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129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방안으로 따라 들어간 지연은 세실리아의 표정을 보고 졸려서 온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오히려 오늘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 역시 젊은 시절 사랑을 안 해 보았겠는가? 은환과 사랑을 하면서도 속도 끓이고 그랬다.
특히 그녀의 남편이자 우혁의 아버지 역시 매우 잘생겼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지 누굴 닮겠는가? 매력적인 그를 다른 여자에게 떼어 놓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노력을 해서 쟁취한 사람이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다른 여자에게 많은 못할 짓도 한 것 같다. 직접 만나서 다시는 꼬리 치지 말라고 한 대학 후배도 있었다. 그럴 때면 눈물을 머금고 있었던 그 여자들에게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지만 어쩌랴? 그 남자는 자신의 것인걸. 그래서 나중에 우혁이 하반신 마비가 왔을 때 다른 여자의 가슴에 못을 박은 죄를 받는 것 같았다. 지금 세실리아의 표정이 그 때 자신의 표정이다.
“혹시 미래를 보고 그러는 거니?”
끄덕끄덕.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지연의 물음에 순순히 인정을 한다. 그녀는 거짓말을 잘하지 못한다. 인간 세상에 나와서 적응하고 있는 과정. 그래서 솔직하다. 승헌이나 순빈은 그녀를 연예계로 진출시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지만 그녀의 이런 면 때문에 우혁은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이다.
“죄책감이 든다면 그러지 말거라.”
“그를 좋아하는 여자 많아요. 그런데 그것 볼 때 화나요. 아마 그녀도 그랬을 거예요.”
“그게 질투라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느끼는 감정이란다. 우혁이를 사랑하는데 질투가 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거다. 자연스러운 것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안다. 세실리아가 이런 마음이 들지 않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질투라는 감정도 그렇지만 미래에 대한 죄책감. 그것을 걷어내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녀가 경험해 봐서 잘 알고 있다. 지금이야 사람 좋은 맛에 같이 시간을 보내고는 있지만 언젠가는 그녀를 볼 때 계속 생기는 그 죄책감이 불안감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지연이 나가고 나서 역시 세실리아는 잠 못 드는 밤을 경험했다.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지만 그나마 꿈을 꾸었는데, 우혁이 미래를 다시 만나는 꿈이다. 불안함이 점점 그녀를 엄습해 오는 것일까?
다음 날 우혁은 다시 찾아온 장치앙린과 다시 결전을 벌인다. 1500미터를 고집하고 있다. 오늘은 맘을 먹었는지 통역을 동반해 왔다. 어제처럼 골탕을 먹고 싶지 않아서 급하게 고용을 한 모양이다.
“타이머 잊지 마라. 그리고 우혁아 꼭 이겨라.”
그는 웬일인지 우혁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 대회에 나가서도 이기라고 말을 잘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기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게 궁금했지만 장치앙린에게 질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그는 걱정 말라는 눈빛을 하며 스타트대에 섰다.
어제와는 달랐다. 실제 경기를 하는 것처럼 그는 올라섰다. 물론 어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대회에 나선 느낌처럼 팽팽한 긴장감. 영욱의 말 때문이다.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이기라는 중압감. 웬만해서는 하지 않는 표현을 들으니 더욱 이겨야겠다는 마음이 든 것이다.
- 삐익.
신호가 들어가고 타이머가 작동이 되었다. 개관 후 이 수영장이 선수들에게 정말 좋은 훈련장인 이유가 수동이 아닌 디지털로 그들의 기록을 정확하게 측정을 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S 생명 선수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다. 어제에 이어서 장치앙린은 무리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승부를 빨리 걸어오고 있었다. 우혁은 그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역시 무리를 해야 했다. 한계를 시험하는 일. 오랜만에 해보는 것이다. 승부사의 피가 돌고 있다. 심장을 통해 온 몸으로.
막판까지 접전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누가 이긴다고 할 수 없는 상황. 둘 다 세계 수준에 근접해 있다는 증거다. 터치. 그리고 승자는 우혁이다. 간발의 차다. 그런데 기록이 나왔다. 13분 31초 03. 세계 신기록은 아니지만 그의 최고 기록이다. 장치앙린은 13분 31초 06.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터치가 이루어진 셈이다. 0.03초의 차이는 바로 그 차이를 이야기 한다.
“잘했어, 우혁아. 아주 잘했어.”
영욱은 기뻐했다. 기록의 상승. 이것은 장치앙린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긴 사람은 기쁨을 진 사람은 좌절감을 맞았다. 하지만 이 중국선수 역시 아시아를 지배했던 선수다. 쉽게 패배를 인정할 수 없나 보다.
“한 번 더 하고 싶다.”
“오늘은 안 된다.”
영욱이 통역을 통해 나온 그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연습은 충분했는가?”
그에게 물어보는 말. 장치앙린은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당연히 충분하지 않았다. 중국 수영계에서 퇴출이 되었다. 그동안 자신이 이룬 영광. 한 순간의 실수지만 너무나 냉정했다. 여론도 그를 맹비난했다. 어느 나라에서나 가장 정점에 있다가 큰 실수를 하면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없는 법이다. 그 역시 그랬다. 제대로 훈련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관없다. 훈련 따위는 안 해도 저 놈은 충분히 이길 수 있다.”
그는 아직 전성기다. 그의 말대로 단체 훈련은 부족했을 지라도 개인 훈련은 충분히 호텔에서 했다고 여겨진다. 독기와 집중력. 아시아에서 최고였기에 그런 마음이 없다면 쉽게 도태되었을 것이다.
“훈련장을 개방하겠다. 원한다면 써도 좋다. 일단 몸을 만드는 게 낫지 않겠나? 그러니 질 수밖에 없다. 우혁이도 당당하게 이기고 싶을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장치앙린은 분노가 솟구쳤다. 이제 아예 그를 도전자 취급을 하고 있다. 하지만 또 영욱의 말이 틀리지 않기에 그는 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 분노를 훈련으로 승화시켜 반드시 이기겠다고 다짐하는 그였다.
반면 우혁은 이제야 깨달았다. 영욱이 무엇을 노리는 지를. 그래서 오늘 자신에게 꼭 이기라고 말을 했던 것이다. 그가 만약 졌다면 장치앙린은 스스로 만족해서 한국을 떠났을 지도 모른다. 그가 찾고 있었던 것은 자기만족이다. 우혁에게 이기고 스스로 만족해서 깨끗이 은퇴를 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강제 은퇴나 다름이 없지만 사실 현역으로 뛰려면 기회만 만들면 된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약물복용으로 선수자격이 정지된 일. 그런데 그 나라의 수영 선수 중에 약물복용한 선수보다 나은 선수가 없었고, 올림픽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진 것은 연맹과 국민들이었다. 그래서 국제 수영 연맹에 항소를 해서 결국 선수 자격 정지를 풀어주었다. 올림픽에 나선 그는 당당히 금메달을 땄다.
장치앙린은 그런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는 중국 수영계에 환멸을 느꼈다. 토사구팽.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라는 말. 그것을 자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중국 수영 연맹 쪽으로는 침도 뱉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명예 회복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을 밟았다. 수영을 끝내더라도 우혁을 한 번 이기고 끝내보고 싶었다.
그 마음을 이용하는 영욱. 그리고 거기에 말려들고 있는 장치앙린. 마지막으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수 있는 우혁. 이들 셋의 치열한 머리싸움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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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일이 있어서 아마도 상당히 늦게 올리거나 아니면 못 올릴 수도 있겠네요.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