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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128화 새로운 기대주

거의 동시에 벽을 찍었다. 그래서 승부를 알 수 없었다. 우혁의 얼굴에서도 장치앙린의 얼굴에서도 남은 것은 아쉬움. 당연히 다시 한 번 승부를 가리기를 원한다. 물론 그것은 영욱에 의해 제지를 당했지만.

“우혁아, 이제 그만 해라. 너무 무리하게 훈련을 하지 않기로 나랑 약속을 했잖아.”

“하… 하지만…”

그는 장치앙린을 바라본다. 지금 그와 승부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 비겁하게 승부를 피하는 꼴이 된다. 아니 그런 욕을 들을까봐 걱정이 되는 게 아니다. 다시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승부욕 때문에 그런 것이다.

“약속 지켜야지?”

그런데 영욱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을 건넨다. 우혁은 고개를 푹 숙인다. 항거할 수 없었다. 예전의 그가 아니다. 그 때는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이 내키는 대로 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했다. 정신적으로 많이 컸다.

“아쉬운 것 안다. 승부를 하고 싶은 마음도. 하지만 쟤가 원한 거니까 어쩌면 내일도 있고, 그 다음 날도 있다.”

그의 말이 맞다. 정작 아쉬운 사람은 장치앙린일 것이다. 몰래 입국한 이유가 그와 승부를 결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렇게 거의 무승부가 된다면 결국 기다려서라도 그와 승부를 나누고 싶어 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게 영욱의 마음일 수도 있다. 오늘로 끝을 내기에는 아까운 스파링 파트너. 그래서 지금 무승부가 오히려 우혁에게는 나을 수 있는 결과였다.

“알겠습니다. 감독님 말씀 듣겠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많이 성장했다. 키가 아니라 정신이. 남의 말을 잘 듣는 이가 아니었기에 다른 선수들도 놀람의 눈빛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일수가 갑자기 중간에 끼어들었다. 모두의 시선. 그를 향해 있다. 약간 쑥스러운 표정으로 꼭 이 말을 해야 한다는 듯이 그는 손가락으로 우혁과 승부를 위해 바다를 건너온 중국 선수를 가리킨다.

“쟤한테는 누가 말하죠?”

그렇다. 그게 문제다. 중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없다는 것. 그래서 장치앙린에게 전달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물론 우혁은 아니다. 감독의 말을 듣는 것과 예전에 라이벌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지가 한국에 왔으니 지가 알아서 해야지. 한 번 상대해 줬으면 끝이다. 난 갈게.”

결국 그는 샤워실로 직행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고 있던 장치앙린으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다가왔다. 모두 딴 청을 부린다. 몇 명은 우혁이 간 방향으로 이동을 하고 있다. 다른 이는 개인훈련이라도 할 것인지 수영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지금 이게…”

“난 중국어 몰라. 그러니까 한국어나 일본어로 해. 그렇지 않아도 요즘 기분이 저기압이니까 말을 안 시키는 게 가장 좋긴 해.”

가희는 요즘 그녀의 지금 말마따나 저기압이다. 그래서 아까부터 이곳에 합류하지 않고 수영장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서 우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한테 눈도 안 마주쳐 주는 그가 미웠지만 어쩌랴? 그는 이미 다른 여자의 남자인 걸. 그것을 계속 생각하니 기분이 또 나빠졌다. 그런데 장치앙린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된 상황이냐고 물어보려고 하는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또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다.

“뭐라고 하는 거야? 여기 중국어 아는 사람 없어요?”

그는 다시 주변을 보며 이렇게 외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메아리이다. 그나마 가장 친절한 일수. 그가 다가와서 영어를 한다. 혹시나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몰라서 내뱉은 말이다.

“유 고우.”

“뭐라고?”

“우혁, 고우, 소우, 유 고우.”

이것은 대충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혁이 결국 간다는 말. 그러니까 자신도 가라고 그가 말을 한 것이다. 그 역시 더듬더듬 영어로 물어보았다.

“히, 미, 매치.”

“노우, 히, 고우, 소우, 유 고우.”

그와 자신이 경기를 해야 한다고 말을 했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아까와 비슷한 말. 결국 오늘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근처에 호텔을 잡아 놓았으니 내일 또 찾아오면 된다. 자존심. 그에게 남은 그 유일한 것을 채우기 위한 그의 눈물겨운 분투가 시작이 된다.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우혁. 순빈이와 함께 귀가를 하면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세실리아가 있다. 요즘 그와 그녀는 사랑에 불이 붙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특히나 공개연애를 선언한 다음에는 더욱 서로에 대한 애정행각이 장난이 아니다. 그의 어머니가 함께 있으면 민망해할 정도이다.

