 왜 이런 말을 할까? 어쩌면 그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빛나와 우혁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사실 못 느낄 리가 없다. 더군다나 아까 그가 잠시 부재중일 때 다른 코치들이 말을 했다. 이들 둘 사이가 심각해 보인다는.
그래서 부른 것이다. 자칫하면 기강이 해이해진다. 만약 선수들끼리의 연애가 자유롭다고 상상해 보아라. 조금만 꾸짖어도 여자 친구, 또는 자신의 남자 친구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려고 온갖 반항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금세 확산된다. 동년배끼리의 연애. 남이 하면 부러우니 소집단 내의 다른 이성에게 눈이 가는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주의하겠습니다.”
“좋다. 이해해 줘서 고맙구나. 그럼 가 봐라.”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 때문에 영욱이 마음을 쓰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앞으로 좀 더 신중하리라 생각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가 좋지 않은 표정을 지은 것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 때문이다.
“음, 이제 어떻게 하나… 지원이 줄어든다니… 도대체 유카리 귀화를 왜 시킨 거지? 괜히 미안하게 되었네.”
그가 오전에 자리를 비웠던 이유. 연맹에 불려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년부터 상비군을 상시 운영할 수 없다는 최종 결론을 그에게 통보했다. 그렇게 되면서 그의 연봉도 줄어들게 된다. 아무래도 대회를 앞두고 훈련할 때만 발생되는 금액만 지불된다고 한다. 즉, 임시직과 같은 성격을 띠게 되어 버렸다.
아무래도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과 같은 큰 규모의 대회에서 박태원이 그랬던 것처럼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않으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카리를 귀화시킨 연맹은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까? 그녀에게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약속한 것 같은데 말이다. 당장 그녀가 자신을 훈련시킬 코치를 찾는 것을 보고 그는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을 한 상태였다.
“휴우…”
한숨만 나온다. 도무지 해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우혁이 도쿄에서 제안한 게 자꾸 떠오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사람인 이상 그 제안을 이제 심각하게 고민을 해 봐야 한다. 방금도 그에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이성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여서 충고는 해야겠기에 부드럽게 타이른 것이다.
한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빛나의 차에 탐승을 하는 우혁. 그는 오늘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녀를 달래주기로. 하지만 생각처럼 일이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갑자기 그들을 향해 저 멀리서 달려오는 소녀 하나가 있었으니.
“잠까안!”
유카리였다. 그녀는 뒷좌석의 문을 잽싸게 열고 들어왔다. 우혁과 빛나는 순간적으로 일어난 이 상황에 어이가 없어 했다. 특히 그는 그녀가 분위기를 다 깬다고 생각하며 화를 내려고 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쓰!”
그런데 빛나에게 하는 말. 고맙단다. 태워줘서 고맙다는 말인가? 어쨌든 나름 뻔뻔한 그녀가 너무 어이없어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저 전학 수속 때문에 학교에 가야 하는데, 태워주실 거죠? 언니?”
약간 어눌하지만 한국말이다. 아까 수영장에서는 그렇게 일본어로 그의 귀에 조잘거리더니. 그리고 웬 친한 척인가? 만약 그녀가 우혁을 좋아한다면 빛나는 그녀의 연적이 되는 모양새인데 말이다.
“휴우, 알았어. 어디로 가면 돼.”
“음. 까먹었다. 학교 이름이 뭐였지?”
“이봐, 빨리 말해. 안 그러면 버리고 간다.”
약간 분노가 섞인 말로 우혁이 그녀를 압박했다. 의외로 빛나는 그녀를 태우려고 했다. 이런 그녀의 태도도 이상했다. 유카리가 그를 쫓아다니며 하루 종일 귀찮게 했는데, 화가 나야 정상 아닌가?
“이름을 까먹었네요. 아아, 맞다. 장일수. 아까 코치님이 장일수가 다니는 고등학교라고 말한 것은 기억나요.”
“아, 그래? 알았어. 동석고등학교를 말하는 거구나. 여기서 멀지 않으니 금방일 거야.”
친절한 태도. 그녀가 이렇게 나오니 우혁은 살짝 불안했다. 도쿄에서는 이러지 않았다. 늘 유카리를 경계했고, 그녀에게 자주 분노를 표출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변한 그녀의 태도. 뭔가 있다.
“자, 다 왔어.”
