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98화 여자 친구 할래
훈련은 순조롭게 이루어 졌다. 그 어느 때보다 우혁은 영욱의 지시에 잘 따랐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심지어 가르치는 사람이 불안해 할 정도다. 그가 너무 훈련을 해도 불안하고 자신의 지시에 잘 따라도 불안하니 어느 장단에 맞출까?
다 그가 뿌려 놓은 씨앗 탓이다. 본질적으로 그의 성격이 바뀐 것은 아니다. 다만 보호할 사람이 생겼다는 책임감. 그것이 컸다. 전 주 토요일에 마음의 교통정리까지 끝났다. 미래에 대한 죄책감도 한 몫 했다. 앞으로 사람들 마음에 상처를 주고 살지 말자는 다짐까지 했다.
“기록 경신! 내가 이 생활 이십 오년이 넘었다. 그런데 너처럼 빠른 놈은 처음이다. 이건 재능보다는 노력인 것 같기도 하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또 다르구나. 진짜 수영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
칭찬. 영욱은 그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찬사를 베풀어주었다. 우혁은 그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는 표정도, 그렇다고 당연한 말을 들었다는 얼굴도 아니게 아주 평범한 기색이다.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다. 사람들의 말에 마음이 자주 흔들리지 않도록 평상시에도 가라앉은 마음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오늘 훈련은 이렇게 끝내자. 항상 몸조심 해.”
“네.”
변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단답형 대답. 그리고 자주 미소를 짓지는 않는다는 것. 이게 바로 최우혁의 본 모습이다. 또 있다. 수영장을 지나갈 때 그를 보는 선망의 시선들. 그 중에는 아가씨들도 있고 아줌마들도 있다. 그러나 모든 시선을 무시하고 지나간다.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오히려 순빈이 옆에서 이런 말까지 할 정도다.
“인기 관리 좀 들어가야지. 손 좀 흔들어줘.”
“그건 대회 때나 그렇게 하면 되죠. 평소에 이러면 달라붙어요. 그럼 떼어 내기 귀찮고요.”
“이… 부러운 놈. 너무 부러워서 생명에 위협을 가하고 싶다.”
사실이다. 가희에게 매번 퇴짜 놓고, 빛나는 그를 좋아하게 마음으로 묶어 둔 뒤 친구로 남았다. 사실상 친구보다는 그를 짝사랑하는 주변 여자다. 스캔들도 한 번 터져서 아마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에는 꽤 오랜 기간이 걸릴 것 같다. 그것도 장담할 수는 없다.
미래에게는 결별 선언을 했다. 요즘 그녀는 만인의 연인이다. 많은 남성 팬들을 동원하고 있으며 드라마 섭외 순위 1위로 떠올랐다. 그런 그녀와 연인관계를 지속하더니 지난주에 이별을 하고 왔단다. 자세하게 물었더니 그 역시 자세할 것도 없이 쿨하게 헤어졌단다. 친구로 남게 되었다고. 믿을 수 없지만 사실인 것 같다. 거짓을 말할 성격이 아니다, 우혁은.
마지막으로 여신과 함께 살고 있다. 세실리아. 도무지 그녀의 미모를 어디 한 군데 폄훼하고 싶어도 그럴 만한 곳이 없다. 대체적으로 얼굴이 예쁘면 몸매가 좀 흠이 있고, 몸매가 착하면 성격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아니다. 그가 보기에 무결점. 그래서 때로는 그녀를 본 날 여자 친구는 절대 만나지 않는다. 잘못하면 속속들이 드러나는 자신의 여자친구 결점에 이별을 선언할 것 같아서.
“다 왔다. 열심히 연습하고 와라. 끝나면 전화 해.”
“네. 고마워요, 형.”
그가 내려다 준 곳. 운전면허 학원이다. 면허증을 따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학원비가 무료란다. 협찬이나 마찬가지다. 사진 한 장 걸어 놓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곳 학원은 요즘 대박을 치고 있다. 많은 여자들이 앞 다투어 운전면허를 신청했으니 말이다. 다른 학원으로 갈 발걸음을 최우혁 한명으로 다 돌려놓았다. 당연히 돈을 안 받을 만 했다.
