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54화 복잡해지다
다음날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였다. 인간관계에서 타인을 신경 쓴다는 것은 점점 사회화가 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때로는 그 과정에서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어떨 때에는 아프기도 하다. 그러나 그 상처에 딱지가 지고 아물면 같은 일을 다시 반복하려 들지 않는다. 그게 대인 관계다.
그가 겪을 대인 관계는 또 있다. 연맹에 불려가고 AK 스포츠에 불려간다. 각각 그가 다 해야 할 일이다. 비록 기분이 좋지 않더라도 사람을 상대하는 데 항상 기분대로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요즘 배우고 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이제 방학이 끝났다. 학생들은 드디어 다시 학교로 불려가고 아침부터 항상 진을 치고 있는 소녀 팬들도 오후 나절부터만 걱정하면 된다.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니 말이다.
“그럼 부탁해요, 형.”
“그래. 운동 열심히 해.”
드디어 다시 훈련장으로 가게 된 우혁을 내려주고 순빈은 그의 아파트로 갔다. 이사를 위해서였다. 이제 20평대 아파트. 그리고 보안이 철저히 잘되는 곳으로 옮겼다. 이전 아파트는 월세지만 이제는 전세다. 부의 축적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광고를 세 번이나 찍었는데, 마지막 광고 계약은 억대를 돌파했다. 그의 몸값이 상승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매우 굳어 있다. 도무지 전화를 받지 않는 빛나. 단단히 속이 상했나 보다. 덕분에 미래의 전화도 건성으로 받았다. 무슨 일 있냐는 물음에 답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럴 때에는 누가 옆에서 조언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을 텐데.
‘어디서 이런 문제를 상담을 받는단 말인가?’
훈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그는 평소에 안하던 눈치를 보고 있다. 혹시라도 그녀가 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아직 오지 않았다. 한숨을 쉰다. 아쉬움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 그는 그녀를 마주하기가 두렵다. 그녀의 반응이 어떨지가 두려운 것이다.
이제 다시 외톨이 생활로 돌아왔다. 일수도 학교에 나가니 당분간 오전은 다시 외로운 혼자만의 싸움이 될 것 같았다. 훈련장도 많이 썰렁해졌다. 학교가 개학을 하니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 거기다가 당분간 대회가 없다. 결정적으로 그의 팬들이 모두 다 학교에 갔다.
원래 이런 한가함은 그가 좋아하는 것인데, 지금은 외롭다. 드디어 그도 하나의 인간이 되었나 보다. 사회적 인간 말이다. 아무도 그를 불러주지 않는다. 수영장에서 자유롭게 수영을 하는 그를 곁눈질만 할 뿐.
이럴 때는 차라리 얼마 전에 열렸던 동아시아 오픈 챔피언쉽이 그리웠다. 그래도 시끌벅적했고, 별로 안 친했지만 동료 의식이 생겼던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일본 여자애도 자신을 ‘오니짱, 오니짱’하며 불러댔다. 그 때는 참 귀찮았는데 지금은 그것도 아쉬우니 사회화가 아주 잘 되고 있는 모양이다.
“오니짱!”
잘 못 들었나? 너무 그 때를 그리워하다 보니 그의 귀에 환청이 들리나 보다. 유카리의 목소리가 들리다니? 이럴 때는 잠수가 최고다.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버릇이라 가끔 그런 짓을 하고 있는 우혁을 이제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
생각할 것이 참 많나 보다. 이번에는 정도 이상 물속에 오래 있는 중이다. 사실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실제로 호흡을 하고 있으니. 하지만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관심도가 줄었기에 그가 이렇게 무사태평할 수 있는 것인데…
“오니짱!”
풍덩. 누군가가 물에 뛰어 들었다. 그리고 그의 곁으로 재빨리 수영을 하며 가까이 다가가면서 잠영을 시도했다. 그렇게 보이는 우혁. 그녀는 수영장 바닥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은 평안한 얼굴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전혀 고통스러운 얼굴이 아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숨을 오래 참을 수 있는 사람도 있으니. 그녀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바로 앞에서 자신도 똑같이 팔짱을 끼고 앉았다. 돌연 그의 눈이 커졌다. 매우 재미있는 표정이다. 깜짝 놀란 그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고 묻는 얼굴.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위로 가리켰다. 올라가면 말해준다는 내용인 것이다.
