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62화 종방연에서
보통 스케줄이 꽉 찬 배우들이 종방연에 참석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래도 잠깐이라도 들른다는 것은 그 드라마가 히트를 쳤을 때였다. 다음 드라마를 위해 연출자와 작가에게 눈도장을 찍어놔야 한다. 마치 결혼식에 눈도장을 찍는 것처럼.
그런데 오늘은 거의 대부분 스케줄을 뒤로 미뤄 놓았다고 한다. 누군가가 참석한다고 해서 모두들 호기심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등장했다. 이미 시작된 종방연인데 그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잠시 조용해 졌다.
“안녕하세요.”
덕분에 머쓱하게 인사하는 우혁. 그런 그를 연출자가 일어서며 자리로 이끌었다. 미래 옆으로 마련한 자리. 아무래도 그녀와 친분이 있기에 그리로 자리 배치를 미리 한 것이다.
“아이고, 드디어 우리 우혁씨가 오셨구만. 이리로, 이리로 와서 앉아요. 하하.”
“아, 네.”
그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그를 이끌었다. 이들에게도 인간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다음번 배우를 섭외할 때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출연을 쉽게 승낙하니 말이다. 그래서 우혁에게도 더 잘해주는 것이다. 혹시 아는가? 다음에 카메오로 또 섭외를 할 기회가 있을지.
분위기는 다시 달아올랐다. 노래방 기계가 있어서 노래를 부르는 연기자들도 있는가 하면 벌써부터 술로 달리는 이들도 있다. 우혁이 있는 곳은 당연히 질문 공세의 장이다. 주연 남자 배우인 송자섭도 그에게 관심을 표하고 있다.
“우혁씨, 지난번 대회에서 잘 봤어요. 나도 어릴 때 수영을 했어요.”
“아, 네.”
“우리나라 수영 환경이 좀 열악하잖아요. 그런데 우혁씨 하는 것을 보면 감탄사만 나와요. 하하하. 지난번에 일본과 중국의 콧대를 꺾어 버린 1500미터 경주. 캬아. 속이 시원하더라구요.”
“아, 네.”
여전히 그는 단답형 대답이다. 이를 보고 미래가 나섰다.
“선배님, 말 놓으셔도 되요. 얘는 숫기가 없어서 그런 말 못해요. 너보다 나이 많은 분들 다 말 놓으라고 해도 되지?”
“응? 그래.”
역시 중간의 가교 역할을 훌륭하게 하는 그녀다. 예전 훈련장에서도 그랬다. 그 때에는 오히려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 그였다.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 함부로 말을 놓지 말라고 했던 게 기억이 난다. 온 몸에 가시 돋친 듯 그렇게 살아왔으니 주변에 사람이 있었겠는가? 그게 아쉬웠던 그녀다. 그래서 지금은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 그래. 내가 말 놓을게. 하하하. 그런데 나중에 은퇴하고 이쪽 길로는 오지 마. 우혁씨가 너무 잘생겨서 내 밥줄 끊길 것 같아.”
“아, 네.”
그는 ‘아, 네.’만 반복 중이다. 별달리 말주변도 뛰어나지 않고,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말을 해 준다. 그러니 이렇게 단답형으로 끝내도 상관은 없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자섭이 스케줄 때문에 일어섰다. 주연 여배우도 아까 빠졌다. 이렇게 주연 남녀가 빠지니 흥이 사라졌는가? 아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계속해서 우혁에게 있다.
“나, 저기서 노래 절대 안 한다.”
“응?”
“저기 노래 기계.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시키고 있잖아.”
그는 미래의 귀에 속삭였다. 왠지 겁이 난 것이다. 이런 자리에 흔하게 있는 상황. 누군가가 노래를 하고 그에 따른 박수로 흥을 돋운다. 그 다음 사람을 호명하는 것도 박자를 맞춘다. 마치 지금처럼.
“한수연! 한수연!”
메인 히로인은 아니지만 나름 역할에 충실한 여배우 수연이 못 이기는 척 하고 노래방 기계에 다가서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발라드라서 사람들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후 노래가 끝나자 사람들은 또 다음 타자를 호명했다.
“김미래! 김미래!”
결국 그녀가 나갔다. 그런데 그 자리를 치고 들어오는 게 바로 수연이다. 그녀는 지난번부터 그에게 관심 있었는데, 막상 상대방의 반응이 없자 의외라고 생각을 했다. 바쁜 스케줄이라서 그를 잊고 지낼 만 했지만 이렇게 다시 보니 새록새록 그의 매력에 다시 빠져 들고 있었다.
“우혁씨, 안녕.”
“아, 네. 안녕하세요.”
이제 스스럼없이 말을 놓는다. 우혁은 이런 분위기가 싫다. 누가 자신을 만만하게 보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아까 미래가 판을 깔아 주지 않았던가? 그보다 나이가 많으면 말을 놓으라고. 그 말을 들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듣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원래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반대편이었다.
