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27화 후원의 정의
마지막 날인 1500미터에서도 그는 우승을 했다. 일반부에는 적수가 없었다. 100미터를 우승한 사람이 200미터와 400미터를 놓칠 리가 없다. 그리고 800미터까지. 대회 5관왕. 신인에 대한 스포트라이트가 광풍처럼 나라를 휩쓸고 있다.
언론 보도는 수시로 그에 대한 기사를 내뱉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는 며칠 동안 그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너무 잘나가면 질투와 시기가 장난이 아닌데 이건 아예 상대가 되지를 않는다.
이런 말이 있다. 갑작스럽게 얻은 인기 때문에 사람이 좀 달라졌다는 말. 개구리 올챙이 시절 잊고 사람이 좀 건방져 졌다는 말. 그에게는 없는 말이다. 처음부터 좀 건방져 보였기에. 그래서 오히려 요즘이 좀 겸손해 보인다.
“이제 마음대로 건방 떨고 다니지도 못 하겠다.”
“킥킥킥.”
소속사에서 빛나와 함께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제 그녀는 항상 그와 붙어 다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원해서이다. 도무지 그냥 밖에 나설 수가 없다. 집 주변을 배회하는 여학생들. 그의 신상이 다 털려 버렸다.
내일 부모님이 출국한다. 그래서 새 집을 구해 놓았다. 마치 007 작전처럼 구한 집.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사를 가려고 한다. 그런다고 해결이 될까? 아마도 귀신같이 알아낼 것이다. 새집은 빛나와 미래의 집 근처이다. 목동.
빛나가 꼬셨다. 매일 대리 기사로 쓰라고 하면서.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 그가 거절을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는 대안이 없다. 그는 운전 면허증이 없는 것이다. 딸 시간이 없었다.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몸이었던 데다가, 그 이후에는 외국에 체류했고 귀국해서 수영만 했다. 틈을 낼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무슨 광고야?”
“음료수라는 것 같은데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어.”
대회가 끝나고 휴식을 받은 그는 이 기간에 광고를 찍기로 했다. 그에게 연락을 준 승헌은 단순히 음료수라고 했다. 어떤 것인지는 나중에 나와서 이야기를 하자고. 즉, 선택은 우혁이의 몫이다. 술만 아니라면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빛나에게 전화를 해서 같이 나온 것이다.
잠시 후 그들을 부르는 승헌. 들어가 보니 누군가가 앉아 있다. 약 40대로 보이는데 대머리라서 실제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는 일어서서 그를 보더니 팔을 뻗으며 악수를 청한다.
“안녕하세요, 최우혁 선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S 그룹에서 홍보팀을 맡고 있습니다.”
“아, 네.”
억지로 악수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뻘쭘하다. 그는 명함을 꺼내서 그에게 준다. 새겨진 이름을 보니 신영수라고 적혀 있다.
“S 그룹에서 우혁 군을 후원하기로 결정했다는 이야기 들었지.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셔서 기다리는 중이었어.”
“아, 네.”
여전히 같은 대답이다. 고맙다는 말을 할만도 한데 말이다. 전혀 그런 내색은 비치지 않고 있다. 사실 우혁이의 입장에서는 다음부터 그가 착용할 모든 것에 S 그룹이라고 쓰여 있을 것이니 그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매년 3억의 후원금이지만 자신의 가치는 더 높다고 생각하니 역시 오만하다.
그래도 이런 만남에서는 예의상 감사의 표현을 좀 하는 게 좋다. 그게 윤활유다. 인간관계에서 말이다. 끊임없는 인간관계로 이루어지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데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 그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는 대화이다. 상대방의 기분을 더 잘 맞춰주는 사람이 바로 인간관계가 좋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게 부족하다. 메마른 가지와 같다. 꼭 필요한 말만 한다. 그러니 상대방은 머쓱할 수밖에 없다. 특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이런 면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래서 지금은 승헌이가 말을 한다.
“빛나 양 후원도 해주신데. 오늘 같이 오라고 한 것도 그것 때문이야.”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빛나 역시 도도한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 그런데 우혁의 옆에 서면 초라하다. 어찌 이렇게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하는데 상대가 되겠는가? 참, 예의 바른 쪽 속했다. 어쨌든 그나마 영수는 얼굴을 활짝 편다.
