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47화 각국의 잠룡들
남자와 여자가 만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느 한쪽에 감정이 생긴다. 그렇다면 다른 한쪽은? 그 감정에 반응하는 호르몬이 분비될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렇게 교감을 이루다 보면 발전하는 게 사랑이다.
문제는 단 한 사람만을 위한 감정이 일생동안 유지 되는 게 아니라는 것. 그래서 한눈을 팔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우혁은 현재 어디에 메인 몸이 아니다. 그 누구에게 구속되지 않았으니 사실 빛나와 키스를 한다 한들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근데 왜 미래에게 죄책감이 드는 것일까?’
아침에 일어나서 경기장으로 가면서 계속 그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제의 일. 우발적이고 충동적으로 발생한 일이다. 그로서는 하지 말아야 할 ‘미안’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그게 수습이 될까?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그게 우선이 아니다. 당장 오늘 벌어질 경기가 더 중요하다. 400미터. 어제와 그제 경기는 자신의 주 종목이 아니라고 치자. 사실 일수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기록이니까. 그러나 오늘 부터는 아니다. 그는 누가 뭐래도 현재 한국 선수 중 최고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나 이게 더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우혁아, 부담 갖지 마.”
그의 어깨를 두드리는 영욱. 하지만 그게 말 한 마디로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다행일 텐데. 대기실에서 스타트대에 서는 그의 얼굴에 굳은 다짐이 엿보였다. 쇼타 스카이. 벌써 이번 대회에서 몇 번째 만나는 것인가? 그는 B조의 4레인. 자신은 5레인. 옆에서 경기를 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삐익. 소리가 울리고 드디어 출발을 했다. 그를 응원하는 마음들이 모였다. 심지어 그를 싫어하는 김훈과 찬규도 응원을 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한국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해외에 나오면 그런 마음들이 모두 사라진다.
빛나는 간절히, 그리고 또 간절히 빌었다. 그에게 힘을 달라고. 그녀의 모은 두 손을 보면 알 수 있다.
‘신이시여, 이번에는 우혁이에게 힘을 주소서.’
그 모두의 희망을 받아서인지 그는 50미터를 가장 먼저 찍은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모른다. 이런 적이 처음이 아니다. 이상하게 후반에 강하다고 평가받은 우혁이지만 상대들은 더욱 강하다. 어쩌면 힘을 배분하는 방법을 알아서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제부터는 단거리라고 불리기는 애매한 거리이다. 그동안 그는 두 개의 단거리를 참가했고, 어찌 되었든 상대의 실력과 경험에 뒤진 것이 사실이다. 그들보다 그가 더 강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뒤로 갈수록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 호흡이다. 좀 덜 숨이 차는 능력.
때문에 100미터와 200미터 턴을 할 때 쇼타 스카이에게 역전을 당했지만, 그 다음 턴은 거의 비슷했고 300미터 턴을 할 때에는 비슷하게 그가 먼저 찍었다. 이제 막판 100미터. 그는 아직 힘이 떨어지지 않았다. 반면 다른 선수들은 현저하게 힘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그가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350미터 턴에서 그는 확실히 먼저 벽을 찍고 턴을 한다. 그 이후로 그 자리를 지켜냈다.
“와아아아아!”
“우혁이가, 드디어 우혁이가…”
예선을 통과했다. 쇼타 스카이를 제치고. 그는 마음속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 위로 올렸다. 얼굴에는 미소가 한 가득이다. 플래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일본 기자들도 있지만 중국과 한국 기자들도 있다.
50미터, 100미터의 최강자 쇼타 스카이. 그는 사실 중국의 장치엔링에게도 이 부분에서는 항상 이겼었다. 하지만 200미터부터 체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래서 어제 경기도 중국의 신예, 샤오 헤이씽에게 뒤진 2위를 기록했다.
오늘 그는 어제 경기에서 빼앗긴 1위를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을 했다. 샤오 헤이씽을 언급하면서. 그런데 오늘 생각지도 않던 한국 선수에게 예선을 뒤졌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오니짱, 축하해요.”
빛나는 그를 축하해주러 가다가 여우같은 계집애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거기다가 그녀에게 미소까지 지어주고 있는 우혁. 그의 미소가 얼마나 비싼데 유카리에게 그것을 보여준단 말인가? 당장 그 웃음을 멈추라고 말을 하고 싶었다.
“이겼어, 빛나야!”
그런데 아니었다. 그녀가 아닌 자신을 향해서 보여준 것이다. 동일 선상에 있었기에 그녀가 오해한 것이다. 그 미소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뛰었다. 반면 유카리 역시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보고 웃어준 것이라고. 그러다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빛나라는 것을 살짝 속이 상한다.
