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48화 우승은 5레인이다
대회 4일째는 스타트에서 문제가 없었는데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2위. 이번 대회에서 한국 선수 중에 가장 훌륭한 성적이다. 그래도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사실 연맹도 마지막을 앞두고 우승 하나 없는 무관으로 귀국할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예상은 했다. 박태원의 은퇴를 늦추려고 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좀 더 유망주를 기다려주기를 부탁했건만.
- 이미 은퇴 시점을 놓쳤습니다.
이 말로 그는 선수 생활의 방점을 찍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이 서른. 전성기를 지난 시점에서 자신과 비슷하기라도 할 만한 실력의 후배를 기다리다가 그는 늙고 말았다. 그나마 마지막 세계 대회에서 그는 끝마무리를 아름답게 마쳤다.
그에게 있어서는 다행이었지만 연맹에 있어서는 불행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대회 5일 째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김훈은 예선 탈락. 찬규가 결선. 그리고 우혁도. 예선 2위의 기록이다. 기대해볼만 하다.
모처럼 찾은 선수 대기실. 연맹 회장을 비롯하여 부회장, 그리고 임원들 평소 훈련 때 얼굴을 자주 비추지 않아 이미 낯선 얼굴이 되어 버린 태형광 감독까지 모두들 우혁을 기대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우혁아, 할 수 있지? 그럼. 할 수 있을 거다. 허허허.”
감독은 그를 친근하게 불렀다. 언제 그렇게 친했다고?
“내 너를 알아 봤다. 처음 봤을 때부터 척 보고 우리 수영계를 이끌 재목이라고 생각했지.”
“체격도 별로고 나이도 많다고 그러셨는데?”
“내… 내가 언제 그랬… 하하. 이 녀석. 장난치는 것 보게. 회장님 제가 워낙 선수들과 격의 없이 지냅니다.”
“그런가? 보기 좋네. 요즘은 그래야 해. 때가 어느 때인데 줄빠따 때리고 윽박지르고, 그런 것은 없어야지.”
“그럼요. 애들이랑 까똑도 합니다. 가끔 고민을 들어주고 애로사항 역시 해결해 줍니다. 그러다 보니 우혁이처럼 저를 친 아버지처럼…”
“저 애로사항 있습니다.”
그의 말을 끊는 우혁. 기분은 나빴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감독은 성질을 죽이며 그를 보았다. 말해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는 형광이 아닌 연맹 회장을 보며 말했다.
“저희도 일본처럼 경기장 하나 근사한 것 지어주세요. 그리고 훈련장도 더 필요하고요. 기반시설이 낙후되어 있으니 경쟁이 안 되는 겁니다. 그나마 있는 게 태릉인데, 그것도 사실 여기 와 보니 후져요, 후져.”
“아니, 이… 이보게…”
연맹의 부회장은 말을 잃은 회장을 대신해서 그를 불렀다. 웃음기가 없어진 표정. 그뿐만이 아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현실적인 것이 아닌 비현실적인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안 돼요? 역시 안 되는 건가요?”
“정부에서 예산이 책정 되네. 시설 확충에 대한 것은 턱 없이 부족하네. 다만 지금 광주에 짓고 있는 새로운 수영 센터는 최신식으로다가…”
“그럼 혹시 제가 오늘 우승을 하면 좀 나아지나요?”
질문 자체가 너무 단도직입적이다. 확실히 연맹 사람들과 우혁은 맞지 않는다. 그들의 얼굴에 드러난 노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경기 전에 너무 오래 선수를 붙잡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태감독.”
“네, 회장님.”
“오늘 우승하면 금일봉을 좀 전달하게. 여기 있네.”
“그거 그냥 나중에 시설 지을 때 보태세요. 어쨌든 가신다니까 안녕히들 가세요.”
마지막까지 이 모습이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왠지 모르게 통쾌했다. 다만 빛나는 걱정이 되었다. 자꾸 연맹이랑 부딪히는 우혁이 나중에 눈밖에 날까봐.
곧 이어 1500미터 결선을 위한 선수 입장이 있었다. 그로서는 마지막 기회다. 그가 참가할 수 있는 마지막 경기였기에. 이번 대회에서 그는 계영과 혼계영을 불참했다. 그걸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했는데 아직까지 다른 선수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그를 영욱이 임의로 제외했다.
어차피 많은 나라가 참가하는 대회가 아니다. 결국 한, 중, 일 각각 한 팀씩 참가하는 경기가 될 테니 바로 순위 결정전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가 끼든 그렇지 않든 거의 3위가 확정이었다. 대한민국의 선수층이 너무나 얇기에.
스타트대에 선 그는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부모님이 와있었다. 오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마지막 경기는 꼭 보고야 말겠다고 하시며 구경 오신 것이다. 부담이 더 커졌다. 그런데 왠지 자신이 있었다. 이 느낌 그대로 가지고 가리.
삐익. 출발을 했다. 긴 잠영. 그리고 얼굴을 내밀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양옆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으니 당연히 그가 선두다. 속도를 바로 내는 우혁. 대단한 속도다. 후반 배려는 전혀 할 뜻이 없어 보였다. 덩달아 속도를 내는 양 옆의 선수들. 각각 중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장거리 수영선수다.
원래는 장치앙린이 왔다면 중장거리에서 그의 천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혁의 입장에서는 다행이도 그는 오지 않았다. 그 대신에 참여한 신예 중국 선수. 샤오 헤이씽. 그가 예선 1위다. 4레인을 점령하고 있는 그는 불같은 속도로 우혁을 따라잡았다. 6레인은 일본 선수. 그 역시 마찬가지다. 대체적으로 신진들은 이렇게 초반 스퍼트를 잘한다. 경험이 있는 선수들은 자신과의 싸움으로 나중을 기약한다.