“하하하, 얼굴도 예쁘고 박빛나씨 역시 좋아요, 아주 좋아. 하하하.”
뭐가 좋다는 것인가? 어린 예쁜 여자가 웃으면서 고맙다고 하니 당연히 좋다고 하는 것이지만, 은근히 우혁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허리를 좀 굽히고 살라고. 대기업에서 후원을 해주면 이런 정도는 해야 한다고.
하지만 역시 끝까지 아무 말도 안하고 뻣뻣하게 서 있다. 그렇다고 대놓고 뭐라고 할 수도 없다. 겸연쩍은 얼굴로 그는 승헌에게 말을 하고 나간다.
“이제 만났으니 됐어요. 나중에 그룹 회장님하고 사진 한 방 찍어야 하니까 그 스케줄 좀 잡아 줘요. 그런데…”
“네, 네.”
“그 때도 이렇게 하면 좀…”
약간 못마땅한 눈빛이다. 그룹 회장과 만날 때 최대한 공손하게 해달라고 나중에 승헌에게 꼭 말하리라 다짐하며 문을 나섰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빛나와 승헌의 인사를 받으며 손을 든 영수.
“그럼, 안녕히 가세요.”
“들어가십시오, 팀장님.”
그가 나가자 승헌은 우혁을 바라본다. 그 역시 지금 이 태도가 영 거슬린다. 사실 자신한테 하는 것은 이제 적응이 되어서 상관이 없다. 하지만 후원을 하는 그룹의 실무자나 임원, 또는 광고주들한테까지 이렇게 뻣뻣하면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결국은 충고조로 그에게 말을 한다.
“우혁 군. 조금 웃어주면 안 돼?”
“제 표정은 제가 관리하고 싶은데요.”
“우혁 군을 위해서야.”
“그게 왜 저를 위해서입니까? 사실 저를 1년에 3억을 후원한다고 하는데, 그만한 이미지 광고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제가 착용하고 다니는 모든 것에 S 그룹이 찍혀 나갈 텐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승헌의 입장에서는 그에게 말을 하고 싶었다. 세상에는 이득과 손해를 따지기 이전에 인간관계의 룰이 있다는 것을. 그것을 알려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그에게 큰 손해가 올 것 같았다.
“자네 말이 맞아. 그러나 잘 생각해 봐. 결국 그 돈으로 인해 자네는 더 좋은 환경에서 운동을 할 수 있어. 이제 훈련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거든. 개인 훈련을 위해서 트레이너가 붙을 거야.”
“아뇨. 전 훈련장에 나갈 겁니다. 그 곳에서 제 개인 트레이너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경쟁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됩니다. 그러면서 기록 경신을 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그렇지. 경쟁 상대가 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거야. 하지만 말이야. 그들을 이기고 나면? 지금 자네의 발전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어. 그런데 한계는 없을까? 결국 정부 지원으로 하는 것에는 그 비용만큼 정해져 있는 것이 있어.”
그는 스포츠 분야에 대해서 정통하다. 단체 운동이 아닌 한 개인 스포츠에서는 기록 경신이 중요하다. 그리고 자신만의 노하우. 특히나 저번에 보여 주었던 영법은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그만의 기술이다. 본다고 다 익히면 비법이 아니지 않는가? 이를 위해서 개인 트레이너를 붙이고 S 그룹에서 협찬하는 그를 위한 개인 수영장을 제공한다는데, 문제는 받아들이는 입장에 있다.
“그래도 싫습니다. 차라리 그 3억 원을 다른 용도로 쓰고 싶습니다. 개인 트레이너가 아닌 매니저는 안 될까요? 도무지 불편해 죽겠습니다. 주변에 나를 보는 시선 말입니다. 많이 신경이 쓰입니다. 어디를 가도 따라 붙기 때문에요. 그래서 여기 빛나에게 계속 부탁해야 합니다. 나 좀 태워달라고.”
“음…”
“난 괜찮아, 우혁아.”
“아니 내가 불편해서 그래. 자꾸 널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칼 같은 그의 말. 이렇게 나오니까 좀 섭섭하다. 요즘 그녀의 낙은 그를 태우고 데려다 주며 데리고 오는 것에 있다.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녀는 즐겁다. 이런 저런 이야기 하며 그와 더 가까이 지낼 수 있어서 참 좋다. 그런데 그가 불편하다고 하니 할 말이 없다.
