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75화 자리 양보
일수가 100미터 8위를 차지했다. 빛나는 놀랍게도 100미터 3위를 했다. 그리고 가희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50미터 배영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우혁의 이름은 없었다. 그가 참가한 400미터. 대회장에서 사람들은 그의 기권 소식을 들었다. 아직까지 그 정확한 이유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기자들은 그렇게 가만히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곧 병원에 들이닥쳤다.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모두들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부상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만…”
“어느 부위죠? 어느 부위입니까?”
“얼마나 아프기에 기권까지 하는 거죠?”
시장판이다. 이런 북새통이 짜증이 난다. 그래도 순빈은 큰 소리로 그들에게 돌아가 줄 것을 당부했다.
“자세한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심각한지 아닌지 알려면 시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 주세요. 최우혁 선수가 빨리 쾌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서서히 기자들이 움직인다. 그들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몇몇 기자들은 그의 담당 의사를 찾는 중이다. 순빈이도 안다. 그들이 답을 얻으려고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봤자 별수 없다. 이미 조치를 다 취해 놓았다. 의사도 그와 똑같은 답변을 준비해 놓았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있다. 오후에 영욱은 심각한 얼굴로 그의 곁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가 무리한 훈련을 했을 때 더 강제적으로 말렸어야 했다. 그러지 못해서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감독님 저 괜찮데요. 큰 문제없으니 어쩌면 내일이라도 시합에 나갈 수 있을 겁니다.”
“…….”
그 말을 듣고 영욱은 조용히 침묵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는 우혁이 얼마나 수영을 좋아하고 대회를 기다려 왔는지 잘 알고 있다. 이렇게 승부욕이 강하고 경쟁을 좋아하는 이는 박태원 이후 처음이다.
“그래, 일단 푹 자고… 그리고 내일… 내일 일어나서 보자.”
“네…”
곧 이어 다른 선수들도 찾아 왔다. 빛나와 일수, 그리고 가희뿐만 아니라 평소에 그와 깊은 친밀도를 가지지 못했던 선수들도 그의 상태를 확인하러 왔다.
“괜찮아, 우혁아?”
“오라버니! 괜찮아?”
“형! 어떻게 된 거야?”
“괜찮은 거냐?”
다들 한 마디씩 한다. 우혁은 언제나 그렇지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얼굴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웃거나 짜증을 내면 변화된 모습에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하며 걱정을 할 것이다. 차라리 평소처럼 하는 게 낫다. 역시 찬규가 그것을 보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별로 안 다쳤나 보네. 멀쩡하잖아.”
“그만해.”
“넌 맨날 저놈만 챙기더라. 쟤가 네 남자친구냐?”
“뭐라고?”
“자, 자. 여기까지 와서 싸우시는 거예요? 환자 앞에서 이러지들 마시고…”
빛나와 찬규의 말싸움을 일수가 오히려 어른스럽게 말리고 있다. 어쨌든 이로서 그가 큰 부상은 아니라고들 생각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려고 하는가? 우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일 경과를 보고 모레쯤 출전해야지.”
“그래도 된데?”
“아마도…”
빛나가 다시 한 번 묻는 물음에 그는 확신하듯이 대답을 했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쓸 데 없는 걱정을 주고 싶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 그리고 여전히 오만한 말투. 그를 약간이나마 걱정했던 친분 옅은 동료들은 하나 둘씩 인사를 하고 떠났다.
“난 결심했어. 오늘 오라버니를 병간호하기로. 그러니까 모두들 나가 줘.”
“너 미쳤니? 내일 경기인데. 헛소리 하지 말고 가자.”
“어쭈? 네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감히 나에게…”
“아이고, 두야. 도대체 이 말은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일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가끔 느끼지만 가희는 금세 언어를 익히는 것 같았다. 원래 재일교포 3세였기도 했고, 처음 일본에서 만났을 때도 발음이 어눌했을 뿐이지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여기 와서 배운 말들. 도무지 제대로 된 것이 별로 없었다. 오라버니는 사극을 보다가, 그리고 조폭 영화를 보다가 방금 쓴 말은 배웠을 것 같다.
어쨌든 결국 그녀는 일수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그렇게 남은 사람. 이제 빛나뿐이다. 그녀의 눈빛. 슬픔이 묻어 나왔다. 오늘 3위를 한 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미래는 알고 있어?”
