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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96화 내가 너의 친구가 되어줄게

계약은 무난하게 이루어졌다. 3년의 계약기간. 아마도 올림픽 이후까지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현재 한국에서는 수영붐이 일고 있다. 잇단 실업팀의 창단. S 생명의 성공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돈암동 국제 수영장에서 벌어진 마스터즈 수영 대회와 동아 수영 대회도 흥행에 성공했다. 이제 단순히 우혁이 없다고 해도 저변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지금까지는 오빠 부대가 주를 이루었다면 이제는 빛나와 가희가 이끄는 삼촌 부대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가희는 점점 그 터질 듯한 몸매로 남자들의 시선을 잔뜩 끌고 있다. 섹시함과 스포츠 스타와의 관계. 그것이 절정에 이르면 이렇게 흥행으로 결론이 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AK 스포츠는 그래서 그녀와도 계약을 성사 시켰다. 벌써 광고도 몇 개나 찍었다.

물론 이런 일은 다 실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단지 얼굴만 예쁘고 몸매가 좋아서 인기를 끈다면 그것은 단발성이다. 대중들은 금세 질리고 새로운 것을 찾는다. 그런데 스포츠를 잘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실력과 인기가 상호 보완을 이루며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것이다.

한국에 귀국해서 3일이 지났을 때 몸 상태를 확인해 보자며 영욱이 그를 불렀다. 그런데 새로운 수영장에는 선수들이 없었다. 단지 일반인들이 수영을 배우러 많이 찾았다. 수영장에서 기획한 수영교실. 전직 수영 선수들이 새로운 꿈나무를 찾는다는 이름하에 많은 유소년들을 받아들여 가르친다고 한다. 그들은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왔고, 그들만 수영하라기 뭐 해서 결국 부모님들 역시 이참에 수영을 배우고 있다.

이게 큰 수입이 되었다. 비용이 저렴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소한 이렇게 벌어들인 것으로 한 달 운영비는 채울 것 같았다. 더구나 대회가 열리면 흥행이 보장되어 관중 수입 또한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적자 운영을 각오했지만 점점 그 적자 폭이 줄어들고 있었다. 어차피 그룹 이미지 차원에서 만든 실업팀이었는데, 대 성공이었다.

“다들 어디 갔어요?”

“응, 요즘 태릉선수촌에서 훈련들을 받고 있어.”

태형광 감독의 요청. 고개를 숙이고 부탁을 한 것을 들어준 것도 있지만 아시안 게임을 백일 앞두고 있는 시점이다. 합숙 훈련으로 선수들의 실력을 극대화 한다는 대의명분에 그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대표 팀 코치로 합류를 했다. 오늘은 잠시 우혁의 몸을 확인한다는 이유로 나온 것이다.

“어떻게 한 바퀴 돌아볼까요?”

“물속이 그리웠구나? 하하하. 준비 운동 좀 하고, 그리고 너무 무리하면 안 된다는 것 알지?”

물살을 가르는 그의 팔. 이전 보다 더 시원시원해진 것 같았다.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크루즈에서도 팔굽혀 펴기와 윗몸 일으키기 등으로 몸을 다졌다. 간단한 운동이지만 그로서는 재활훈련이나 마찬가지라 오히려 이런 가벼운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물속에서 수영을 한다. 오랜만에 맛보는 이 기분. 그런데 예전하고는 달랐다. 예전에는 남에게 보여주려고, 타인의 편견을 깨트려주기 위해서 이 물살을 갈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냥 좋다. 이것을 그동안 못해서 답답한 마음이었는데 속이 후련해졌다.

‘그래 이 맛이다. 모든 것을 다 잊게 해주는…’

그렇다. 물살을 헤치고 턴을 하며 잠영을 하는 가운데 그는 느꼈다. 경쟁도 좋지만 단지 수영을 할 수 있는 몸을 가지게 된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 고마움의 정점에는 세실리아가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수영을 하다가 누군가가 보고 싶다는 생각. 빛나에게 약간 마음이 기울었을 때도, 그리고 미래와 사귀고 있을 때도 이런 일은 없었다. 고마움이 섞여서 나온 감정일까? 그건 알 수 없다. 본인도 모르기에.

“더 유연해진 것 같은데? 보통 부상당한 후 수영 처음하면 좀 딱딱한데… 좋아, 합격이다.”

