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37화 친구로라도 남아주기를
우혁은 이제 미래와 빛나를 화해를 해주겠다느니, 어색함을 풀어주겠다느니, 이것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지난번 일로 둘은 많이 어긋났을 것이다. 중간에 낀 상태. 불편함은 이루 말할 필요도 없다.
저녁을 그가 사겠다는 말. 미래는 그와 함께 보내게 되어 마냥 좋았다. 다이어트중이라고 말은 했지만 그렇다고 이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다시 권유하는 그에게 한참을 고민하더니 치맥을 먹고 싶다고 했다.
“치맥?”
“응. 치킨하고 맥주.”
“나 술 먹어 본 적 없는데.”
“그럼 넌 구경만 해. 나만 먹을 테니까.”
순빈은 이들을 내려 주었다. 동네 치킨 집이다. 아주 구석에 있는 구멍가게.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이런 곳이 적격이다.
“이따가 태우러 올게. 전화 해.”
“그냥 퇴근 하세요. 걸어가면 되요, 이 정도는.”
“그래도…”
“여자 친구 있다면서요? 가서 좋은 시간 보내세요, 형. 하하.”
치킨 집에 들어가서 맥주와 치킨을 시켰다. 사실 이게 땡겼다. 다이어트 중이기는 하지만 하루인데 어떤가? 이런 생각에 미래는 살짝 맥주 한 모금을 마신다. 톡 쏘는 쓴 맛. 한 여름이라서 더 상쾌하다.
“맛있어?”
“응. 한 번 먹어 볼래?”
“쓰지 않아?”
“약간 쓰지. 그래도 이 쓴 맛에 먹는 게 술이라잖아.”
그녀는 맥주잔을 내민다. 약간 고민을 하는 우혁. 살짝 받아들며 입에 대 보았다. 금세 인상을 쓴다.
“호호호. 무슨 남자가 술 한 번 입에 댔다고 그런 표정이냐? 깔깔깔.”
“이 쓴 것을 왜 먹는 거야? 크으.”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면 이런 모습마저도 잘 생겨 보인다. 물론 어떤 표정을 짓든 그의 매력적인 얼굴에 흠이 가는 것은 아니지만. 미래는 멍하게 된다. 그러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며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나 다음 주에 드디어 첫 촬영 한다.”
“어? 정말 축하해.”
“칫. 그러면 뭐해? 집에 TV도 없잖아.”
“아아, 안 그래도 사려고. 아까 순빈이 형도 권유하더라고. 그래서 이번 기회에 구매해 보려고 한다. 네가 나오는 프로 반드시 볼게.”
“정말? 그런데 사실 네가 안 봤으면 좋겠어.”
“왜?”
“좀 창피하거든. 아마 무지 떨 것 같아.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긴장이 돼.”
그는 이해가 갔다. 그 역시도 그랬다. 아까 광고를 찍을 때 도무지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감독은 자연스럽게 하라고 계속 주문했는데, 도대체 어떤 게 자연스러운 것인가? 잘 모르겠다. 평소 표정이 그런데 그게 경직되었다고 하니 더 굳어졌던 것이다.
“잘 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정말? 나도 그러고 싶어. 네가 옆에 있다면 안 떨고 잘 할 수 있을 텐데…”
그는 ‘곁에 있어줄게’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안 될 말이다. 그녀를 위해서도 반드시 피해야 할 말이다. 이제 데뷔도 하지 않은 신인에게 스캔들이라도 터진다고 생각해 보라. 특히나 그녀가 아닌 그가 잘 알려져 있다. 요즘 매스컴에서 가장 핫한 수영 선수이니 말이다.
치맥. 치킨과 맥주. 처음 먹어보는 조합이다. 나름 나쁘지 않았다. 물론 맥주 반잔에 얼굴이 빨개졌지만. 그래도 알딸딸해져 오는 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다.
“오늘 술 처음 먹어 보는데, 이런 게 취한 건가?”
“너 얼굴 빨개, 호호호.”
“그… 그래? 사실 좀 뜨거워.”
“근데 보면 볼수록 정말 잘 생겼다.”
“면전에 대고 못 하는 소리가 없네. 하하.”
그는 그녀의 말을 농담으로 받았다. 그렇게 해야 말을 한 본인도 무안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웃은 것인데, 그녀는 웃지 않았다. 아니 얼굴에 미소는 걸려 있지만 소리를 내어 웃은 것은 아니다. 그의 웃는 모습에 넋이 나간 것 같았다.
“그 날 잠을 한 숨도 못 잤어.”
“…….”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대화가 진행되는 것 같아서였다. 그녀도 알딸딸한가? 겨우 맥주 한 잔 마셨을 뿐인데…
“우혁아, 있었던 일을 기억에서 지울 수는 없는 거야.”
“기억에 남으면 너와 나는 친구가 될 수 없어.”
“맞아. 친구가 될 수 없지. 난 그걸 원해. 연인이고 싶으니까.”