이제 예선이 끝났을 뿐이다. 이들에게 남은 것은 결선. 그리고 결선에 합류할 선수들을 뽑는 C조는 일수가 속해있다. 이곳에 샤오 헤이씽도 있다. 선수 대기실에 있는 모니터로 우혁은 이들을 관심 있게 주시하고 있다.
당연히 일수가 그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맘처럼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300미터에서 뒤처지기 시작하더니 그는 세 번째로 들어오게 되었다. 샤오 헤이씽이 1위. 자신의 기록을 능가하고 있다.
빛나 역시 오늘 400미터가 있다. 원래 그녀도 단거리가 주 종목이다. 이미 입상을 하지 못했으니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 몰랐다. 800미터와 1500미터는 그녀에게 벅차다. 그래서 최선을 다한 결과 예선을 통과했다.
그나마 이 자유형 3총사의 분전이 있기에 연맹 임원들은 약간의 인상을 피고 있다. 물론 우승과 준우승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배영이나, 평형, 그리고 접영으로 가면 더욱 없다. 다이빙이나 수구도 마찬가지다. 물속에서 하는 경기가 한국이 이렇게 약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잔뜩 고무되었다. 특히 우혁은 갈수록 나아지고 있으니 혹시나 모를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한 유망주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 결승에서 입상 또는 우승이나 준우승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결선. 기록에 따라 우혁은 3레인을 배정 받았다. 예선 기록이 세 번째라는 이야기다. 일수는 많이 밀렸다. 7레인이다. 끝에서 세 번째 기록. 장거리가 예전보다 나아졌기는 하지만 아직은 무리다. 국제대회에서 내밀 성적은 아니다.
스타트대에 오르기 전 전의를 다지는 선수들. 특히 쇼타 스카이는 6레인으로 밀렸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장치엔링의 불참으로 200미터와 400미터의 우승까지 노린 게 이번 대회였는데 역시 변수가 많다. 그나마 같은 일본 선수의 분전으로 5레인과 6레인이 일본인이다. 사토 료이치. 일본의 신성. 그의 뒤를 이어서 앞으로 일본 수영계를 이끌고 갈 인재이다.
“혀엉. 파이티잉!”
저 멀리서 일수가 소리를 지른다. 그와 우혁 사이에 중간에 낀 일본 및 중국 선수들이 양 쪽을 한 번 본다. 집중력이 흐트러진다고 책망하는 시선이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거기다 오늘은 우혁이도 같이 외친다. 매우 드문 경우다.
“그래, 파이팅!”
두 주먹을 불끈 쥔다. 어렵게 쇼타 스카이를 제치고 온 3레인의 배정. 꼭 3위의 기록을 가졌다고 3위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고 보니 옆 레인의 샤오 헤이씽도 신인이라고 했다. 자신 역시 신인의 돌풍을 일으킬 자격은 충분했다.
스타트대에 올랐다.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고요한 시간. 선수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엉뚱하게도 우혁은 어제 빛나와의 키스를 떠올리고 있다. 지금 생각할 장면이 아닌데…
그러느라고 조금 스타트가 늦었다. 100미터였다면 아마도 땅을 치고 후회했을 지도 모른다. 다행히 400미터. 충분히 복구 가능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국내였다면 그럴 수 있지만 좀 더 범위를 넓힌 동아시아 대회. 선수들의 실력은 서로 미세하게 차이가 있고, 그 차이에 변수를 만들어 내는 게 집중력이다. 처음 스타트에 늦었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따라잡는다고 했지만 심리적으로 위축된 것은 어쩔 수 없다. 반면 다른 선수들은 심리적으로 우위에 있다.
200미터를 턴할 때 이후로 그의 진가가 드러난다는 것도 이번 경기에는 통하지 않았다. 아니 부분적으로 통하기는 했다. 7위였던 그가 6위로, 그리고 300미터 부근에서는 5위로 진입을 했으니. 마지막 100미터를 앞둔 지점에서 힘을 내기는 했지만 결국 우승은 불가능했다.
50미터를 앞두고 턴을 하며 깊게, 그리고 오래 잠수를 시도하는 우혁. 거의 15미터를 다 채우며 머리를 수면 위로 드러냈다. 이때가 3위다. 2위와는 많은 격차가 있었고, 그리고 이 순위가 그의 마지막 순위가 되었다. 이번 대회 첫 3위. 절반의 성과. 그러나 아쉽다. 아마 그를 보는 모든 사람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항상 스타트가 좋았던 그였는데…
============================ 작품 후기 ============================
처음에 어렵기만 하던 이 소재, 이 글이 요즘은 손에 붙기 시작하네요^^ 전작 쓰는 그 속도를 점점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 여러분들이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