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28화 이사
부모님을 인천공항에 데려다 주는 일까지 빛나가 도와주었다. 그냥 리무진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고 하는데, 그녀는 굳이 도와주겠단다. 고맙긴 하지만 약간 미안하다. 그가 고집불통이고 약간 싸가지 없이 보이기는 해도, 그건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의 판단이다. 그는 확실했다. 계산을 원하면 계산적이 되는 것이고,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라면 끝까지 베풀 사람이다.
“덕분에 잘 왔다, 빛나야. 우리가 없더라도 부탁한다.”
드디어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빼고 들어가는 동안 우혁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외교관이라면 부자여야 하고, 리무진 버스를 이용하는 대신 고급차를 타야 한다는 편견. 그들이 다 깨고 있다. 사실 빚이 많다.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여기 저기 빌어다 쓴 것이 적지가 않은 것이다.
“나도 고맙다. 허허. 우리 아들 친구들은 다 이렇게 친절하네. 그래서 맘 편하게 출국할 수 있는 거야.”
그의 아버지 또한 너스레를 떤다. 사실 이들 부부는 요즘 행복하다. 비록 그를 치료하는데 빚까지 내가며 많은 돈을 갚아야 하는 처지지만, 그것은 남은 인생에서 천천히 부담을 줄여 가면 된다. 문제는 그들의 아들이었는데, 요즘 매체에서 하루가 다르게 그에 대한 뉴스를 쏟아 낸다. 수영의 천재라느니. 제 2의 박태원이라느니.
이 정도라면 정말 큰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물론 할머니에게 우혁의 아버지가 영원한 어린 아들이듯 이들에게도 그는 한 없이 보살펴야 할 존재이긴 하다. 그래서 출국 전에 빛나의 손을 꼭 잡고 이야기 한다.
“빛나야, 우리 아들이 어렸을 적부터 몸이 아파서 성격이 약간 모가 났다. 그런데 너와 미래가 옆에서 잘 챙겨주니 너무나 안심이 된다. 오랫동안 너희들이 친구로 남아주었으면 좋겠구나. 둘 중 하나가 며느리가 되면 더욱 좋고, 호호호.”
“에이, 엄마도 참. 쓸 데 없는 이야기 하시네. 빨리 들어가요.”
“저 매정한 녀석. 꼭 저렇게 말을 하네. 어쨌든 빛나야, 우리 아들 잘 좀 보살 펴 주길 바랄게.”
“네…”
대답을 하는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일었다. 특히 며느리라는 부분에서는 사실 그녀의 소망과 일치된다. 물론 아직 한참이나 어린 그들이다.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운 마음속의 연인이다. 어찌 그의 어머니가 말한 며느리라는 명사에 흔들리지 않겠는가?
아무튼 그들은 떠난다.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걱정스러운지 계속 뒤를 돌아보는 그의 부모. 그들을 향해 손 한 번 흔들어주고 끝이다. 무심해 보이기는 하지만 원래 이렇다. 정이 없는 게 아니다. 마음속으로 항상 그들이 건강하기를 빌고 있는 것이다.
“에휴, 아들 키워 봤자 소용없다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외동아들 하나 있는 게 너무 무심해 보여서 그런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인다. 나중에 아들은 절대 안 낳겠다는 다짐을 하며. 그런 그녀가 웃긴지 그는 피식 거리며 모자를 눌러 썼다. 덥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람들이 알아볼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모자와 선글라스는 항상 필수품이다.
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길. 오늘부터는 새로운 집이다. 작은 아파트. 월세지만 상관은 없다. 그는 혼자서도 잘 살 자신이 있었다. 원래 있던 집은 팔아서 그의 조부모가 실버타운에 들어가는 데 썼다. 빚이 있는 부모님은 이게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더 이상은 자식과 손자 뒷바라지를 시킬 수 없다는 마음에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월세 보증금 정도만 나오게 되었다.
“옛날 생각나지 않아?”
대교를 건널 때 빛나가 그에게 말을 붙인다. 그녀와 그가 처음 만났을 때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 때 엘리베이터에서 정신없었고, 결국 그녀가 그를 차에 태우게 되었다. 그 때만 해도 얼굴은 잘 생겼지만 까칠한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데…
“무슨 옛날? 아아, 기억난다. 누군가가 아주 졸라 대서 결국 차에 타 준 거 말이지?”
“뭐라고? 사람들에게 쫓기는 것 불쌍해서 태워줬더니, 여기서 내려 볼래?”
그녀는 짐짓 협박을 하는 말투가 된다. 그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자신 역시 장난을 치는 것이다. 이렇게 둘 사이가 가까워 졌다. 그 때 당시에 이 자리에 있었던 사람 중 없는 이는 미래다. 갑자기 그녀 생각이 떠오른 빛나. 요즘 통 연락도 안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약간 슬퍼졌다.
그에게 그녀 소식을 묻기가 좀 그랬다. 원래 둘이 절친이었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미래의 소식을 묻는 게 창피했다. 그는 아마도 두 여인이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나 보다.
이러니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모를 수밖에. 뜻 밖에 만남. 둘은 어색한 인사를 나눈다.
“안녕?”
“어? 김미래… 잘 지냈어?”