이것도 순빈의 입장에서는 부러운 일이다. 그가 한다고 하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다. 아마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일도 사진 한 장 찍어서 매장에 게시한다고 하면 식사비와 커피 값이 면제일 것이다. 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지갑 있는 곳으로 떨어져 횡재를 한다더니 딱 그가 그런 것 같았다.
물론 사람은 항상 역지사지가 되어야 한다. 우혁은 나름 사람들 많은 곳에서 적응하느라 요즘 힘이 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일. 그가 먼저 경험하고 세실리아에게 들려주어야 한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사람들 사이에 있어보았다. 아직까지 상대하기는 힘들다. 이 사람들을. 운전면허 학원에서 자신을 보는 많은 사람들. 그들에게 일일이 웃어주는 것도 눈을 맞춰 주는 것도 하지 못한다.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그래도 노력하고 있다. 저녁에 들어가 세실리아를 보고 인간 세상에 있는 일을 설명해주는 시간. 자신이 경험한 일에 대해서만 할 수 있다. 그는 학창생활도 겪지 못했다. 군대도 가보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은 그녀에게 경험해 본 일을 말할 때 꽤 조심스럽다. 잘못하면 부정적인 일을 설명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인간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우혁, 여자 친구는 언제 또 만나러 가?”
“응? 그건 무슨 소리야?”
“나도 보고 싶어. 우혁 여자 친구.”
오늘은 그녀가 갑자기 미래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중이었다. 경험을 설명하는 거라서 그는 독일에서 한국으로 와서 처음 만난 두 여자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그 때 눈빛을 빛내던 세실리아. 그녀는 아직 둘의 결별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제 그녀는 나의 여자 친구가 아니야.”
“응?”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항상 지속되지는 않아. 만나서 사랑하고 끝까지 가는 경우도 있지만 헤어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인어의 기준에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인간 세상이든 인어 세상이든 간에 그녀가 경험해 본 일이 아니었다. 만나서 사랑하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는가? 왜 헤어질까?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왜?”
“왜 헤어졌냐고?”
“응. 왜 헤어졌지?”
약간 서툴지만 이제 많은 표현을 해낸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있는 그녀의 한국어 실력.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헤어져. 서로 성격상 맞지 않는 이유도 있고, 환경이 달라서 그러는 경우도 있어.”
“안 돼. 이해.”
이렇게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특히 인간관계를 설명하는 일은 꽤나 어렵다. 적절한 예를 들어야 하는데 그녀의 경험적인 측면을 도저히 측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실리아는 레지나를 떠나 왔지?”
끄덕끄덕.
“아마 인어로 태어난 것은 세실리아의 운명이었겠지만, 인어의 여왕을 떠나온 것은 선택일 거야. 사람도 그래. 만남은 운명이지만 헤어짐은 선택인 것이지. 난 그녀와 헤어지는 것을 선택했어.”
우혁은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그녀를 향해 마음속으로 하나 더 첨언했다.
‘너를 사랑하게 되어서, 그 운명 같은 만남 때문에…’
그 말을 해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가끔 보면 그는 감정을 전달하는 것에 너무 미숙하다. 본질적으로 너무 감정표현을 아낀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불안감을 유도하는 행위나 다름 없다. 그래서 세실리아는 물을 수밖에 없다. 그녀는 그와 반대다. 스스럼없이 감정 표현을 한다. 아마 말을 더 배우고 익힌다면 더 많은 표현으로 자신의 애정을 나타낼 것이다.
“그럼 나중에 나랑도 헤어질 거야?”
“그럴 리가?”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것은 부정의 의미다. 그리고 나온 달콤한 말.
“난 평생 네 곁에 있을 거야.”
“가족 싫어. 나, 여자 친구 할래.”
“가족…”
‘이 아니라, 네 남자 친구 할게.’라는 말을 하려고 할 찰나. 결정적 순간에 방해하는 것은 문명의 이기다. 핸드폰.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이것은 인간 세상에서 어쩌면 큰 훼방꾼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도 그렇다. 그가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이 순간. 벨은 울리고 좀 더 늦게 받아도 좋을 그 타이밍에 그는 결국 전화를 선택하고 말았다. 받아야만 하는 사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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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