“푸핫!”
“푸하…”
숨을 오래 참았다가 수면위로 나오면 이렇게 한껏 참았던 숨을 내 뱉거나 들이마시기 위한 작업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것은 가짜다.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숨을 참은 적이 없으니 말이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와아, 정말 숨 오래 참네요. 역시 오니짱 최고!”
그녀는 그가 물어본 말에 대답을 하지도 않고 그의 숨 참기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엄지 손가락을 치켜드는 그녀. 그리고 젖은 머리. 예쁘긴 하다. 우혁도 그녀가 왜 예쁘게 보이지 않겠는가? 그도 사람이고 남자인데. 하지만 지금 빛나만으로 머리가 복잡하다. 궁금한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면 다시 무관심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래서 가장자리로 수영을 해갔다.
“어? 오니짱? 궁금하지 않아요? 내가 왜 왔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그가 가만히 있으면 결국 그녀가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는 다 알고 있다. 이제 다른 훈련 스케줄을 향해서 가면 된다. 개인 트레이너가 다가와서 체력훈련을 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페달 돌리기부터 시작하라고.
“저 이제 한국 선수 됐어요.”
하지만 훈련을 하러 가지 못하게 하는 말. 놀람의 연속이다. 한국 선수가 되었다니? 얼마 전까지 일장기를 시상식에서 올라가게 했던 소녀다. 그렇다면?
“엄밀히 말하면 한국 선수가 될 예정이죠. 아마 별 문제없을 거예요. 귀화 추진 중이니…”
그랬다. 역시 귀화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화라니? 아무리 재일동포 3세라지만 수영에 관한한 훨씬 시설 및 저변이 낙후된 우리나라를 선택하다니?
“귀화라고? 왜? 어째서?”
“어? 드디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와아, 신기하네요. 오니짱이 이렇게 놀라다니. 역시 귀화를 선택하기를 잘 했다.”
그녀는 다시 그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재미있다는 듯 표정을 밝게 하고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당연히 그는 뒤로 피할 수밖에 없다.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예쁘기는 하지만 요즘 여자에 엮여서 좋은 꼴을 못 봤다. 더 이상 아는 여자의 숫자 제한이라도 해야 할 판에 귀화를 하다니? 무슨 속셈인가?
“제가 귀화한 게 궁금해요? 왜 했을까요? 알. 아. 맞. 혀. 보. 세. 요.”
설마 자신 때문에. 그녀의 말투가 주는 뉘앙스가 그렇다. 그러나 국적에 관한 것을 단지 며칠 보지 못한 남자 때문에 결정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분명히 다른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와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에.
사실 따지고 보면 잘 된 일이다. 우리나라 수영계를 위해서도 그녀와 같은 실력자가 귀화를 해준다면 쌍수를 들고 반길 일 아닌가? 물론 그가 대한민국의 수영계를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메달권이 가능한 스타들이 계속 탄생해야 한다는 점은 지난 대회에서부터 공감하고 있던 부분이다.
“됐어.”
그는 등을 돌린다. 관심이 없다는 태도. 그러나 곧바로 그녀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렇다고 그를 막지는 않았다. 그가 그대로 그렇게 앞을 향해서 걷자 그녀 역시 뒷걸음질 친다.
“알고 싶지 않아요?”
“말해준다면 듣겠지만 굳이…”
“휴우, 말해줄게요.”
그녀는 졌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진짜 이길 수가 없었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 사나이는. 결국은 다 털어놓게 만드는 남자다.
그런데 그녀의 그런 결심도 무산이 될 것 같았다. 드디어 빛나가 온 것이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유카리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더구나 우혁과 함께 있는 모습에 속이 상했다. 안 그래도 냉전 상태다. 하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지나쳐 갔다.
“빛나야?”
그가 부른다. 못 들은 척 하는 그녀. 그리고 그 둘을 바라보는 유카리. 새로운 관계의 형성인가? 분명한 것은 그녀의 귀화로 인해 더 복잡해졌다는 사실이다. 흥미롭다. 그가 점점 인간관계를 넓히는 과정이. 물론 이것이 단순히 확장된다는 것보다 오묘해졌다는 말이 더 맞겠지만.
