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87화 널 지켜줄게
벌거숭이 남녀가 강에서 나왔을 때 주위는 새까만 밤이었다. 우혁과 세실리아는 이제 물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자신들을 쫓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될 수 있으면 멀리 도망을 쳐야 했다.
“우혁, 그들이 쫓아오고 있어 서두르지 않으면 안 돼.”
“뭐라고 하는 지 못 알아듣겠어. 빨리 도망치자는 이야기니?”
그녀의 손짓 몸짓을 봐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이들 남녀의 행색이 실오라기 하나 없으니 더 위로 올라가면 스트리킹, 즉 누드로 뛰어다니는 상황이 된다. 풍기문란으로 경찰이 출두할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문제다. 우혁이야 신분이 확실하지만 그녀는 아마도 또 다른 난관이 시작이 될 것이다.
“일단 우리 집으로 가는 게 최선의 상황인데? 아, 맞다. 옷이 있긴 하다.”
매번 젖은 옷을 입고 온다고 순빈이 의심하는 통에 이번에는 여분의 옷을 가지고 왔다. 아직 봄인 게 다행이었다. 약간 쌀쌀한 날씨에 겉 옷 까지 있다. 로렐라이 언덕 바로 위에 나름 숨겨 놓는다고 잘 여며 놨었는데, 그게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그렇게 대충 나누어 입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상의와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우혁은 팬티와 바지만 입었다. 그래도 모양이 나왔다. 그의 상체는 수영선수답게 적당한 근육으로 무장이 되어 있었다. 긴 겉옷은 그녀의 가릴만한 곳을 다 가려주었다.
“형, 형!”
“아니, 어떻게 된 거야? 한참 동안 안 와서 경찰에 신고할 뻔 했잖아. 근데 저 여자는?”
“나중에 설명할게 빨리 집에 가자.”
그래도 순빈이가 대기해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집에 갈지 막막했는데. 더구나 경찰에 신고할 뻔했다고 하니 더욱 타이밍이 절묘했었던 시점이었다. 아마도 독일어가 서툴러서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집에 도착한 일행. 우혁은 그녀가 걱정이 된다. 다시 강으로 간다고 할까봐.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있을까? 그것은 모르겠지만 그녀가 가게 되면 종족의 징계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이거 설명을 좀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아주머니가 출국하시지 않으셨다면 엄청 또 걱정하셨을 거야. 어쨌든 내가 알고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순빈은 그를 재촉하고 나섰다. 분명히 도망쳐 오는 행색이다. 혹시 범죄라도 저지른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된다. 거기다가 저 아름다운 여자는 뭔가? 미의 기준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 단연코 그가 본 최고의 아름다움이리라. 그 미의 온갖 집합 덩어리가 갑자기 겉옷을 훌렁 벗는다.
“헉, 뭐 하는 거야?”
순빈은 눈을 감았다. 우혁 역시 다시 일어나 옷으로 그녀를 감싸 주었다. 세실리아는 답답했다. 이렇게 뭔가를 걸치고 있는 게 익숙하지 않은 몸이다. 당연히 답답할 수밖에 없다. 그녀도 인간들이 이런 것을 걸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가끔 봐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이것을 입고 다니려면 익숙할 때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혹시 너 저 여자랑 바람피우다가 저 여자 남편에게 쫒기고 있는 것 아니야?”
“그… 그런 거 아니야. 바람이라니?”
“아, 그렇지? 네가 그럴 리가 없지?”
“하지만 쫓기고 있는 것은 맞아.”
“누구한테? 혹시 테러 조직이나 범죄 조직? 마피아 같은?”
“마피아? 미국에 있는 거? 아냐, 그런 거.”
“좀 더 자세히 좀 이야기 해줘. 그래야 내가 수습하지.”
답답할 만했다. 그래도 설명을 하려니까 머리가 복잡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몰랐다.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도 감이 안 잡혔다. 그리고 세실리아의 안정이 먼저인 것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상당히 불안정한 모습이다. 당연하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사실 종족에게 해를 끼치는 짓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그녀의 신분이 인간 세상에 밝혀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수많은 인간들이 모여들 것이다. 인어를 보기 위해서.
