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94화 누가 슬프게 하는 것인가?
- 나 한국 왔어.
문자를 보낸 우혁. 미래에게 보낸 것이다. 아직까지 한국에 도착한 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순빈은 그를 대신해 거짓말을 했다. 독일에서 아직까지 재활훈련을 했고, 그 기간 동안 연락이 잘 안 될 거라 말을 한 것이다.
문자를 보냈지만 바로 올 것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사실 그녀는 매우 바쁘다. 드라마의 연이은 성공. 이제는 주연을 맡아 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신인들은 계속 얼굴을 알려 주어야 했다. 어차피 우혁도 독일로 가있겠다 일이 바쁜 게 더 낫다고 생각한 미래다.
“세실리아? 이제 자야지. 오늘 피곤한 하루였잖아.”
“응.”
그녀는 대답하고 침대로 올라온다. 아주 자연스럽게. 크루즈에서는 항상 그렇게 행동해 왔다. 그가 아래에서 그리고 그녀가 위에서. 밤새 대화를 나눈 적도 많다. 그러다보니 서로의 세계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다. 또한 그녀의 언어 습득도 마구 늘었다. 원래부터 나쁜 머리가 아닌 것 같았다. 기억력과 응용력 둘 다 좋았다.
“세실리아? 여기 말고 네 방으로 가야지…”
그는 이미 부탁을 다 해 놓았다. 가끔 부모님이 집에 오셨다. 그래서 만들어 놓은 방이 있다. 그 곳을 세실리아에게 쓰라고 아까 말을 했는데.
설레설레.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가기 싫은 것이다. 이제 그와 한 방에서 있는 게 너무나 익숙해서 떨어져 있기 싫은 마음. 그것이 표출 되었다. 항상 그의 말을 잘 들었었다.
“나 여기서 잘래.”
“그래? 여기가 더 좋은가 보지? 그럼 내가 저 방에서 잘게.”
“아냐, 우혁이랑 같이 있을래. 같이 있고 싶어.”
결국 이거였다. 그녀는 그와 같이 있고 싶은 것이다.
“세실리아, 내가 크루즈에서 말한 것 기억나지? 남자와 여자는…”
“그거 다 알아. 하지만 같이 있고 싶어.”
“…….”
드디어 말을 안 들을 때가 도래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점점 말이 늘고 주변 상황을 잘 인지하며, 인간 세상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신의 말이 안 먹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빠르지 않은가? 아직 인간들과 많은 접촉이 없었는데…
“무서워. 우혁, 떠날 것 같아.”
바로 이게 그녀의 마음이다. 그와 떨어지면 왠지 모르게 그가 떠날 것 같았나 보다. 그녀는 이제 느끼고 있다. 그의 여자 친구가 매우 가까이 있음을. 점점 그와 이야기 하면서 느낀다. 인간은 한 여자만을 사랑하고, 한 여자와 평생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물론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잘 못 된 선택으로 여자 친구가 바뀌고 결혼 후 얼마 안 가 이혼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혁이 말을 하는 뉘앙스. 그 역시 한국인으로 태어나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그 범주 안에서 이야기를 했으니 당연히 그렇게 전달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왜 떠나. 약속했잖아. 넌 나의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항상 널 지켜준다고.”
“가족? 나 가족 싫어. 나 가족 싫고, 여자 친구 하고 싶어.”
“뭐?”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 게 이제 꽤 된다. 벌써 6월이니. 약 3개월. 그 동안 배운 언어. 그 습득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다만 이렇게 곤란하게 할 줄은 몰랐다. 이제 인간의 관습도 알아 챈 것 같다. 가족의 의미와 여자 친구의 의미까지도.
물론 결혼을 하면 가족이 된다. 하지만 그가 말한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을 눈치 채고 말을 한 것이다. 그가 가끔 지칭하는 미래라는 여자 친구의 존재. 한국에 도착하니 은근히 겁이 난다. 그녀가 자신을 미워하고 싫어할까 봐. 그래서 그가 떠나갈까 봐.