“알겠네. 매니저를 붙여주겠네. 하지만 그것은 별도로 하고 일단 개인 트레이너 부분은 심각하게 생각을 해 보게. 대한민국의 학생들이 왜 사교육을 하겠나? 미국의 유명한 코치가 있네. 이번 후원금하고 광고 몇 개 찍으면 그의 연봉을 감당할 수 있을 걸세… 그러니…”
“아, 싫다니까요. 저 그냥 영욱 코치한테 배울 거고요, 여기 있는 빛나랑 같이 있고 싶어요. 훈련장에서 말입니다. 후원금이든 광고 금액이든 간에 그냥 통장에 넣어 주세요. 원래 이런 말은 계약 사항에 없었지 않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좀 커졌다. 돈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훈련장을 떠나고 싶지 않다. 또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항상 두렵다. 어차피 어디를 가나 자신을 싫어할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았다. 김훈이나 찬규처럼 말이다. 훈련장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도 사람이다. 그것을 왜 모르겠는가?
그런데도 떠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 둘이 있기 때문이다. 영욱과 빛나. 그 두 명으로 훈련장에 가는 게 즐겁다. 그들은 그의 스승이자 친구이다. 그들과 함께 해서 수영을 익히고 즐겁게 배웠다. 그리고 자신이 있다. 다른 사람이 아닌 그들과 함께라면 더 큰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걸.
“아… 왜 이렇게 흥분을 하고 그래? 알았어, 우혁아. 그만 해. 실장님도 알아 들으셨을 거야. 그죠? 실장님?”
“으… 응? 응. 알겠네. 자네 뜻을. 맞는 말이네. 내 욕심이 좀 지나쳤나 보네. 난 자네가 빨리 빨리 성장하기를 바랐네. 그게 회사에도 이득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부정하지 않겠네. 하지만 믿어줄지 모르는데, 난 자네가 태원 군의 뒤를 빨리 이어주기를 바랐네. 이건 나뿐만이 아니네. 태원 군도 부탁을 하고 갔네. 그래서 태원 군을 후원하던 S 그룹이 자네를 후원하게 된 것이네.”
“그 마음은 고맙게 받겠습니다. 후원금은 말 그대로 후원입니다. 그런데 사진도 찍고, 제가 착용하는 모든 것에 S 그룹을 박아 넣는 것은 광고지, 후원이 아닙니다. 저는 그래서 후원이라고 느껴지지 않네요. 만약 이런 게 싫다면 후원을 받지 않겠습니다.”
의지가 강하다. 승헌은 또 한 번 그의 이런 성격을 겪고 나니 이제야 최우혁이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좀 더 깨닫게 된다.
사실 우혁에게 후원은 그리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냥 준다는 것도 받기 싫어한다. 휠체어에서 생활 했을 때도 그랬다. 누군가 그냥 자신에게 베푸는 것. 그것은 동정이었고, 그것을 받는 순간 비참했었다. 그래서 그는 공짜를 상당히 싫어한다. 그런 성격으로 인해 빚어진 해프닝이다. 바로 오늘의 사건이.
이후 광고 이야기를 좀 하고 그는 문을 나섰다. 일단 그의 성향을 알았으니 승헌도 더 이상은 이런 자리를 만들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고 나름 우혁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순수한 후원이란 이 세상에 없다. 후원그룹은 비단 직간접적인 광고가 아니더라도 세상에 생색을 내려 할 테니까 말이다. 밖으로 나가서 담배를 꺼내 문 그는 영수에게 전화 할 일이 깜깜해 진다. 그룹 회장과 사진 찍는 일을 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담배 연기와 한숨이 섞여 하늘로 날아간다.
============================ 작품 후기 ============================
지난 회의 잠수 거리에 대한 지적 매우 감사합니다. 조사가 좀 미흡했었네요. 기본적인 수영 경기 규칙일 텐데...
그래서 일단 뒤져 보니 스타트와 각 턴을 할 때에 15미터까지 잠수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니 또 지난 회의 내용을 굳이 고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즉, 모르고 쓴 경기 방법이지만 내용에는 큰 무리가 없었네요. 다행히 몇 미터까지 잠수했다고 안 써 놨습니다. ㅎㅎ
자세한 수영 규칙은 작품 설정 26회에 위키 백과에서 복사해 놓은 내용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럼 이따가 연참하겠습니다. 계속 지적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