결국은 고백해 버린다. 사실 처음이 아니다. 간접적으로 그리고 완곡하게 표현한 적은 많이 있으니까. 그리고 지난번에 그를 사랑한다고 말을 했으니 그 또한 잘 알고 있다. 그의 마음은 어떤가?
솔직히 모르겠다. 사랑을 해 본 경험이 있어야 알 것 아닌가? 사회화 과정에서 겪은 풋사랑 조차 그에게는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어쩌면 그도 미래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빛나를 보면 또 그녀에게도 같은 마음이다. 이러니 더욱 갈팡질팡하고 어렵기 그지없다. 웬만한 일에 고집이 세고 결과가 좋든 나쁘든 결단력 하나는 빠른 우혁. 이 부분에서는 그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친구로라도 남아 있기를 원하면 기억을 지우라고 말했지? 못하겠어.”
“미래야…”
“못 하겠는데 어떡하지? 응? 우혁아, 알려 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닌데, 그녀는 왜 이처럼 벌을 받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질문. 답을 얻겠다고 한 물음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침묵이 너무 야속하기만 하다.
그렇게 헤어졌다. 별다른 결론을 못 내리고. 웬만하면 그녀를 데려다주고 싶지만 그것도 하지 못했다. 감정에 치우쳐 자신이 잘못된 결정을 내릴까봐.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하는 게 또 있다. 사랑은 감정에 치우쳐 내리는 결정이다. 사랑하고 싶으면 사랑하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미래와 빛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야, 난 그녀들에게 선을 그었어.’
그는 스스로를 자위해 본다. 친구로서 그녀들의 곁에 남고 싶다고. 그렇게 선언을 했는데, 그녀들이 포기하지 못하는 거라고. 그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다. 또한 그가 이렇게 갈등하는 이유는 한 사람이 아닌 둘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또 하나의 고민을 주는 여인이 아파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으니…
“왔어?”
“응. 광고는 잘 찍었어?”
“응. 덕분에.”
얼마나 기다렸을까? 밥은 먹었을까? 그녀의 얼굴을 보니 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자신이 뭐라고 이렇게 기다리는 것일까?
“밥은 먹었어?”
“응? 으…응.”
대답을 흐리는 것을 보니 먹지 않은 것 같았다. 결국 그는 봉인을 해제한다.
“들어와. 아줌마가 밥 준비하시고 가셨을 거야.”
소속사에서 고용한 아주머니. 그의 식단을 해결해준다. 아침과 저녁은 주로 아주머니가 와서 밥을 차려 놓고 간다. 운동선수는 먹는 것도 잘해야 한다. 박태원도 하루에 수천 칼로리를 먹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다. 요즘 먹는 식단은 고칼로리 위주다.
물론 그것은 그녀의 입에 들어갔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는 우혁. 심란해 보이는 표정이다. 도무지 딱 잘라버릴 수 없는 그녀들과의 관계. 아니 벌써 몇 번은 끊어 냈다. 하지만 아무리 끊어도 다시 붙는다. 사람 마음이 오지 말라고 안 오는 것은 절대 아니지 않는가?
“어렵다.”
“응?”
그녀가 밥을 다 먹고 일어나려는데 그가 말했다. 당연히 그녀는 눈이 약간 커졌고. 묻는 것이다. 뭐가 어렵다고 한 것인지.
“정말 어려워.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
“난 너희들이 내 친구인 게 너무 행복해. 그런데 자꾸 그 행복이 망가져 가고 있어.”
“미래 만났니?”
여자의 육감. 남자와는 다른 그녀들의 촉. 단번에 그가 미래를 만나고 온 것을 파악한다. 그리고 굳어지는 표정. 질투다. 요즘은 분명히 빛나가 그녀보다 그의 곁에 오래 머물고 있다. 그런데도 잠시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긴 그 어떤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가 연적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그녀에게 말했어. 친구로만 남아달라고. 하지만 그것을 거절했어. 내가 친구조차도 될 수 없다고 경고를 했는데도. 그런데 어떡하지? 그 경고를 무시했는데도, 난 그녀를 내칠 수 없어.”
“그건 당연한 거야. 미래를 변호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야. 너와 친구로만 남을 수는 없어.”
역시 그랬다. 그녀에게도 같은 답을 얻을 줄 알았다. 그런데 왜 건드렸을까? 불안정해서 그렇다. 그의 정서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이럴 때 누가 옆에서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 그가 나아갈 길을.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그 누군가를 만나야 하겠다고. 그녀라면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날 순빈은 독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간신히 구해 왔다. 갑작스런 그의 결정. 독일에 잠시 갔다 온다고 한다. 이유는 묻지 말아달라고…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말. 같이 동반할 수는 없었다. 그가 원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독일 행 비행기에 몸을 싫은 우혁. 과연 그는 원하는 존재를 만날 수 있을까?
============================ 작품 후기 ============================
그렇죠. 부모님 빚부터 갚아야죠^^ 참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