그게 끝이다. 더 이상의 이야기에 진전이 없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의 재회는 늘 이렇다. 아무리 원래 친하게 지냈어도, 그리고 가끔 서로가 보고 싶어도, 같은 공간에 있는 한 남자의 존재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미래는 많이 예뻐졌다. 매우 늘씬해졌으며 얼굴에 한 화장도 전문가의 솜씨 같았다. 그 동안 얼굴에 손을 댔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섹시함과 청순함을 같이 갖췄다고 해야 하나? 수영 선수가 화장을 자주 할 일이 없으니, 이렇게 화장을 하면 확실히 예쁜 것이다.
“뭐 해? 둘이… 자, 짐 정리 하는 거 도와줘야지. 내가 아는 사람이 너희 밖에 없어서 부른 거야. 올라가자. 하하.”
둘의 어깨에 어깨동무를 하는 우혁. 그는 두 여인의 심리 상태를 알고 있다.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로서는 자신을 두고 하는 사랑의 경쟁 관계가 과히 보기 좋지 않았다. 마음이 불편했다. 자신으로 인해서 둘의 친했던 사이가 멀어진 것 같아서. 그래서 불렀다. 일부러 서로에게 말을 하지 않고.
그에게 억지로 끌려 올라가는 두 여인. 그는 모른다. 그의 존재가 있는 한 둘 사이는 절대 회복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단순하다. 아무래도 어렸을 때 사회화 과정을 제대로 겪지 못해서 이런 것 같았다. 서로 만나게 하면 다시 친했던 감정이 샘솟을 줄 알았나 보다.
9층에 있는 그의 아파트. 14평짜리 소형이다. 그야 말로 옛날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곳이다. 이삿짐센터에서 물건을 옮기긴 했지만 여러 가지가 남았다. 자신의 물건과 짐 정리, 그리고 청소.
“자, 내가 짐을 옮길게. 옮긴 자리는 빛나가 청소를 해줘. 그리고 미래야, 여기다 옮기면 사진 좀 예쁘게 놔 줘. 내 어렸을 때 사진 감상하면서, 하하.”
“응…”
“알았어…”
대답을 하지만 썩 내키지가 않다.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약간 불편해서다. 그런 그들의 음성과 표정을 전혀 모르는 척 하고 그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도 말없이 그를 도왔다.
“뭐 이렇게 말들이 없어? 원래 너희들이랑 만나면 항상 너희들이 조잘거리고 난 듣는 입장이었는데… 자, 자.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봐. 그래야 일 하는 재미도 있고, 금방 일이 끝난단 말이야. 미래부터. 요즘 어때? 소속사에서 연기 수업은 제대로 잘 받고 있는 거지?”
“연기라고? 미래 너 수영 안 하는 거야?”
“몰랐어? 지난 KBC배 대회에 안 나간 거 보면 못 느꼈어? 난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깜짝 놀라 물어본 빛나의 질문에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미래다. 그녀는 약간 화가 났다. 자신은 그녀의 수영 대회의 결과를 다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는데 말이다.
더구나 요즘 너무 바쁘다.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아서 사랑하는 사람의 경기를 응원도 하지 못할 정도로. 그러다가 인터넷으로 올라온 소식만 간간히 스마트 폰으로 확인하며 그에게 축하 메시지를 항상 날렸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빛나의 소식도 알게 된다. 그녀가 점점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는 것. 예전 같으면 축하해 줄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왠지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녀의 소식을 이렇게 잘 알고 있지만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는 전혀 모른다는 게 또 기분이 나빴다.
“우리 미래는 이제 연기자가 될 것 같아. 케이스타에 소속되어 있는데, 내가 알아보니까 엄청난 곳이더라고. 사장도 미남이고. 아마 나만큼 미남이지? 하하.”
그의 썰렁한 농담에 전혀 웃지 않는 두 여자. 그래서 그는 머쓱해 진다. 그 이후에도 그랬다. 그는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두 여자는 불편해 했고, 서로에 대한 감정만 확인했다. 이제는 예전처럼 서로의 존재가 힘이 되지만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빨리 가 주었으면 좋겠다. 이 불편함을 못 참고 말이다. 그래야 이 아파트의 주인과 단 둘이 있을 기회가 생긴다.
그래서 더욱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일부러 만든 어색함, 그리고 불편함. 서로 이것을 못 이기고 항복하기를 바라는 것인데…
당연히 누가 항복하겠는가? 모든 짐 정리와 청소가 끝날 때까지 그런 것은 없었다. 모처럼 소속사에서 나와 그와 데이트를 꿈꾸었는데, 이렇게 되니 속상한 미래. 그리고 그의 어머니에게 며느리 소리까지 들었는데 언급된 자신의 라이벌을 만나 경계하는 빛나. 이들의 싸움은 사실 지금부터 시작이다. 물론 우혁의 피곤함도 이제부터다.
============================ 작품 후기 ============================
주인공이 까칠하게 나오죠? 인간 관계도 서툴고. 그런데 반대로 정답고 사람 좋게 표현했다면 과거의 배경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부모님은 사람 좋게 표현 했네요. 사람과 부대끼면서 점점 사회화 되는 과정을 그리려고 합니다. 언제 그렇게 될 지는 저도 미정이네요.
꿈지기님의 댓글을 보니 그렇군요. 아가미 호흡과 허파 호흡. 그런데 저도 궁금한 것이 과연 인어는 아가미일까요? 허파일까요? 아무도 모르겠죠? ㅎㅎ 그냥 모른 채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혁이도 마찬가지겠죠? 그냥 이건 밝히지 않으려고요. 밝힐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한 말입니다. 이론적으로 판타지를 설명하기는 너무 힘이 듭니다. ㅠㅠ
식사 맛있게들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