영욱의 말을 듣고 그는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스승. 한 때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만으로 부상의 길을 걸었었다. 후회가 되었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성격이었는데 후회가 되다니 점점 변하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태릉선수촌에 입소는 뒤로 미뤄 두마. 아직 부상 회복중이라고 말을 할 테니 훈련은 여기서 하도록 하자.”

그는 느꼈다. 영욱이 자신을 배려해주고 있다는 것을. 그 역시 들은 말이 있다. 태릉선수촌 합숙 훈련. 구슬 같은 땀방울을 빼며 메달을 향해 많은 선수들이 그 곳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의 성격. 일단 모가 났으니 이런 합숙이 어울릴 리가 없다. 개인 공간이 있겠지만 그래도 아마 다른 이들과 부딪히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리라.

일단 그의 배려도 고맙지만 세실리아를 두고 입소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맙다. 그리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느꼈다. 자신에게 이런 배려를 베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폐가 되어가고 있다. 나중에라도 갚으면 되지만 더 좋은 것을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다음 날부터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이 되었다. 이제 그는 무리하지 않는다. 적당히 훈련하고 적당히 휴식을 취한다. 그를 위한 프로그램을 영욱이 짜 왔다. 그것에 따른 훈련. 그는 맞추어 갔다.

사람들한테 맞춘다는 것. 충돌 없이 지낸다는 것은 사실 쉬운 게 아니다. 특히 스포츠를 하는 사람들은 일반인보다 승부욕이 강하다. 피지컬도 만만치 않으니 비단 우혁이 아니라도 잦은 충돌이 일어나는 게 현실이다.

그래도 그가 더 심했긴 했다. 말을 붙여도 웬만해서는 대답이 없고 대답을 한다고 하더라도 차갑고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당연히 그의 적에 친구보다 적이 더 늘어갔던 것. 거기다가 얼굴까지 잘생기니 여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적들은 그를 시기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왜 몰랐겠는가? 신경 쓰기 싫었을 뿐이다. 그리고 불편하기도 했다.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꼭 좋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사생활이 존중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방어막을 높게 더 친 것이다. 아무도 못 올라오도록. 만약 올라온다면 그를 존중해 주기로 했다. 그에게 자격을 부여했다. 자신의 친구로.

저녁에 세실리아에게 친구의 의미를 가르치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녀에게 전달한 친구의 의미. 벽을 높게 쌓고 그것을 넘어와서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만이 친구라고 알려주지는 못한다. 그녀가 그렇게 살까봐. 인간 세상에서 적응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순빈이나 미래, 일수와 같은 성격이 훨씬 나았다. 생각해 보니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에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들의 성격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그럼 나와 크로니의 관계?”

“크로니? 그게 누구야? 인어 친구야?”

“응, 그 때…”

세실리아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크로니는 그 때 종족 번식을 위해 우혁을 강제로 범했던 인어다. 그녀와는 친한 사이였다. 종족 수가 총 열 여덟이니 누구와 누가 더 친하고, 덜 친하다고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특히 그녀는 자신의 단짝이었다. 그래서 그녀를 습격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끔 느낀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였지만 그래도 그녀가 죽기라도 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인어에게 있는 치유능력. 아마도 누군가가 그녀를 발견해서 잘 보살폈을 것이다. 그것보다는 그녀가 자신에게 들었을 배신감에 더 미안함을 느꼈다. 남자에 빠져서 종족을 배신하고 친구를 해한 세실리아. 아마도 많이 원망을 하고 있으리라.

우혁은 나름대로 그녀가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져 왔다. 그리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종족 번식을 위해서 인어가 그렇게 인간과 성행위를 한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바로 그런 데 이용이 되다가 결국은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욱 고마웠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벌써 두 번이나 그의 목숨을 살려준 것이 아닌가? 그것도 종족을 버리고. 그 안에는 가족과 친구가 있었을 텐데.

“내가 너의 친구가 되 줄게. 그리고 친구도 많이 만들어 줄게.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 세실리아.”

어느새 눈물까지 흘리는 인어 아가씨. 그녀의 손을 잡고 따뜻하게 말을 해주는 우혁. 역시 변화의 시작은 바로 그녀 때문이었다.

이 둘의 앞날. 과연 우혁이 말한 대로 친구가 많아지고 행복한 나날이 될까? 그것은 그의 노력으로 이루어야 할 일이다. 그래서 무겁다. 책임감이 말이다. 그렇게 또 하루가 가고 있었다. 미래와 만날 날은 다가오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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