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126화 400미터 우승, 그리고 첫 데이트
400미터 결승. 예전에는 도전자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국내 무대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이제는 도전을 받는 입장이다. 김훈과 박찬규. 그들의 도전은 미약했었다. 하지만 요즘 그와 자주 훈련을 하며 모의 시합을 하다 보니 그들의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물론 그를 위협할 수준은 아직 못 되었다. 다만 그의 훈련 량이 이번에 많지 않아 내심 우승을 노려보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원래 800미터와 1500미터에 특화된 선수들이다. 그러다가 우혁을 보고 깨달은 점이 있다.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모를 이 신예는 1500미터를 주 종목으로 하다가 점점 단거리를 정복해나가고 있었다.
그들 역시 배웠다.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포기하는 것을 일렀다. 일수와 더불어 그들 역시 이번에 대통령배는 충분히 노릴만한 게 우혁의 슬럼프로 인해 반사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헛된 꿈이었을까? 그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200미터를 향하는 지점에서 김훈과 찬규는 많이 뒤쳐져 있었다. 오히려 우혁의 뒤를 따라잡고 있는 것은 병묵이었다. 그 역시 요즘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P&A 쪽은 최근 유망주들을 모두 계약하고 있다. 지금은 S 생명이 우위에 있지만 언젠가는 따라잡힐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국 수영 계에서는 반길 일이다. 어느 한 쪽이 독주하는 것은 사실 그렇게 좋은 방향이 아니다. 경쟁은 라이벌이 있어야 제대로 이루어지는 법. 우혁의 독주는 우물 안 개구리식이다. 한국과 아시아에서만 최고지 아직 세계무대에서 그의 인지도는 크지 않았다.
그래도 우승은 우혁의 것이다. 이번 대회 두 번째 우승인데 왠지 모르게 적어 보이는 것은 새삼 그의 위상이 커졌기 때문이리라.
“최우혁 선수…”
“아까 말씀하신…”
이제 기자 회견이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질문들. 기자들의 입에는 발동기가 달려 있는 것 같다. 그는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준다. 피할 것은 살짝 피하고 알려줄 것은 잘 알려주었다. 어차피 뭐라고 말해도 기사화 시키는 것은 그들이 취사선택한 것이다.
경기를 한 것보다 더 힘든 것 같다. 공인으로 사는 것은 참으로 피곤한 일이다. 그래도 이제 세실리아와 당당히 다닐 수 있다. 그것만으로 그는 행복했다.
밖으로 나가니 그녀가 서 있다. 그의 어머니와 함께. 여기서 까지 애정 행각을 벌일 수는 없다. 그들을 보고 있는 시선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서로 미소만 지을 뿐. 그가 그녀에게 걸어갔다. 아마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이 두 남녀. 너무 잘 어울린다고.
“오라버니!”
그런데 저 멀리서 달려오는 4차원 소녀. 가희다. 그녀를 알아본 세실리아. 그녀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들었다. 살짝 우혁의 팔짱을 꼈다. 보란 듯이.
“정말… 이었네. 정말… 이야.”
“가자, 뭐 하는 거야?”
손가락을 가리키며 눈물을 글썽하는 가희를 일수가 데리고 간다.
“6개월만 기다려주기로 했잖아. 응? 이렇게 나를 속이면 어떻게 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본인이 항상 주장하고 다닌 것이지. 그래서 어깨를 으쓱 거리는 우혁. 세실리아는 그가 아닌 가희를 바라보고 있다. 더 당당한 애정 표현. 이 남자는 내 것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표시이다.
“엄마, 나 오늘 데이트 좀 하고 올게요.”
그는 이제 당당히 그녀와 다니려고 한다. 이래서 공개 연애가 좋은 것 아닌가? 그들을 찍으려면 이제 마음대로 찍으라고 하고 오늘은 그녀와 함께 처음으로 데이트를 하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만나서 제대로 데이트 한 번 해 본적이 없다.
“세실리아, 뭐 하고 싶은 것 있어?”
“음…”
둘이 걷는 길. 오늘은 많이 걸으려고도 한다. 주위의 시선을 모두 무시하고 싶었다.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이 시선들에 적응이 되어야 한다. 어쩌면 반대로 사람들이 적응을 해야 할 지도 모른다. 우혁은 이제부터 자주 이렇게 다니기로 다짐을 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세실리아가 가고 싶은 곳은 생각하기 힘들다. 잘 모르기 때문이다. 어디가 어딘지 그녀가 알 수가 없다. 집을 나온 것은 목동에 살던 아파트 주변 산책로와 근처에 L 백화점뿐이다. 그녀에게는 익숙한 세상이 아니다.