우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섣부른 약속을 할 수 없었기에. 이미 그의 마음은 세실리아에게 많이 기울어졌다. 미래가 싫다기보다는 사랑이란 감정이란 놈이 마구 자신을 조종해 버린다. 그 때 전화가 왔다.
- 여보세요? 우혁아? 언제 들어온 거야?
“미…래구나. 오늘 왔어.”
- 뭐? 순빈 오빠한테 아무 말 못 들었는데. 이거 깜짝 선물이야? 호호호.
“안 바빠? 금방 전화할 수 있네.”
- 바쁘지. 하지만 남자 친구가 들어왔는데 어떻게 전화를 안 할 수가 있어. 잠시 시간 급하게 내서 전화한 거야.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스케줄 조절 할 텐데. 깜짝 선물도 좋지만 미리 알려주는 게 내 직업에는 더 좋아. 이번 주 스케줄 완전 꽉 차서 만나기도 힘들어. 이런 말 해서 실망할 것 같지만 말이야.
“아냐, 실망하기는. 바쁘겠지. 바쁠 거야. 이해할 테니. 너무 마음 쓰지 마.”
- 응? 이상하네. 말투가 꽤 착해졌어. 좀 변했는데? 철이 들었나?
“변하긴? 예전이랑 똑 같지. 변하긴 뭐가 변해?”
- 아냐, 누가 그랬어. 남자가 변하면 바람피우고 있는 거라고. 갑자기 잘해 줄 때 특히 의심해 보라고. 혹시 바람난 것 아니야?
“무슨 소리야? 바람이 왜 나? 됐어. 그런 말 하려면 끊어.”
- 아냐, 아냐. 알았어. 역시. 이게 바로 최우혁이지. 시크함. 까칠함. 여자 친구라고 봐주는 것 없이. 어쨌든 이번 주는 못 만나서 아쉬우니 TV 많이 봐. 광고도 많이 찍어 놓고 드라마도 하고 있으니까. IPTV로 내가 나오는 드라마, 예능 등 모두 다 볼 것. 알겠지?
“응. 알았어.”
- 앗, 나 가 봐야해. 그럼 연락 또 할게.
미처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정말 바쁜가 보다. 어쩌면 다행일 수 있었다. 뒤로 미루는 성격이 아니지만 그는 될 수 있는 한 시간을 끌고 싶었다. 매를 늦게 맞고 싶은 아이의 심정이다.
그리고 다시 세실리아를 보았다. 그녀는 뚫어지게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이 전화가 사람의 소리를 전달해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들은 참 편리한 것을 잘 만들어 내었다. 마치 마법과 같은 물건들. 물속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더 빠른 배. 그리고 지상에서도 빠르게 갈 수 있는 수단이 있다. 그게 바로 자동차. 대단한 종족이다. 이러니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세실리아, 말했지만 난 너와 같이 잘 수 없어. 이해해 줘.”
그녀는 이번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 수 없었다. 왜 방금 전까지 고집을 부렸다가 갑자기 그가 말을 하니 받아들였는지. 하지만 어쨌든 그녀가 그 방에서 나가게 되니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요즘 들어서 그녀와 함께 있으면 참느라고 죽을 고생이다. 미의 화신. 그냥 그런 미가 아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는 요염도 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성적인 매력. 그것을 참아낸 것은 초인적인 인내심이다. 마치 고자가 된 것인 양.
세실리아는 그의 방문을 나와서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보았다. 그의 여자 친구와 전화를 끊은 그의 표정을. 통화 내용도 대충 들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일 텐데, 그다지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니 기쁨보다는 뭔가 초조한 기색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어쩌면 자신이 그에게 큰 짐이 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자신의 욕심만을 차리자면 그에게 한 없이 사랑만을 요구할 텐데. 그렇지만 그가 행복해지는 것이 사실 그녀의 염원이다.
그래서 그가 자신 때문에 그의 여자 친구에게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일단 한 발 뒤로 물러서기로 했다. 그게 그를 위한 것을 잘 알고 있다.
눈물이 흐른다. 그녀의 예쁜 두 눈에서. 누가 그녀를 이렇게 슬프게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