“알리지 마.”
“나중에 서운해 할 걸?”
“또 고자질해라. 아주 널 미워해 버릴 거다.”
“휴우.”
하지만 그가 착각한 게 있다. 언론. 그리고 인터넷. 금세 그녀의 눈과 귀에 들어갔다. 그렇게 보도를 자제해주기를 바랐는데, 각종 추측성 기사들이 포털 사이트를 도배하고 있다. 심지어 심각한 부상으로 은퇴위기까지 갔다는 내용까지 있었으니 미래는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미래씨, 왜 그래? 자꾸 대사 못 치고 있어.”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그녀는 계속 NG를 내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서 그랬다. 이미 매니저에게는 오늘 촬영을 끝내고 모든 스케줄을 조정해줄 것을 부탁했다. 병원에 가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마음에 연기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렇다고 사정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이래저래 마음만 급해지기에 실수 연발이고 대사는 자꾸 까먹는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스케줄이 끝나고 병원에 도착했다. 빛나가 있었다. 그를 간호하려고 남은 것 같았다. 선글라스에 모자. 예전에 우혁이가 자주 하던 짓이다.
“우혁아!”
“어? 어떻게 알았지? 네가 말했어?”
“무슨 소리야? 나한테까지 숨겨서 뭐하게? 그러니까 훈련 좀 작작 하라고 그랬지?”
“오자마자 잔소리네. 안 아픈 게 더 아프게 생겼다.”
빛나는 그녀와 그의 대화를 보고 살짝 소외감을 느꼈다. 이렇게 셋이 같이 마주한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다. 그런데 친밀감 대신 거리감이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의 여자 친구. 딱 봐도 자신이 있을 만한 그림이 아니다.
“안 바빠?”
“겨우 스케줄 조정했어. 넌 내일 경기 있잖아. 어서 들어가 봐.”
“그… 그래. 잘 됐네. 우혁이 잘 부탁해.”
“응. 고마워.”
고맙다는 말. 그녀에게 그 말을 들으니 살짝 비참했다. 미래는 이제 그와 가족 같다.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것을 보니. 사실 마음속으로는 그녀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내일 시합이고 뭐고 그녀가 간호를 하려고 한 것이다. 아까부터 순빈이가 자신이 남겠다고 했지만 조금 있다가 들어간다는 말로 그를 안심시켰다. 우혁은 모두 다 들어가라고 떼를 썼지만 환자가 강제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 상황에서 온 그의 여자 친구다. 이제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들어가는 거야? 내 걱정 마. 아마 내일 경기장에서 볼 수 있을 거야.”
“꿈에도 그런 생각하지 마. 이번 대회 무조건 포기해.”
“무슨 소리야? 넌 네가 아프다고 드라마 포기할 수 있어?”
“응. 난 되거든? 너도 그러니까 이번 대회 포기해. 앞으로 많아. 아시안 게임. 세계 선수권 대회. 그리고 올림픽. 그것을 먼저 생각해 봐.”
“이…”
할 말이 없었다. 그러느라 빛나가 조용히 사라질 틈을 주게 되었다. 그녀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티격태격했다. 그렇다고 사이가 나빠지는 싸움을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돈독해진 연인이다. 걱정을 하고 그것을 무마시키려 노력하는 가벼운 말싸움. 이게 바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제발 몸 좀 아껴. 너 어떻게 되면 내가 제대로 살 수 없단 말이야.”
“아끼면서 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이 그렇게 무리하게 훈련을 하면 어떻게 해? 휘유, 정말. 내가 못 산다. 못 살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따뜻한 정이 그녀의 눈에 숨어 있다. 그리고 그의 곁에 더 가까이 붙었다.
“이렇게 아프면 뽀뽀 밖에 할 수 없잖아.”
얼굴을 붉히는 그녀.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붉히는 우혁. 그들은 약속을 했다는 듯이 입을 맞춘다. 그렇게 악몽으로 시작된 하루의 끝은 그래도 달콤했다.
============================ 작품 후기 ============================
오늘 10연참. 어제까지 23연참. 이 정도면 칭찬 받을 수 있을까요? 하하!
힘들여서 썼으니 많은 분들의 격려와 칭찬을 원합니다.
이따가 자정에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