“그냥 이렇게 걷는 것도 좋아.”
“그래? 난 하고 싶은 것 아주 많은데…”
“그럼 우혁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다 좋아. 같이 있으면…”
사실 이게 그녀의 마음이다. 같이 있다면 다 좋다는 말. 그 말을 듣고 우혁은 가슴이 살짝 뭉클해 왔다.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공개를 하게 되었지만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그녀가 너무 안쓰럽고 대견했다.
지하철을 탔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다. 그 둘을 찍고 있다. 그러든지 말든지 그들은 손을 붙잡고 그 시선에 의식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윽고 내린 곳. K대 입구다. 집이랑 가까운 곳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나를 이곳으로 많이 데리고 오셨어.”
“그래?”
“응, 여기 있는 대학생들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아. 모두들 표정이 밝잖아. 긍정적으로 키우려고 하신 것 같은데, 그 때 난 다리가 아파서 움직일 수 없었지. 그래서 웃는 모습들이 좋게 보이지 않았어.”
세실리아는 그의 말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말을 잘 알아듣기도 하고 잘 하기도 한다. 놀라운 언어 습득력이다.
“그래서 널 한 번 데리고 오고 싶었어. 대학생들의 밝은 모습이 참 보기 좋잖아. 그지?”
“응. 보기 좋아.”
“나랑 세실리아랑 공통점이 있는 것 알아? 우리는 학교를 다녀 본 적이 없어. 하하하.”
그녀는 학교라는 말을 잘 알고 있다. 무언가를 배우는 곳. 사실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곳일 수도 있다.
“나 학교 다녀보고 싶어.”
“정말?”
“응. 배우고 싶어. 무엇이든.”
“그래? 네 부탁이면 다 들어주려고 했는데, 학교 다니고 싶다는 부탁을 과연 내가 들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진짜로 그녀의 부탁을 다 들어주고 싶었다. 자신의 생명을 살린 것은 물론 자신의 삶을 바꿔 놓았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 제대로 그녀에게 좋은 기억을 준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흠, 그럼 나랑 같이 공부할까?”
“같이 공부?”
“응, 검정고시 공부하자. 근데 외국인도 되는지 모르겠다.”
캠퍼스를 걸으니 캠퍼스에 소속이 되고 싶었나 보다. 사실 가끔 우혁도 대학생의 삶이 부러웠다. 공부도 하고 젊음도 즐긴다. 지금까지 그는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팠기 때문에 하지 못한 게 너무나 많았다.
“말 나온 김에 알아보러 가자.”
“응?”
“검정고시 학원에 가서 알아보자. 근처에 어디 없나?”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검색을 한다. 역시 한 군데 있었다. 발걸음을 향했다. 그리고 들어간 검정고시 학원. 원장이 그 둘을 알아보고 있다. 오늘 그들은 완전히 인터넷을 도배했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검정고시는 외국인도 볼 수 있나요?”
“그럼요 가능합니다. 그런데 최종 학력을 위한 서류가 필요한데요.”
“최종학력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요?”
“네?”
그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와 세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학원장답게 곧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초등학교 검정고시부터 준비를 하라는 말. 그리고 단계적으로 밟아나가는 것을 추천해준다. 초등과정, 그리고 중등 및 고등 과정. 그것을 완료해야 대학에 입학 할 수 있다면서.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설명해 주셔서.”
“아닙니다. 언제든지 오세요. 언제든지요. 그리고 사진 한 장 찍으면 안 될까요?”
“왜 안 되겠어요? 여기 앞에다가 걸어 놓으셔도 됩니다.”
원장의 입이 쩍 벌어졌다. 돈 들이지 않고 광고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와 세실리아는 포즈를 취해 주었다. 원장의 핸드폰에서 찰칵 소리가 날 때 우혁은 웃었다. 옛날에는 드물었지만 요즘은 잘 웃는 모습. 그래서 사진이 잘 나왔다.
“그럼 우리 천천히 공부하자.”
“응. 우혁이가 많이 알려 줘.”
“그래. 매일 매일 내가 가르쳐 줄게. 하하하.”
배가 고파온다. 그러고 보니 저녁을 먹지 않은 그들. 오늘 처음으로 해 보는 것들 중에 저녁식사가 추가 되었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정답게 식사를 하는 그들. 이제 한국 음식을 잘 먹는 세실리아. 사람들은 외국인이 음식이 먹는 것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다.
집으로 향하는 그들. 첫 데이트. 정말 평범한 데이트를 즐기고 온 커플이다. 그래도 그 날은 그들이 처음으로 데이트한 날로 그들의 기억에 평생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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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