============================ 작품 후기 ============================
댓글 잘 보았습니다. 그리고 귀중한 지적 감사드립니다. 몇 가지 변명으로 느끼실지도 모르지만 제 입장에서 언급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1. 본문의 삽입 내용 중 우혁의 변화했다는 것이 자주 언급되어 몰입에 방해가 된다. - 의도적으로 넣기 시작했습니다. 앞 쪽에 댓글들 보면 주인공이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꽤 계십니다. 설명이 부족한 것 아닌가 생각이 되어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또 과도해졌다면 자제하겠습니다.
2. 순애물과 하렘물 - 정의를 좀 더 명확하게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순애물은 처음 부터 한 여자만 만나서 계속 그 여자와의 사랑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후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인가요? 제가 생각하는 순애물은 주인공인 한 여자를 고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서 글을 쓴이와 글을 읽는 분의 괴리감이 생성되는 것 같습니다. 즉, 이 글은 순애물이기는 하되 여러 여자가 주인공 주변에서 끊임 없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한 여자를 고르는 과정이 진행됩니다. 이게 제가 구상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하렘을 가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 여자만을 그리는 것은 주인공의 선택 이후 로맨스 부분이 너무 밋밋하게 가지 않을까 생각되는 우려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택 전 과정, 심지어 선택 후 과정부터 최종회까지 주인공의 여자가 누구라고 확정을 짓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야 읽는 분들이 좀 더 흥미를 느끼시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러나 이 부분이 너무 과하게 그려져서 답답함이 유발되신다면 연참이 있지 않습니까? 하루 4-5연참 하고 있습니다. 이게 부족하신지요? 아니면 연참을 줄이고 과정을 짤막하게 해서 글을 빨리 진행하는 게 좋으신지요? 약간 모르겠네요.
3. 이 글의 장르 : 이것도 글을 쓴 이와 읽고 있는 분들의 괴리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명확히 설명한 부분입니다. 스포츠 로맨스. 스포츠와 로맨스의 결합입니다. 연애물이 상당한 비중으로 그려지는 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스포츠만 그린다면 단연컨데 이 글 100회 미만으로 끝납니다. 주인공이 성장하고 그 속도가 놀랄만 하니 아시안게임 올림픽 금메달 따고 끝. 그렇다고 지루하게 맨날 연습과정만 넣는 것은 말도 안 될 것 같고요. 양념 정도가 아니라 로맨스는 재료가 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도 타협을 하겠습니다. 원래 200에서 300회 정도 생각하고 쓴 글이지만 연애부분이 너무 과해서 답답하다 생각이 되신다면 과감하게 줄이고 대신 글의 전체 길이가 짧아지는 상황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스포츠 쪽으로 가겠습니다.
모든 분들의 직언은 글을 쓰는 제가 좀 더 나아지기를 원하시는 것이겠죠. 그 부분 너무 고맙습니다. 연재물을 쓰는 작가가 댓글에 둔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이 되기도 하고 댓글에 흔들려도 안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인지라 댓글에 따라 가끔 글이 조금 수정되기도 하고 일종의 타협과정을 거치기도 하네요. 무엇이든 제가 부족해서 그럴 것입니다. 1월 초에 글을 쓰기 시작해서 이게 세 번째 작품. 2개월동안 정말 많이 썼다고 생각합니다. 전작들의 회수와 지금 쓰는 글의 회수를 합쳐도 220편 이상이 나올 텐데, 하루 3연참 이상은 최소한 하고 있습니다.
다소 답답하실까봐 연참을 통해서 극복을 하려고 하는데... 그렇다고 질보다 양 소리도 혹시나 들을까봐 나름 꼼꼼히 체크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독자님들의 반응을 먹고 사는 사람이니 지적은 계속 해주시되 글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한 번만 더 생각을 해주시기를 간청하옵니다.
참, 비축분이 있습니다. 따라서 방향성에 대해서는 독자님들과 충분히 논의한 후 제가 원하는 곳이 아닌 다른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면 비축분을 버릴 수는 없고 다 몰빵한 다음에 그 방향으로 쓰겠습니다. 이로 인해 답답하거나 몰입에 방해되는 부분을 미리 써 놓은 과정이 노출될 것 같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