그래서 지금은 4, 5, 6레인의 싸움이다. 그 중 꼭짓점이 우혁이다. 그가 리드를 하고 있는데 그대로 양 옆의 선수들이 따라오며 결국 이 셋이 나중에 지치거나 아니면 끝까지 유지하는 골격으로 이 1500미터가 이루어질 것이다.
1500미터 경기는 약 15분이 걸린다. 그리고 다른 경기에 비해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지금이 그렇다. 400미터 턴을 하는 시점에서 1위와 꼴찌의 격차는 거의 반 바퀴. 안타깝게도 그 꼴찌가 찬규다.
여전히 그의 속도는 줄지 않았다. 아니 더 늘고 있는 것 아닌가 의심이 된다. 아직 반도 돌지 않은 레이스. 영욱은 침을 꿀꺽 삼킨다. 그가 체력 안배를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돌다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혁아, 조금만 더 페이스 조절을… 너무 초반부터 속력을 냈다. 제발…’
지켜보고 있는 입장에서는 침이 마른다. 수영을 배운 기간에 대비해서 이번 대회는 사실 참가에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욕심이 생겼다. 생각보다 더 잘해주었다. 단거리는 입상하지 못했지만 400미터 3위, 800미터 2위다. 1500미터에서 우승을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금상첨화라는 말을 이 때 쓰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혹시 무리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지켜보는 이가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그를 못마땅해 했던 연맹 임원들조차 그를 응원하고 있다.
800미터 턴. 여전히 그는 1위다. 그리고 샤오 헤이씽은 이 시점에서 뒤로 쳐지기 시작했다. 이미 6레인에 있던 일본 선수는 아까부터 나가떨어졌다. 페이스 조절을 잘 못한 탓이다. 이 두 명 다. 대신 3레인에 있는 일본 선수가 이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1000미터 쯤 갔을 때 그는 샤오 헤이씽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사토 료이치. 일본의 신성. 드디어 각국의 잠룡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마지막 스퍼트를 향해 그나마 가장 페이스 조절을 잘 한 것이 사토인가? 아니면 처음의 속도에서 전혀 줄지 않고 힘찬 스피드로 여전히 리드를 하고 있는 우혁인가? 그것도 아니면 잠시 뒤쳐졌지만 막판에 다시 힘을 낼지도 모르는 샤오인가?
결과가 예측 불허로 접어든 때는 1400미터. 100미터를 앞두고 드디어 우혁이 지치기 시작한 것이다. 확실히 오버 페이스였다. 그나마 호흡 능력이 좋은 그였기에 지금까지 잘 버틴 것이다. 하지만 호흡만 잘한다고 수영에서 우승을 한다면 기네스북에 수중호흡을 가장 잘 참는 사람이 수영을 배워서 올림픽마다 금메달을 땄을 것이다. 체격과 체력. 그리고 기본기. 이 모든 것이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
“하느님 아버지. 우리 우혁이에게 힘을 주소서. 하느님 아버지.”
그의 어머니가 기도를 올렸다. 이미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마음을 졸이며 하는 기도다. 그의 아버지는 얼굴을 굳혔다. 지금 얼마나 자신의 아들이 힘들어 할지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마음이 아팠다. 왜 모든 부모가 자식이 운동을 한다고 하면 말리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유카리 역시 그에게 동화되어 갔다. 처음에 그의 매력적인 얼굴만 보고 반했던 그녀. 어린 나이였기에 외모가 그들에게는 전부일 수도 있다. 그런데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다. 같은 일본 선수가 아닌 그를 응원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오니짱, 힘 내…”
빛나는 어떤가? 그녀는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다. 그냥 속에서 복받치는 슬픔이 그녀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그녀의 삶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그의 손짓 하나 하나가 그녀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장면이다. 그래서 지금 그의 모든 것을 담으려 눈물을 흘리는 그 눈을 감지도 못하고 있다. 단지 손으로 입만 가릴 뿐이다.
50미터 턴. 사토가 그의 발끝까지 추격을 해왔다. 뒤를 볼 수 없는 우혁. 그러나 뭔가 스물스물 올라온다. 상대가 발끝까지 왔을 것이라는 강한 느낌. 다시 힘을 냈다. 긴 잠영. 이럴 때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얼굴을 다시 내밀고 마지막 스퍼트를 가한다. 그래도 10센티미터씩 그리고 5센티미터씩 좁히는 적수. 거의 어깨를 나란히 할 때 이미 마지막 골인지점이 보인다.
막상막하다. 이제 누가 이기는 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때쯤 찍었다. 벽의 상단을. 결과는 바로 나온다. 5레인. 그가 우승자다.
“와아아아아.”
“우우우우.”
관중들은 놀라운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부둥켜안는 그의 부모. 뛸 듯이 좋아하는 한국 수영의 관계자들. 경기장 주변에 한국 선수 대기실도 난리법석이다. 영욱만이 코치의 무게를 잡으며 살짝 눈물을 찍고 흘리지 않은 척 하고 있다. 나머지는 눈물범벅이다. 빛나는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러내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렇게 사람을 감동시킬 줄 안다. 그래서 그는 자체로서 감동이다. 우혁은 자신의 눈에서 무언가 쏟아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라는 것. 바로 이럴 때 흘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닦지 않았다. 대신 손을 흔들었다. 그를 봐주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새로운 수영 영웅의 탄생이다. 드디어 그가 헤치고 갈 목표를 위한 시발점이 오늘 시작이 되었다.
============================ 작품 후기 ============================
국제대회 첫 우승입니다. 물론 가야 할 길은 아직 멀고도 험합니다. 아시안 게임도 있고 세계 선수권 대회도 있고, 올림픽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국제 대회 첫 우승은 나름 의미가 깊을 것 같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