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5화 스타트대에 서다
대회 이틀째도 미래는 여전히 저조했다. 전 종목에서 예선탈락. 반면 빛나는 200미터에도 우승을 해서 대회 3관왕에 올랐다. 대비되는 성적. 이럴 경우 섣부른 위로는 독약이 된다. 그동안 그녀에게 독설도 마다하지 않은 그녀이기에 더더욱 조심스럽다.
우혁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조심스러운 부분은 따로 있다. 위로하는 방법을 몰라서이다. 사회성이 부족한 청년. 이제야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며 인간관계에서 서로 부대끼는 사나이인데, 뭐라고 표현을 하지 못해서 안타까운 눈빛만 보냈다.
대회 3일째. 이 날은 우혁이의 첫 출전이 있는 날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이다. 이렇게 남과 경쟁을 하는 게. 학교를 다녀봤다면 진정한 경쟁을 알았을 텐데, 전혀 그랬던 과정이 없으니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 그에게 미래가 다가왔다. 출전 시간 삼십분을 앞두고 대기실에서 그를 찾아온 것이다.
“우혁아! 힘내!”
“응? 응. 당연하지.”
그의 밝아진 얼굴.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응원. 매우 뜻밖이었다. 자신의 몸도 추스르기 바쁠 텐데, 응원을 하다니 너무 감동적이다.
반면 미래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미소를 보게 되어 너무 좋았다. 전날까지 의기소침한 그 모든 과정이 눈이 녹듯 사르르 녹아 내렸다. 사랑에 빠진 그녀. 눈에서 하트가 그려지는 것처럼 그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오늘 경기 있지?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랄게.”
“음. 고마워. 그런데 이번 대회는 사실 포기야. 호호.”
“그러지마. 벌써 포기라니?”
“마음만으로는 벌써 우승을 몇 번 했겠다. 그런데 몸이 안 따라 줘서 어쩔 수 없어. 사실 좀 한계가 온 것 같아.”
“한계? 그런 것은 없어.”
그는 여기서 말을 끊었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잠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생긴 첫 친구에게 용기를 줄까?
“걷지도 못한 사람이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것 너 믿을 수 있어?”
“……?”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일까? 그것도 뜬금없이. 그녀는 지금 이 상황에서 전혀 무관한 이야기를 하는 그의 얼굴을 말 없이 바라보았다.
“네 앞에 서 있잖아. 그러니까 한계가 없다는 것을 내가 오늘 증명해줄게. 나를 보고 꼭 힘을 냈으면 좋겠어.”
그녀의 눈이 커졌다. 걷지도 못했다고? 무슨 사고라도 났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세히 이야기를 할 시간까지는 없다. 마인드 컨트롤. 이제 남은 시간 그것을 위해 그는 상상속의 적과, 그리고 상상속의 자신과 싸워야 한다. 어쩌면 지금이 중요한 시기이다. 그래서 의문을 뒤로 미루고 대기실에서 나온다. 나오는 길에 빛나와 마주친 미래.
“어?”
“어?”
서로 놀란다. 빛나의 입장에서는 미래가 여기에 왔으리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의기소침. 아마도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기 바쁠 거라고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누군가라도 우혁을 응원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사실 대기실에는 그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 두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김훈과 박찬규. 그 사이에서 어쩌면 눈치를 잔뜩 얻어먹고 있을지 몰라 신경이 쓰였다.
“웬 일이니?”
미래야 말로 더 놀랐다. 빛나는 웬만해서는 동료를 응원하러 오지 않는다. 자신을 챙기기도 바쁜 그녀다. 심지어 라이벌이라고 여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도 격려를 한 적이 없다. 못 할 때 더 열심히 하라는 채근을 한 적은 있지만. 그래서 의외일 수밖에 없다. 남자들에게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그녀. 혹시…
“우혁이 보러 왔어?”
“응? 응.”
“설마 응원하려고?”
“맞아. 그런데 네가 왔으니 됐어. 네가 오지 않을까봐 네 대신 응원하려고 했거든.”
진짜 그럴까? 미래는 왠지 모르게 그 이유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을 했다. 갑자기 생기는 경계심.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말은 이렇게 한다.
“많이 격려해 주면 좋지, 뭐. 가서 응원해 줘. 우리 우혁이는 좋겠네. 이렇게 응원해 주는 사람이 많아서, 호호.”
“그… 그럴까? 그럼 갔다 올게.”
한번쯤 거절해줄 줄 알았던 빛나.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대기실에 당당하게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미래가 속으로 당황할 정도다.
‘쟤가… 혹시?’
빛나는 그녀 나름대로 약간 속이 상한다. 미래가 표현한 말 때문이다.
‘우리 우혁이라고? 둘이 아무 관계 아니잖아.’
눈과 눈 사이가 좁혀지고, 그녀 역시 지금까지 절친했던 미래에 대해서 다른 맘이 생긴다. 한 동안은 잠재적 경쟁자였다. 수영에 관해서라면 말이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자신에게 뒤처지기 시작했다. 발육 때문이다. 수영선수 치고 너무 큰 바스트. 그게 그녀에게 상당히 방해가 된 뒤로 절대 뒤처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쪽에서 잠재적 경쟁자가 되어 버렸다. 한 남자를 두고. 두 명의 절친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있다. 도대체 남자가 뭐길래?
“우혁아아아…”
김훈과 박찬규가 깜짝 놀랄 음성. 목소리에 애교가 살짝 담겨 있다. 자신들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녀가 우혁이를 찾아왔다. 그리고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과 목소리로 그를 대하고 있다. 원래부터 재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니 더욱 짜증이 솟구쳤다.
