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144화 기묘한 세계
50미터는 입상을 하지도 못했다. 아직 단거리는 세계 수준에 근접하지 못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5위. 그가 든 성적표였다. 전날 영욱이 한 이야기가 어떤 의미에서는 틀리지 않는 말이다. 가장 현실성 있는 것이 오히려 계영이라는 말. 그것도 400미터가 아닌 800미터.
세계 선수권 대회 일정. 모든 경영 종목이 펼쳐지면서 자유형은 거의 하루에 하나씩 예선과 결선을 반복한다. 따라서 오늘의 일정은 끝이 났다. 허무하게 3위 안에 드는 것도 하지 못했지만 우혁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또 내일이 있고, 그 다음날도 있다. 그리고 올림픽도 있다. 어쨌든 그는 성장하는 중이다. 정체되는 순간 이제 끝이라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세실리아?”
- 응.
한가하게 호텔에 있는 저녁시간. 세실리아에게 전화가 왔다. 매일 하는 통화. 그리고 매일 듣는 목소리다. 단지 그의 입장에서 매일 보는 얼굴이 아니기 때문에서일까? 왜 이렇게 하루에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이 기다려지는지 모르겠다.
“별 일 없었어?”
- 아무 일 없어. 걱정 마.
“오늘 또 우승을 못하고 말았어.”
- 내일은 잘할 거야.
“그럴까? 함께 있지 못하니 이런 결과가 나는 것 같은데.”
-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 저번 대회에서는 매일 세실리아와 밤을 보냈다고. 그래서 결과가 더 좋았었는데 말이야.”
- 그런 게 어디 있어?
“하하하.”
무엇이 그렇게 행복한지 그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감돌고 있다. 누구라도 그의 그 미소를 보면 빨려 들어갈 것처럼. 그런데 그의 웃음 뒤에 반응. 그것이 없다. 갑작스러운 침묵. 갑자기 끊기는 대화.
“세실리아?”
- 응? 응.
“오늘은 뭐 했어?”
그녀가 다른 무언가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상함을 느꼈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뭐 하다가 전화 받았구나. 알았어. 내일 또 통화하자.”
그의 전화가 끊기고 세실리아는 멍한 상태에서 아직도 핸드폰을 귀에다 대고 있다. 그녀의 두 눈. TV에 고정되어 있다. <기묘한 세계>라는 프로그램. 그 방송이 전하고 있는 내용에 눈과 귀를 집중시키는 중이다. 사실 그래서 그와 전화 통화에 몰입을 할 수가 없었다.
“인어를 봤다는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로렐라이 언덕. 전설처럼 내려오는 인어 이야기. 동화 속 이야기를 현실로 착각하는 남자. 그를 만나보기 위해서 취재진은 이곳 독일까지 왔습니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스터리한 일들을 찾아다니며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프로그램이다. 항상 그렇지만 마무리는 시청자들에게 맡긴다. UFO의 이야기도, 그리고 네스호의 괴물 이야기도, 설인에 대한 전설도 찾아다니는 프로그램. 그래서 매니아들에게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이었다.
그녀는 그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판타지의 세계에서 그녀가 온 것 아닌가? 프로그램을 보면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그녀. 그런데 오늘은 인어를 보았다는 남자가 나왔다.
“작년에 사실 저는 자살을 하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저는 눈을 떠보니 인어와 함께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때 저는 물에서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독일어로 한참을 떠드는 상황. 그녀가 알아들을 리 만무하다. 당연히 자막을 보고 있다. 이제는 능숙하게 읽을 수 있는 한글. 그 내용을 보며 그녀는 걱정이 되고 있다. 세상에 밝혀지면 안 되는 이야기이다. 자신의 종족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상황이다.
“지금은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습니까?”
“지금은 못합니다.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실험해 보았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하하하.”
무엇이 좋은지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어떻게 탈출을 했을까? 내부의 도움이 없이는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의 탈출과정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의 인터뷰가 힘들 정도로 낯 뜨거운 말을 뱉어내서 편집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어의 종족 번식 행위. 그에게는 황홀한 경험이었는지는 몰라도 취재진은 정신병자를 상대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전 그 때 이후로 다시 삶에 대한 집착이 생겼습니다. 인어는 죽으려고 했을 때 저에게 다가온 신의 계시와 같았습니다. 이 행복한 삶을 계속 유지하라고…”
그의 마지막 멘트를 끝으로 방송은 끝이 났다. 하지만 그 여운은 세실리아의 뇌리에 계속 남아 있었다. 걱정이 되었다. 물론 저 남자의 말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기본적으로 프로그램의 특성상 매니아들은 강한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안 되는데, 정말 안 되는데…”
혼자 중얼거리는 말.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지만 만약 그 말을 들었다면 진한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으리라. 이대로 저 일이 묻히기를 원하는 그녀의 소망. 그녀의 바람대로 될지는 지켜봐야 한다.