“아들아, 엄마가 보고 있는 데서는 키스를 안 하면 안 될까?”

“왜요? 외국에서는 다 이런데.”

“여기는 한국이잖니?”

그녀의 말이 뜻하는 것은 간단하다. 자신의 앞에서 애정 표현을 자제해 달라는 것. 모자 관계에서 이런 것을 눈 뜨고 보는 게 한국적인 정서로는 용납이 되지 않는다. 그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은 그런데 그녀의 아들이 아니라 세실리아다.

“알겠어요, 어머니.”

“그래, 그래. 네가 그래도 내 말을 잘 듣지?”

“와, 벌써 시어머니 역할을 하시는 거예요? 너무 하시네.”

“너야 말로 너무한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모든 어머니들이 하는 말. 그 레퍼토리가 지연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고, 모든 아들들이 듣기 싫어하는 그 말을 대충 흘려듣는 우혁.

“밥 줘요. 배고파요.”

결국 긴 잔소리를 듣고 그가 한 마지막 말은 이것이다. 그래도 어쩌랴? 운동선수 아들이 배고프다면 챙겨 주어야 하는 게 어머니의 도리. 그것을 돕는다고 나서는 세실리아가 그래도 예뻐 보인다.

“응? 새 드라마 하네.”

식사를 마치고 가족이 모두 모여 앉아 TV를 시청하는 시간이다. 새 드라마가 나왔다. 미래가 주연을 한다. 드라마에 나오는 그녀를 보니 갑자기 세실리아는 그녀에게 하염없이 미안함을 느낀다.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남자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드는 미묘한 감정을.

‘저 사람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세실리아는 미래를 보며 자신의 가슴이 아팠을 때를 상기해 본다. 요즘 그와 같이 다닐 때 여자들이 그를 보는 시선. 그것이 가끔 신경 쓰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의 여자 동료들과 수영을 한다고 하는데 그 역시 마음이 갔다. 예전에는 그만 사랑하면 모든 게 다 해결 될 것 같이 느껴졌는데…

“저 자러 갈게요.”

“응? 벌써? 열시인데?”

우혁의 아쉬워하는 말. 당연하다. 사실 밤새도록 그녀와 있어도 모자라다. 그런데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으니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지킬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는 조금 더 같이 있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의 마음도 모른 채 오늘 일찍 잔다고 하니 조금 서운한 것이다.

“응. 피곤해. 잘 자.”

그녀의 뒷모습. 역시 같은 여자라서 지연이 뭔가 눈치 챘다. 우혁은 둔감하다. 그녀가 세실리아를 쳐다보며 일어서서 그녀의 방으로 이동하는데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스포츠 뉴스로 채널을 옮겼다.

“요즘 수영 좋아하시죠? 최우혁 선수 때문에 수영의 인기가 매우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또 한 명의 기대주가 탄생했습니다.”

새로운 수영 기대주. 우혁은 눈을 빛낸다. 수영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방송에서 나온 이는 혼혈이다. 그에 대해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이름은 지미 오. 호주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를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성씨는 아버지를 따라가는 거 아닌가?”

‘오’라는 성씨는 한국 계통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갔다는 것인데. 그 우여곡절이야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가 세계 청소년 수영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것. 그리고 현재 중학교 3학년이라는 게 그에 대한 기대가 높을 수밖에 없다는 멘트로 뉴스가 끝났다.

“그럼 내년부터 고등학생이네.”

새로운 경쟁자를 반기는 우혁. 내년부터 한국의 대회 규정이 여러 가지로 변한다. 그동안 학생부와 일반부를 나누었던 것에서 이제 모두 통합이 된다. 아시안 게임이나, 세계 선수권 대회처럼 말이다. 아마도 내년에 열릴 광주 세계 선수권 대회 때문에 그 방식대로 대회를 진행할 모양이다.

대신 중학교 이하는 주니어에 속해 따로 경기를 치르고 고등학교부터 일반까지는 기록에 의해 예선을 거쳐서 결선을 치른다. 그렇게 된다면 내년부터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지미와 경쟁을 할 수 있다.

‘기억해 두어야겠다.’

다음 대회가 기다려지는 우혁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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