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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69화 이브

눈이 내린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모든 솔로들의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시기이다. 물론 연인을 가진 남녀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다음날을 기대한다. 때로는 어떤 선물을 기대하는 여자들도 있다. 때로는 야한 밤을 기대하는 남자들도 있다.

우혁은 기대할 수 없다. 너무 바빠진 미래. 가끔 전화 연락만 가능할 뿐이다. 새로 시작한 드라마는 대박을 치고 있다. 물론 그녀가 메인 히로인은 아니지만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그녀의 인기도 수직상승하고 있다. 당연히 스케줄은 몸이 두 개가 되도 소화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이번 크리스마스도 혼자 보내겠네… 연인이 있으면 달라질 것 같았는데…”

그는 씁쓸하게 중얼거린다. 집에서 맞는 크리스마스이브는 왠지 모르게 그에게 고독감을 배가시키는 것 같았다. 전화는 할 수 없다. 얼마나 바쁜지 알기에. 연예인을 여자 친구로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하지만 그녀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전화 목소리에서 진한 미안함이 묻어 나왔다. 심지어 그녀는 터트리자고 한다. 자신과 그녀가 연인 사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러기는 싫었다. 그녀가 한참 인기를 얻어가고 있을 때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미래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다. 반대로 그의 인기도 수직상승하고 있다. 올해 찍은 광고만 열다섯 편이 넘어갔다.

심지어 그는 SBC 연기대상에 초대까지 받았다. 최고의 까메오 상. 일부러 만든 상일 것이 분명한데 그가 후보에 오른 것이다. 소녀 팬들은 난리가 났다. 아마 그 때 북새통이 될 것이 뻔하다. 방송국 앞이 말이다. 아이돌만한 인기에 그는 더욱 집 노출과 신변 노출을 조심해야만 했다. 그런데 벌써 자신의 집을 알아채는 팬들이 있는 것 같았다. 가끔 초인종을 누르며 확인을 하는 사람들. 없는 척하고는 있지만 이제 밝혀지기 일보직전인 것 같았다.

정말 심심한 시간이다. 같이 놀 사람이 전혀 없다. 순빈이는 여자 친구 만나러 가야 한다고 했다. 사실 그가 유일한 그의 친구 겸 가족과 같은 사람이다. 이럴 때에는 부모님도 그립다. 평소에는 자꾸 전화한다고 타박을 하면서도 말이다. 그의 전화기. 너무 조용하다. 그런데 갑자기 울렸다. 그는 자신이 그 전화 울림에 반가워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길들여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부대끼면서 외로움을 알게 되어 버린 것이다.

“여보세요?”

- 나야, 빛나. 뭐해?

“그냥 집에 있지.”

- 놀러 가도 돼? 이사 가고 한 번도 안 가봤잖아.

“응? 그래. 와.”

그렇게 빨리 대답을 할 줄은 전혀 몰랐다. 그만큼 외로운 것이다. 주변에 협소한 그의 인간관계가 이럴 때는 참 안타깝다. 그는 집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원래 아주머니가 해주시는데 오늘은 오시지 말라고 했다. 그녀도 가족이 있는데 이런 날까지 부르는 것은 미안했다.

빛나와 그의 집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같은 동네. 금방 올 수 있다. 그렇게 찾아온 그녀. 그가 이사 온 후에 그녀의 처음 방문이다.

“와아, 더 넓어졌네.”

“그러게 혼자 사니까 이렇게 넓을 필요는 없는데…”

“방도 세 개야? 부모님은 가끔 오시니?”

“바쁘셔서 자주 못 오셔. 그리고 돈 아끼셔야지. 나 때문에 빚이 산더미신데.”

그래도 많이 갚았다. 다 그가 광고를 많이 찍어서 조금씩 갚은 탓이다. 지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는 광고의 횟수. 그것을 보면 아마도 빚 청산이 멀지 않았을 것 같았다.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 내일은 크리스마스. 참 외로운 싱글들이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싱글이 아니다. 외로운 커플일 뿐. 그런데 아직 빛나는 모르고 있다. 원래 대답을 잘하지 않은 성격이기에 그냥 그러려니 한다.

“집 구경 다했다. 좋네. 깨끗하고. 요즘 최우혁 돈 많이 번다는 증거구나.”

“전세야. 돈 더 벌어서 집 장만해야지.”

“와아, 대단한데. 하긴 다른 데 낭비 안하는 성격인지는 내가 잘 알지.”

그는 웃었다. 그녀의 칭찬. 꼭 그렇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게 돈을 쓸 데가 없다는 말은 그만큼 인간관계가 협소하다는 것이다. 이 나이 대에는 사람을 만나느라 돈을 많이 쓴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낭비가 될 수 없다. 그나마 개인 매니저와 아주머니의 월급은 그의 주머니에서 나가고 있다. 그게 다다. 그는 차도 없으니 유지비도 필요 없는 것 아닌가?

“안 되겠네. 네 돈을 오늘 내가 쓰게 해주겠어.”

