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68화 우혁의 기록 경신을 도울 방법
소속팀에서 아시아 수영 선수 초청대회를 추진한단다. 우혁으로서는 반길 일이다. 잠재적인 아시안 게임의 라이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수영장 개관 기념으로 추진하는 일. 그들의 답변을 듣는 일만 남았다고 한다.
“그럼 내년이네요.”
“응. 국내에서 열리는 거니까 아마 홍보도 되고 그럴 거야.”
“알았어요. 이제 훈련 열심히 해야겠네요.”
“언제는 열심히 안 했나? 부상이나 항상 조심해.”
이제 일 개 월 남짓 남았다. 이곳 훈련장에서 운동할 날이. 자신에게는 추억이 서린 곳이다. 그래서 더욱 구슬땀을 흘린다. 12월이 되면서 날씨는 매우 추워졌다. 하지만 훈련장 밖에 일이다. 이곳은 지금 선수들이 흘리는 구슬땀과 물방울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열기가 후끈하다.
“좋은 소식이다.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것 같구나. 이곳 훈련장은 상시 운영이 불가능하지만 태릉선수촌은 대회가 잡힐 때마다 개방을 한다고 한다. 그러니 훈련장소가 없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와아, 정말입니까?”
“우와…”
선수들의 기쁨의 환성. 그 소리가 영욱의 귀에 너무 달게 들렸다. 나름 연맹은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특히 네티즌들의 여론이 결정적이었다. 도대체 연맹이 하는 일이 뭐냐고? 우혁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아마추어 대회에 참석하면서 수영계를 살릴 노력을 하고 있는데.
이런 여론이 형성되고 그의 인기가 계속해서 치솟자 뒷짐을 지고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아시안 게임도 얼마 안 남았겠다, 아예 1월 2일부터 선수촌 개방을 문체부에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물론 예산이 증가하지는 않았다. 다만 선수촌에서는 훈련비라는 명목으로 선수들에게 돈이 지급된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인 것이다. 무엇보다 훈련하는데 자비가 들지 않는 게 어디인가?
“오라버니, 크리스마스 때 뭐해?”
선수들이 다 좋아하고 있는 사이 전혀 이 일에 관심도 없다는 단 한 사람이 목격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유가희. 원래 재일교포 출신으로 한국에 귀화한 보기 드문 선택을 한 선수.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우혁에게만 있다.
사람들은 다시 구슬땀을 흘리러 수영장 및 체력훈련실로 들어간다. 빛나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녀의 걸음은 약간 느리다. 그녀도 듣고 싶다. 가희의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 요즘 너무 소원해져서 하루에 그와 한 마디도 안 할 때가 많아졌다. 그녀가 원한 방향이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무심하게도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역시나이다. 가희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빈도는 10프로 미만이다. 이 정도면 포기할 만도한데 그녀는 그러지 않는다. 4차원 소녀의 패기일까?
훈련이 끝났지만 우혁은 남았다. 개인훈련은 빠지지 않고 하는 것이다.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3회 정도 한다. 물론 이것도 안 할 때가 있다. 그 날은 바로 가희가 남는 날이다. 그녀는 그가 가끔 남아서 훈련한다는 것을 알고 같이 남으려 했다. 일수도 마찬가지다. 둘이 자주 경쟁해야 기록 향상이 된다.
“오라버니, 나는 갈게. 자꾸 내가 오라버니 훈련을 방해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러기는 싫어. 민폐는 싫어. 어쨌든 잘 해봐.”
오라버니라는 말은 사극을 보고 배웠단다. 한국 드라마 너무 재미있다고 침이 마르게 자신에게 이야기하던 그녀. 그녀가 만약 자신에게 관심만 없다면 그녀를 여동생처럼 생각할 텐데.
“형, 1500미터 상대가 없어서 항상 고민이에요. 전 형이 단거리를 해줘서 도움을 받는데 제가 해줄 게 없네요.”
“아냐, 괜찮아. 덕분에 나도 도움이 많이 되는걸 뭐.”
요즘은 일수가 동생 같다. 그는 외아들이라서 형제가 있는 게 참 부럽다. 그래서 그를 동생처럼 여긴다. 그 역시 자신을 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한테는 누나밖에 없다면서.
개인 훈련 전에 둘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는 사이에 사람들은 훈련장 밖으로 속속들이 빠져나가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빛나가 남아서 개인 훈련을 하려나 보다.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고 수영장 안에 있으니 말이다.
“오늘 오랜 만에 누나랑 연습하네. 누나, 누나!”
일수는 요즘 우혁과 빛나가 소원해진 것을 눈치 채고 있는 상태다. 모르면 바보다. 수영장 안에 있는 선수들뿐만 아니라 코칭스태프도 이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아는 척하지 않을 뿐이다. 둘이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쯤은 대충 짐작하고 있다. 싸웠거나. 아니면 반대로 연인이 되었거나.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둘이 사귀기 때문에 일부러 여기서는 아닌 척 한다는 그 말. 그러나 일수는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을 했다. 그가 아는 우혁은 절대 그런 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응, 왜?”
“오늘 남는 거예요?”
“응, 조금 더 하고 가려고…”
“어? 그럼 이따가 기록 좀 재주세요. 형이랑 한 판 할 건데…”
“알았어.”