그런데 세상일이 꼭 그렇게 돌아가면 좋으련만 이와 같은 일은 가끔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벌써 인터넷에 이 방송에 대한 이야기가 떴다. 인어는 실제로 있는가에 대한 토론까지 할 정도다. 원래 이 방송이 나간 후에 약간의 반향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 같은 경우는 취재진의 노력으로 인어의 존재 가능성이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던 것이다. 프로그램 입장으로서는 꽤 잘 된 방송이다. 어쨌든 그 프로그램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예전에 이 프로그램에서는 호르몬에 대한 연구를 하는 의학박사에 대해 프로그램을 내보낸 적이 있다. 약간 미친 여자같이 보였던 그 사람의 말. 노희경이라는 여자가 하늘이 맺어준 남과 여의 결합으로 사람은 특수한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을 했다가 네티즌에게 엄청 욕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것도 괜찮았다. 어쨌든 그런 것을 한 번 던져주고 화제를 끌어 모은 다음에는 시청률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오라버니, 어제 기묘한 세계에서 인어 이야기가 나왔어.”
“응?”
“가끔 오라버니가 말했잖아. 인어를 믿는다고.”
그랬다. 우혁이는 가끔 인어의 존재를 믿는다는 말을 하곤 했다. 세실리아를 만나기 전에 했던 말들이다. 그렇다고 적극적인 의사표현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희에게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그녀의 정신세계를 보아하니 그런 프로그램을 좋아할만 하다.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기묘한 세계>가 인어를 다루었다는 것을 듣고 다시 보기를 돌려본 그녀.
800미터 예선을 앞두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는 그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하는 가희.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요즘의 그의 모습과 다르게 그녀에게 반응을 하고 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인어 이야기라니?”
“어제 인어를 봤다는 사람이 프로그램에 나왔거든. 독일 사람인데… 로렐라이 언덕에서 자살을 시도했는데, 인어를 만났다고. 오라버니가 인어를 믿는다고 해서 알려주려고 내가 어제 상세히 봤지.”
곧 예선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갑작스럽게 던진 그 말. 마음의 평정이 깨져버렸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그 마음. 그리고 이제 자신이 속한 조의 경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조급함. 그 두 가지 심정이 상충된다.
“일단 경기 마치고 와. 또 이야기 해줄게. 내가 관심이 있을 줄 알았다니까. 호호호.”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 놓은 행동을 한 건지도 모르고 그녀는 밝게 웃으며 그를 격려했다. 모든 스포츠는 멘탈이 중요하다. 특히 우혁은 과거 이 불안정한 멘탈 때문에 놓친 경기가 상당히 많다.
아마 그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결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거리도 아니고 800미터에서 그가 예선을 탈락할 줄은.
“어떻게 된 거지? 잘 할 줄 알았는데. 너무 크게 봤나?”
건방진 목소리. 경기를 마치고 온 우혁을 향해 지미가 조롱조로 말을 하고 있다. 갑자기 짜증이 솟구친다.
“죽고 싶냐?”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요즘 자신의 본래 성미를 감추고 있었는데 그가 건드렸다. 갑자기 선수 대기실의 분위기가 경직이 되었다. 지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절대 쫄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죽여 볼래?”
“야, 이 자식아. 넌 위아래도 없어? 이게 정말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까…”
“형, 참아요. 형…”
우혁이 아닌 김훈이 반응을 한다. 그러자 그를 말리는 병묵. 그리고 종수는 지미에게 한마디 한다.
“뭐하는 거야? 사과해, 임마.”
“사과? 내가 왜 해야 하는데?”
안하무인이다. 갑자기 썰렁해진 분위기. 우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옆에서는 일수가 그를 잡았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상황에서 혹시라도 폭력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을 한 모양이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들어오던 영욱이 이 장면을 목격하고 큰 소리를 낸다. 그가 요즘 강조한 팀워크. 그게 깨지려고 하자 드디어 그도 언성이 높아진 것이다. 결국 그의 등장으로 지미는 선수대기실에서 밖으로 나갔고, 우혁은 가만히 앉아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다시는 사람들에게 흥분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맘대로 되지 않으니 자책감이 들었나 보다.
“형, 형이 잘못한 것은 없어요. 저 자식, 언젠가 내가 한 번 혼내줄게요.”
일수의 말.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드는 생각. 어제 세실리아와 통화할 때 그녀가 침묵했던 이유가 머릿속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 방송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연락 한 번 해봐야겠다.’
일단 예선 탈락으로 그의 오늘의 경기는 끝이 났다. 아마도 그에 대한 뉴스가 다시 포털을 장식할 것이다. 그런 기사를 보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우혁. 인어에 대한 자세한 소식을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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