그래서 우혁은 고민이 된다. 순빈에게 어디까지 밝혀야 할지가. 믿을만한 사람이기는 하다. 그래서 설명을 해주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먼저 쟤 좀 안정시킬게. 형 자리 좀 피해 줄 수 있어?”
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미 터진 일이다. 수습을 위해서 자신은 협조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세실리아의 얼굴을 본 우혁. 미소가 사라졌다. 하긴 이 상황에서 그것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아쉬운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세실리아…”
“응?”
그녀는 이제 종족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우혁을 위해 많은 것을 버린 셈이다. 아마도 로드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면 심한 벌을 내릴 것이다. 어쩌면 죽음까지도. 그것을 각오하고 가야 하는 게 그녀가 내릴 수 있는 최종 결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같이 있고 싶은 것이다. 그와 함께.
“내 말 잘 들어. 어디까지 알아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당분간 나와 같이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실리아의 맑은 눈을 보며 계속해서 설명을 하려고 애를 썼다. 그녀가 모든 것을 알아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이해시키는 게 그의 몫이다. 인어가 인간 세상에 적응을 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먼저 설명을 해야 한다.
“일단 옷을 입고 있어야 해. 불편하다는 것 잘 알아. 하지만 인간에게는 인간만의 법이 있어. 그것을 어길 경우 문제가 발생해. 아,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그는 이번에 설명할 때는 일어섰다. 그러면서 동작을 취했다. 가끔 그녀에게 말을 가르칠 때 동작으로 동사를 알려준 적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옷을 입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손짓 발짓, 그리고 몸짓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 이후 몇 가지 주의사항도 말과 몸짓을 모두 사용해서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다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 반만 알아들어도 다행이다 싶었다. 중요한 것은 이제 그녀와 당분간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가 살아온 삶보다 살아야 할 삶이 변하게 생겼다. 사실 그는 누군가에 의해 보호를 받으면서 자라왔다. 휠체어에 있을 때에는 부모님께, 그 이후에 한국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그를 계속 도왔다.
그런데 이제는 그 반대로 그가 지키고 보호할 대상이 나타났다. 바로 세실리아다. 인간 세상에서 그녀와 함께 산다는 것. 가르쳐야 할 것도 많고 시행착오도 많이 겪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목숨을 구해준 존재다. 그것도 세상을 당당히 살아갈 수 있도록 두 다리를 치료해준. 당연히 그녀를 돌봐야 한다.
“내가 널 지켜줄게. 어떤 일이 있어도, 널 지켜줄게.”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눈빛이 의지로 불탔다. 한번 내 뱉은 말은 실천하려고 하는 성격. 그로 인해 고집쟁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의 정신세계를 의심하는 말로 공격하기도 했다. 이제는 다르다. 이제는 지켜야 할 대상이 있기에 달라져야 한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 정면을 보지만 옆을 보지 않아 때로는 적을 만들었던 그 세월.
어쩌면 세실리아라는 존재 때문에 때로는 누군가와 타협을 해야 하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죄를 지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 모든 것을 다 각오하고 한 약속이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관계 설정이다. 세실리아는 과연 그의 무엇인가? 여자 친구는 한국에 있고, 그녀는 가족이 아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결국은 그가 정리해야 할 일이 한 두 개가 아니다. 나중에 미래에게 설명을 해야 하고, 그녀의 동의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지금 앞에 있는 세실리아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가 보기에 그녀의 눈은 사랑이 듬뿍 담긴 눈이기에.
‘나중에…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은 지금은 그녀를 돕는 것 말고 다른 것은 나중에…’
훈련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런데 드디어 후일을 기약하는 게 생겼다. 그의 마음이 갈팡질팡한다는 증거다. 그래서 문제다. 앞으로 그에게 다가올 갈등상황이 눈앞에 뻔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힘든 하루가 지났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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