“야, 박빛나! 지금 우리 진짜 중요한 순간이거든? 너야 세 번씩이나 우승해서 좋겠지만, 우리는 아니야. 제발 좀 나가 줄래?”
드디어 김훈이 폭발했다. 평소라면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언감생심 말도 꺼내지 못했을 텐데, 지금은 질투와 분노가 섞이면서 날카로운 반응을 나타낸 것이다.
“난 그저 우혁이를 응원하러 왔을 뿐이야. 그리고 너희들도…”
마지막은 덤이다. 둘러대는 게 확실히 보인다. 그들이 이런 그녀의 얄팍한 수에 감동이나 하겠는가?
“우리를 응원하러 왔다고? 단,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던 네가? 우리가 몇 년 동안 같이 훈련을 받았는지 알아? 그리고 국제대회를 나가서도 몇 번이나 너에게 응원을 받았게?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 것을 보니 내 기억력이 나쁘거나, 아니면 네 응원이 없었거나 둘 중 하나지. 안 그래?”
“정말 찌질하군.”
“뭐? 이 새끼가…”
이번에는 찬규가 그렇게 길게 이야기를 하자 결국은 우혁이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빛나를 보호하려는 것보다, 진짜 그들이 찌질해 보였다. 응원 한 번 못 받은 게 대수인가? 휠체어에 앉아 있을 때 사람들의 동정이나, 반대로 무관심을 받았다면 절대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좀 있다가 나를 이겨. 그리고 축하를 받아. 그게 낫지 않나?”
“너를 이겨? 하하하. 너를 이기라고? 하하하.”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사실 진짜로 어이가 없었다. 이제 첫 출전한 선수에게 들을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웃긴다, 정말 웃긴다. 요즘 나온 개그냐? 이봐, 지금까지 태원 선배한테 가려서 우승 한 번 제대로 못 해 봤어. 이번 대회가 기회야. 이미 넌 경쟁 상대도 안 돼. 첫 출전에 의미를 두는 너를 이겨보라니? 어이가 없다. 정말 어이가 없어. 큭큭.”
- 알려드리겠습니다. 남자 일반부 1500미터 경주에 나설 선수들은 장내에 나와 주십시오. 다시 한 번 알려드리겠습니다. 남자 일반부 1500미터 경주에 나설 선수들은 장내에 나와 주십시오.
그 때 방송이 나왔다. 드디어 경기장에 나오라는 멘트다. 여기서 그들의 언쟁이 종료가 되었지만 눈싸움은 여전하다.
“난, 갈게. 어쨌든 파이팅!”
빛나는 그렇게 불을 지르고 미안하다는 듯 대기실을 총총히 빠져나왔다. 응원을 하러 갔다가 괜히 싸움만 났다. 그러나 자신의 탓 보다는 그 찌질한 김훈과 찬규의 탓으로 돌렸다. 그들이 박태원 선수에 가려서 그렇게 우승을 못 한 것은 못해서 실력이라 생각하면서.
“우혁이한테 발려버려라! 흥.”
그녀는 다시 한 번 대기실 쪽을 향해 가자미눈을 만들며 저주를 퍼부었다. 물론 그 두 명의 쪼잔한 남자들에게 말이다.
우혁은 벅찬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드디어 출발 대 앞에서 몸을 풀고 있다.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폈다가, 다시 어깨를 왼 쪽으로 감아보기도 하고, 팔을 당겨보기도 한다. 몸 상태는 나쁘지 않다. 한국에 오기 전에 몸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정기 검진을 했던 의사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정상인 이상으로 회복된 체력과 근력 덕분이다.
8레인. 가장 안 좋은 기록을 가진 선수가 배정이 된다. 박찬규가 4레인, 김훈이 5레인인 것을 보면 그들이 우승후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우혁의 기록 자체가 없기에 당연한 결과다.
“최우혁 파이팅!”
“우혁 오빠 잘해요오오.”
“사! 랑! 해! 요! 최! 우! 혁!”
관중석에서는 난리가 났다. 같이 훈련하던 중고등부 여자 선수들이 소리를 질러댄 것이다. 물론 듣는 사람은 귀찮은 표정이다. 자신에게 쏟아진 관심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혁. 무관심도 싫어하고 관심도 싫어하니 어느 장단에 맞출까?
심판의 지시가 떨어지고 드디어 스타트대에 올라섰다. 심호흡을 한 번 내쉰다. 크라우칭 스타트. 허리를 숙이고 엉덩이를 내밀지 않는 자세. 출발 신호가 떨어지면 바로 튀어나갈 것 같은 우혁. 심장이 두근두근거리며 자신의 귀에까지 들렸다. 수영모와 고글의 느낌이 느껴진다. 수영하다보면 거슬릴 것 같다.
그러나 출발신호가 임박해서는 진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귀를 쫑긋 세우는 것 이외에는. 몸의 감각이 한껏 일어서고…
삐익…
부저가 울리고 그의 몸이 스프링처럼 튀어나갔다. 아마 그 누구도 그렇게 완벽하고 깨끗한 스타트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우혁의 인생에서 첫 번째 경쟁이.
============================ 작품 후기 ============================
정정할 것이 있습니다. 물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저 개인의 생각이었습니다. 과학적 증명 없이 글에다가 표현을 했네요^^ 이를 친절하게 알려주신 유라시아의 꿈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과학적인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서 더 연구해야겠군요^^. 그래도 만약 오류를 발견하게 되시면 또 알려주세요. 저도 글을 쓰면서 독자님께 배울 것은 배워야죠^^
그럼 나중에 또 연참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