“고마워요, 고마워요. 아주 고맙스므니다. 그런데 둘이 어디까지 갔어요?”
뜬금없는 질문. 다 왔다는 말은 내리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그런데 그녀는 내리지도 않고 이상한 질문을 해댄다.
“으악, 너 무슨 질문이 그래? 미성년자가 아주 그냥…”
“요즘 이 나이 다 알 것 아는 나이에요. 일본에서 내 친구는 남자랑 자기도 하는데…”
“헛, 당장 안 내려?”
“알았어요, 알았어. 맨날 나한테만 화를 내네요. 어쨌든 언니 한 2년만 기다려주면 안 돼요? 그 때 되면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룰 수 있는데. 지금은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빨리 안 내리면 내가 잡아끌어 내린다.”
“베에…”
결국은 내린다. 하지만 혀를 잔뜩 내밀고 눈을 크게 하는 표정. 마치 원숭이를 닮은 그 얼굴 모양으로 그를 한 번 놀려주고 나간다. 그게 아주 못생긴 여자가 하면 추해 보이겠지만 나름 예쁜 얼굴로 그런 모양을 만드니 귀엽다. 물론 빛나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우혁이의 눈에 그렇다는 말이다.
“요즘 애들 참 이상하네. 그지?”
그녀를 내려주고 집으로 가는 방향. 어색함을 깨트리기 위해 그가 말을 붙였다. 하지만 대답이 없는 빛나. 그는 다시 생각을 해야 했다. 어떤 말을 해야 그녀의 상처 난 가슴을 위로할지에 대해서.
‘그 때 그 말은 내 본의가 아니었어. 아냐, 아냐. 음. 사실 나도 네가 좋아졌어. 좀 간지럽네…’
혼자만의 생각. 한 마디를 하려해도 그는 가끔 이렇게 생각을 한다. 요즘 들어 생긴 버릇이다. 좀 충동적인 그의 성격. 잠시 참고 생각하며 말을 하라고 순빈이가 조언을 해 주었다. 특히 높은 사람 앞에서 자주 그런 성향을 내비치니 언젠가는 크게 손해를 볼 것 같았다.
“많이 생각을 해 봤어.”
거의 집에 다 도착했을 때였다. 차를 멈추고 오히려 빛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녀는 우혁을 바라보지 않고 운전대를 잡은 채 정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마치 그를 보면 뭔가 흔들리는 마음 때문에 결심한 바를 말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태도.
“며칠 잠도 잘 못 잤고. 그런데 네 말이 맞았던 것 같아. 우리 친구사이로 계속 지내자는 것.”
“아, 그건…”
“알아. 네 뜻. 넌 친구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랬겠지.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어. 그러나 이제 확실히 이해할 것 같아. 단지 내 마음이 문제일 뿐. 감정이 아닌 머리로 이해를 하려 하는데 많이 너에게 기울었으니 그게 잘되겠어? 그래도 이제는 네 말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내가 상처를 계속 입을 것 같아. 맞아. 우리 친구로 남자. 그게 정답인 것 같으니.”
“그… 그렇겠지?”
물론 그는 진심이 아니다. 오늘 그는 많은 것을 각오했다. 이제 빛나가 여자로 보였고, 그녀를 자신의 여자 친구로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았다. 미래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연예인과 사귄다는 것은 서로 부담이다.
“그동안 내가 미안했어. 이제 그런 일 다시는 없을 거야.”
“아… 아냐. 내가…”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는 그만 멈추고 말았다. 지금 그녀와의 어색한 사이를 만든 단어였다. 이제 그 말을 뱉을 때에는 이렇게 조심스러워진다.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다 알아. 어쨌든 서로 안 본다는 것은 아니잖아. 우리 좋은 친구로 지낼 거지?”
“으…응. 당연하지. 그래. 좋은 친구. 알았어.”
그녀를 보내면서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느라고 잠시 잊고 있었다. 자신의 집이 오늘 이사를 갔다는 것을. 그녀도 그의 이사 소식을 잘 모르고 있다.
“뭐, 근처잖아. 좀 걷자.”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그는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하고 그렇게 걸어가고 있다. 뒷모습이 쓸쓸하다. 외로움이 느껴지는 등. 마치 실연을 당한 것 같은 모습.
그런데 늘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화두가 있다. 과연 남녀 사이에 우정이 가능할까? 이들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앞으로의 모습을 지켜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