“정말? 어떻게?”

“집 안에서는 안 돼지. 오늘 여기저기에서 재미있는 거 많이 하잖아. 나가자. 집에 박혀서 뭐해?”

“응? 밖은 너무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변장하고 가면 되잖아. 그런 거 잘 하면서.”

하긴 한 두 번이 아니다. 모자를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낀 모습. 같이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지. 그런 의미에서 다시 친구를 되찾은 기분이다. 심심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수영장도 연 곳이 없으니 어디서 훈련을 할 수도 없다.

서울 시내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 줄 처음 알았다. 크리스마스이브. 차도 우혁의 집에 놓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 맘 때쯤 사람들은 주변보다 자신에게 더 신경을 쓴다. 즉, 자신의 연인과 어떻게 좋은 시간을 보낼까 연구를 하게 되니 의외로 그를 주시해서 보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명동을 걷는 두 남녀. 크리스마스라서 엄청난 행사를 많이 하고 있다. 이벤트, 또 이벤트. 구경만 해도 하루가 금세 갈 것 같았다. 나오기를 잘했다. 그리고 그녀는 오늘 진짜 친구답게 행동을 하고 있다. 섣불리 그의 팔짱을 끼지도 않았으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걸었다. 다만 사람들이 많은 게 문제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은 가끔 밀착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면 오늘 오랜만에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린 그녀의 내음이 그의 콧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나 저거 사줘.”

“뭐야, 고작? 내 돈 다 쓰게 해준다면서.”

“저거 비싼데. 만원 넘어.”

그녀가 말한 머리핀. 명동에 있는 길거리 상점들은 온갖 물건들을 진열해놓고 같이 다니는 남자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있다. 이런 날은 그렇다. 여자의 호주머니 보다는 남자의 호주머니가 좋은 먹잇감이다. 값을 지불하는 우혁. 여기 오기 전 ATM에서 현금을 잔뜩 뽑았다. 진짜 많이 쓸 생각이었나 보다.

“하나 주세요.”

“야, 남자 친구가 쿨 하시네. 돈 많으신가 보다. 예쁜 언니. 다른 것도 사달라고 해요.”

“네, 나중에요.”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힌다. 그를 남자친구로 지칭하는 물건을 파는 여자 때문에. 슬쩍 우혁의 얼굴을 보았다. 표정의 변화는 없다. 항상 저렇다. 무심하다. 그런데 그가 입을 열었다.

“저 여자가 너보다 나이 많은 것 같은데 언니라고 하네.”

“원래 그런 거야. 그냥 손님에 대한 호칭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래? 신기하군.”

“난 네가 더 신기해. 가끔 보면 너무 세상을 몰라. 그리고 그 은행 봉투에 돈 가득 담아서 자꾸 꺼내지 마.”

“아, 지갑에 다 안 들어가서.”

“헉, 얼마나 뽑았길래?”

“백만 원.”

“어머, 얘는 왜 그렇게 많이 뽑았어. 이리 줘. 내 가방에 넣고 다니게.”

그는 순순히 봉투를 내어 준다. 그러고 보니 세상을 너무 모르긴 하다. 다만 돈 문제만큼은 자신이 직접 챙긴다. 견물생심이라기보다는 괜히 누구에게 맡기고 불안해하기 싫다. 순빈이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 그녀를 믿고 돈을 건네주는 것은 꽤 의미가 있다. 그녀를 아주 많이 믿는다는 증거이니.

“저거 먹자. 맛있겠다.”

“저건 뭐지?”

“회오리 감자.”

“여기는 무슨 이상한 게 많네. 보기만 해도 먹고 싶은 게 한 두 개가 아니구나. 하하.”

군것질. 그리고 길거리 쇼핑. 이것만 해도 시간은 잘 간다. 어느덧 해가 졌다. 겨울이라 낮이 짧다. 사람들은 또 어디에 있다가 이렇게 몰려나오는지 아까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았다. 문득 배가 고파왔다. 그래서 우혁은 그녀에게 제안을 한다.

“이제 밥 먹을까? 뭐 먹고 싶어?”

“너는? 먹고 싶은 거 있어?”

항상 메뉴 고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먹을 게 마땅히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먹고 싶은 게 많아서이다. 군것질을 해도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배가 금방 꺼졌다. 이러니 보이는 것을 다 먹고 싶은 것이다.

“스테이크 먹을까? 크리스마스에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좋아.”

그래도 마지막 결론은 우혁이 낸다. 기쁘게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빛나. 그녀의 얼굴에 기쁨이 서려있다. 오늘 가볍게 나온 그녀다. 마치 데이트를 하는 것 같은 느낌.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도쿄를 같이 걸었던 그 때로 돌아갔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녀의 심장이 다시 뛰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우혁의 현실이다. 여자 친구를 가지고 있는 상황. 그녀가 이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 그리고 얼마 후에 반드시 알게 될 일인데… 남자 하나. 그리고 그의 여자. 마지막으로 그를 사랑하는 또 다른 여자의 이야기는 이렇게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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