“지난번에 준 영화표 잘 썼어?”
“네? 아, 그거요. 아뇨. 시간이 없어서요.”
“아, 그래…”
보통 거짓말로 둘러대기도 하는데 그는 이런 면에서 너무 솔직했다. 그리고 그 때 미래에게 들었던 연하 킬러라는 의미. 그의 마음속에 경계심이 일었다. 별로 친하고 싶지 않았는데 반말까지 하니 슬슬 기분이 나빠진 것이다.
“그럼 그 전화번호는? 봤어?”
“네.”
“그런데 왜 전화 안했어?”
“아, 전화를 해야 하는 겁니까?”
이렇게 말을 하는 그의 의도는 간단하다. 전화를 할 이유가 없으니 안 한다는 것이다. 물론 산전수전 다 겪었을 지도 모르는 수연은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멋진 연하를 만났는데 이정도로 물러설 그녀가 아닌 것이다.
“응, 여배우가 그것을 주었다는 이유는 마음이 있다는 거거든. 자, 지금이라도 해봐.”
“지금요? 옆에 있는데 직접 말하면 되지 무슨 전화까지…”
점점 그들 둘의 주변은 이 대화의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수연의 별명을.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절대 은밀하지 않다. 즉, 대놓고 연하들을 꼬신다. 그럴 만큼 그녀의 외모가 받쳐주니까. 나중에 언론만 잘 막으면 된다. 그것도 그녀만의 노하우가 있다.
“에이, 내가 우혁씨 전화번호를 알고 싶어서 그렇지. 어서, 어서 해봐.”
“전화번호 저장 안 했는데요.”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드디어 이 여우같은 수연이 제대로 당하는 구나 싶었다. 아마도 처음 봤을 것이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저장하지 않은 남자를. 대체적으로 순진하면 또 그것대로 그녀에게 넘어가고 노련하면 또 나름 그 부류를 요리하기가 더 쉬웠다. 그런데 우혁은 순진한 것 같으면서도 꽤 까다롭다.
“그… 래? 그럼 핸드폰 줘 봐. 내가 저장해 줄게. 많이 바빴구나, 그동안. 그러고 보니 지난번보다 얼굴도 수척해진 것 같네.”
“됐습니다. 그리고 미래가 왔네요. 자리 좀 비켜 주시죠.”
“응? 아, 미래씨 저 쪽에 자리 있네. 거기 앉아.”
수연은 미래에게 아까 자섭이 떠나고 빈자리를 권유했다. 우혁의 맞은편이다. 연예계에서는 선후배의 위계질서가 아주 확실하다. 조금만 건방지다고 소문이 나도 금세 퍼진다. 그것도 악성으로. 당연히 그녀는 표정 관리를 하며 돌아가서 앉을 수밖에.
그런데 이게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우혁은 표정이 굳었다. 원래 잘 웃지 않은 그의 얼굴. 그래서 진짜 화가 났는지 즐거운지 알수가 없다. 하지만 미래는 잘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왜 잘 모르겠는가?
“아, 선배님. 무슨 이야기 중이셨어요?”
“그냥. 미래씨는 신경 쓰지 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 지금도 그렇다. 자신에게 수연이 그런 식으로 말을 하니까 우혁이 발끈하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테이블 밑으로 발을 뻗어 그를 자제시켰다. 그녀의 발이 그의 발과 마찰한 순간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친 것이다.
‘문제 안 일으킬 거지?’
일종의 신호다. 그 눈빛이 말하는 것.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 어떤 집단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기를 원한 것이다. 짧은 생각일 수도 있다. 수연에게 휘둘리는 게 꼭 적응을 유도하는 게 아니기에. 다만 작게 반응하라는 의미이다. 손쉽게 끝낼 것을 몇 차례 우혁이가 크게 만들어서 수습하기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무슨 대화가 전에 있었는지 몰라서 그녀는 그에게 무조건 참으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나 이제 들어갈래.”
“응? 벌써?”
갑자기 우혁이 일어섰다. 어쩌면 자신이 참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를 지켜보는 시선들. 특히 여자들 사이에서는 그의 매력이 더욱 마음에 들어왔다. 수연의 유혹을 견디는 부분에서 특히 점수들을 주고 있었다.
반면 수연은 자존심에 약간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잠시 자리를 떴다. 밖으로 향하는 그녀. 어디를 가는지 알 수 없다. 속이 상해서 담배를 하나 피러 갔을지도 모른다.
“역시 이런 자리는 나에게 맞지 않는 것 같아.”
결국 그는 밖으로 나갔다. 그를 따라가는 미래. 아무래도 이렇게 보내니 마음이 좋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인가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또 다시 분위기에 취해 종방연이 진행되고 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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