의외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녀가 평생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살 거라 생각을 한 우혁. 그의 착각이었나 보다. 아니면 마음이 좀 풀려서 좀 쿨해졌거나. 문제는 자신이다. 어색한 순간을 헤쳐 나갈 능력이 부족하다. 늘 그렇다. 사람을 대하는 게 쉽지 않으니 말이다.
몸을 풀고 물 안에 들어간 두 남자. 슬슬 수영장을 돌며 워밍업을 한다. 겨울철에는 더 충분히 몸을 풀어주어야 한다. 실내라서 춥지는 않지만 그래도 밖의 온도는 장난이 아니다. 이 계절에 경직된 몸은 충분한 준비 운동이 필요하다.
“누나, 한 번만 재줘요.”
드디어 시합을 앞두고 일수가 빛나에게 부탁을 했다. 그녀는 드디어 우혁과 눈이 마주친다. 아직까지 어색하다. 미래와는 달리 그녀도 인간관계는 그렇게 썩 원만한 편은 못 된다. 그래도 그에 비해서는 훨씬 낫지만 말이다.
“몇 미터인데?”
“50미터부터 해야죠. 아, 근데 맨날 단거리만 하려니까 형한테 미안해요. 1500미터는 내가 좀 뛰어 줘야 하는데, 상대도 안 되니 별 도움도 못 되고…”
“방법은 있어.”
“네? 어떤 방법이요?”
“우혁이가 1000미터 정도 먼저 돌고 나서 네가 시작하면 되잖아.”
“엇, 그런 묘수가… 형 어때요?”
기발한 방법이다. 지금까지 왜 이런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빛나는 꾸준히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안타까워했다. 우혁의 강점은 일단 장거리. 그런데 변변한 상대가 없다. 그의 협소한 인간관계 때문인지 몰라도 찬규나 김훈은 그를 상대해주지 않았다. 아마 상대해주더라도 그의 실력에 미치지 못하니 자존심이 상해서 거절했을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그는 부탁조차 않았다. 그들 입장에서 나서서 그를 도와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으니 그 혼자 1500미터를 돌고 있는 것을 가끔 볼 때 마음이 상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 그가 주선해서 S 생명에서 선수들에게 투자를 한다는 것을. 다른 선수들은 전혀 모르고 있지만 그녀는 그의 마음을 이미 파악했다. 하지만 그의 성격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생색은 전혀 내고 싶어 하지 않는 성격. 그래서 마땅히 받아야 할 감사를 그는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좋은데? 시작할게 먼저.”
그 역시 빛나의 방법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것을 하고 싶었다. 1000미터쯤 돌 때 대기하고 있던 일수가 출발을 한다. 그의 주 종목은 단거리. 400미터도 이제 우혁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힘이 떨어진 상태의 그와 경쟁을 하니 수월했다. 결국 지고 말았다.
“야, 이거 기발하긴 해도 제가 질 리가 없네요.”
“무슨 소리, 다시 한 번 하자.”
“형. 숨 좀 돌리고요. 난 지쳤어요. 헥헥.”
물론 그 정도 까지는 아니다. 우혁은 일수가 자신을 배려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3000미터를 돌 때 일수는 1000미터를 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우혁이 더 지친다. 그것을 알고 있는 그가 잠시 휴식을 갖자고 제안을 하는 것이다.
“맞아, 좀 휴식을 취하고 해야지. 너무 그렇게 에너지를 방전하다가는 부상당해.”
빛나도 거들고 나섰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우혁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둘의 눈빛이 마주쳤다. 그녀가 웃었다. 그 역시 웃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한 명의 인간관계를 맺기가 힘든 세상이다. 따라서 그녀가 다시 마음을 열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다만 그 인간관계 안에서 우정이라는 이름만 있어야 한다. 이제 그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기에.
훈련이 끝나고 모처럼 그녀가 그를 데려다 준단다. 덕분에 순빈은 조기 퇴근. 먼저 일수를 서초동에 내려다 주고 다시 목동을 향해 엑셀을 밟았다.
“잘 지냈어?”
“응. 너는?”
“나도.”
소원한 사이였던 그들. 대화의 물꼬를 트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런 일에 전문가들도 아니다. 다만 더 좋아하는 쪽이 항상 손해다. 그녀는 결국 긴 침묵을 깨고 그의 집에 도착할 때쯤 말을 건넸다.
“집 이사 갔지? 어디인지 알려 줄래?”
“아, 맞다. 미안.”
그는 자신의 집 위치를 알려 주었다. 어차피 전에 살던 집과 그리 멀지 않아서 금세 찾았다.
“우리 이제 친구로라도 잘 지내자, 우혁아. 그럼 갈게.”
“아, 고마웠어. 잘 가.”
그를 내려다주고 어렵게 말을 꺼낸 빛나. 그는 그렇게 그녀를 보내고 좀 홀가분해진 마음이 되었다. 역시 시간이 해결해 주나 보다. 다만 그가 무심코 넘어갔던 것이 있다. 그의 집이 이사 간 것은 어찌 알았을까? 분명히 그의 이전 집을 찾아갔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아직 모른다. 세심한 성격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경험이 부족해서 여자의 맘을 잘 모른다. 아직 빛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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