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11화 물컹
그날은 미래가 나오지 않았다. 몸이 안 좋다고 한다. 걱정이 되어서 전화를 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 나 오늘 그 날이야. 그래서 그래?
“그 날? 그 날이 뭐야?”
- 응? 그 날이 그 날이지, 뭘 남자애가 그런 걸 물어? 그냥 아픈 줄 알고 끊어.
약간 화가 난 목소리였다. 자신에게 한 번도 그런 말투가 되어 본적이 없어서 그는 약간 놀랐다. 많이 아픈가 보다고 생각을 했다. 그도 아파봤기에 잘 알고 있다. 아픈 사람의 심정이. 차라리 이럴 때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누군가가 관심을 갖고 보살피는 것. 그거 사람 미안하게 하는 거다. 그도 그랬다. 특히 그의 부모님께.
여느 날과 같았다. 유소년들과 연습을 하고 오후에는 영욱에게 지도를 받았다. 그는 계속 강조한다.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러니 질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에게는 소용없는 말이었다. 그는 절대 질리지 않았다. 너무 재미있어서 하루 종일 배우고 싶었다. 그날은 감독도 만났다. 국가대표 감독 태형광. 그동안 연맹 일 때문에 바빠서 며칠 만에 들르는 거란다.
“이 녀석인가?”
“네, 키우기 정말 좋습니다. 잠재력이 무궁무진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스물이니 몇 년 못 가겠는 걸?”
그 말을 들은 그의 눈빛. 날카로워졌다. 비록 감독은 보지 못했지만 그는 다시 오기로 물든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반드시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최고가 되고, 그리고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겠다고…
모든 훈련이 끝나자 빛나가 다가왔다. 요즘은 그녀도 많이 친해졌다. 처음에는 그가 미래의 앞길을 막는 존재로만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왜 자신의 친구가 그토록 그에게 열광했는지 알게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느는 실력. 수영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있었다. 비록 맨 끝자락에 위치한 실력이지만 이곳에는 전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다 모였다. 그런데 그의 성장속도에 긴장을 하고 더 열심히 연습에 매진할 정도다. 긍정적인 작용이다.
“오늘은 내가 도와줄게.”
“응? 네가?”
“아까 미래한테 전화 왔어. 너를 부탁한다고… 매일 남아서 둘이 연습했었잖아. 오늘은 내가 시간을 냈으니 절대 꾀피우지 마.”
그녀의 말. 그는 코웃음 친다. 꾀를 피우다니.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것이다. 미래도 그랬다. 그녀가 오히려 그만 가자고 할 정도까지 그가 연습에 매진한 것이다. 이제 초보자라는 꼬리표는 확실히 뗐다. 따라서 물속에서 어떻게 하면 속도를 낼 것인지에 대해 조련을 받는 중이었다.
“발차기 할 때 최대한 빨리, 그리고 많이 차는 것. 그리고 팔 꺾기, 아… 아직 그것은 무리인가? 어쨌든 시작!”
그녀는 오늘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다. 미래보다 그를 덜 파악했을 수밖에 없다. 팔 꺾기. 초보자를 넘으면 할 수 있는 기술인데, 아직 그것을 뗐는지 아닌지 눈여겨보지 못했다.
물론 그는 그것을 뗐다. 얼마 전에. 지금은 전사분면 영법을 배우고 있었다. 박태원 선수의 장끼다. 물속에 있는 팔이 몸과 90도를 이루기 전에 바로 다른 쪽 팔을 물에 넣어 스트로크를 시작하는 영법. 몸의 흔들림이 적고 전체적으로 몸의 형태를 유선형으로 만들 수 있어 빠르고 오래 지속할 수 있다.
그가 앞으로 가는 것을 본 빛나. 눈이 커졌다. 빠르다. 그리고 안정적이다. 지금 하고 있는 전사분면 영법은 장거리 선수용인데, 저렇게 해서도 이렇게 빨리 갈 수 있다니, 선천적으로 재능이 있다는 증거다. 어느새 50미터 턴을 하고 돌아오는 우혁.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의기양양하다. 자기가 이 정도라는 것을 자랑하기라도 하듯이.
“어쭈? 지금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거니? 이제 좀 수영할 줄 안다고 우쭐하고 그런 거야? 좋아. 너에게 내 실력을 보여줄게. 잘 봐.”
그녀는 그가 자만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이럴 때에는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잠시 자존심이 상해도 장기적으로는 열심히 훈련에 매진할 수 있는 법. 그래서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기로 했다.
확실히 유연해 보였다. 아직 딱딱한 몸동작의 그에 비해서. 당연하다. 여성부에서 그녀가 우리나라에서 최강자이다. 비록 해외로 나가면 아직 순위권 안에도 들지 못하지만. 그래도 언젠가 우리나라 여성 수영선수가 메달을 딴다면 바로 그녀일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무리 그가 남자라도 그녀의 속도를 따라 잡을 수 없다.
“어때, 헉. 헉.”
그래도 무리를 했는지 한 바퀴를 돌고 와서 그녀는 헉헉거린다. 그의 눈빛은 맑다. 그 순수한 눈. 그것으로 그녀를 본다. 왜 저렇게 힘들어하는지 모르겠다는 시선이다. 그녀는 느꼈다. 그의 자만심이 전혀 꺾이지 않았음을. 보는 것과 직접 맞서보는 것은 틀리다. 그래서 그녀는 제안을 했다.
“너, 내가 그렇게 빨라 보이지 않는구나. 좋아. 나를 잡아 봐. 그럼 내가 네 소원 하나 들어 준다.”
“난 소원 별로 없는데…”
보통 이러면 달려들어야 정상이다. 그녀처럼 아리따운 처녀가 이런 것을 걸다니? 어느 누가 도전하지 않겠는가? 이기면 키스를 해달라고, 또는 데이트를 해달라고 하면서 소원을 말할 게 얼마나 많은데. 그 램프의 요정 급 소원을 그는 하찮게 여긴다. 오히려 빛나가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도 해. 나중에 살다 보면 소원이 얼마나 많아지는데? 하라면 해.”
“그건 네가 들어줄 수 있는 게 아닌데?”
“뭔데? 무슨 소원인데?”
“인어를 만나고 싶어.”
“뭐?”
그녀는 황당해 한다. 무슨 소원인가 싶었더니 인어를 만나고 싶단다. 말도 안 되는 소원. 동화 속 세상도 아니고 말이다.
“현실적인 것을 대야지. 그런 걸 내가 어떻게 들어 주냐?”
“그래서 네가 들어줄 수 없는 거라고 말했잖아.”
“그럼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 봐. 지금 말고. 나중에. 생각해 보니 네가 나를 이길 수 있다는 거네? 어이가 없네, 어이가 없어.”
“널 잡으면 되는 거지?”
“당연하지. 잡아 봐. 할 수 있으면.”
원래 잡는 것까지는 안 해도 된다. 그냥 동일 선상에서 이기면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약간 흥분한 그녀가 말렸다. 자신을 잡으면 되냐고 묻는 물음에 잡을 수 있으면 잡아보라고 말을 한 것이다.
“알았어, 그럼 먼저 가.”
“뭐라고?”
“먼저 가야 잡지. 가 봐.”
그녀는 정말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먼저 보내고 뒤에 따라 오겠다는 소리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다. 결국 입술을 깨물고 출발하는 그녀. 바로 뒤에서 그 역시 뒤 따라 갔다. 물살을 헤치며 인어처럼 그렇게 앞을 향해서 가고 있다. 그녀의 최고 속도로.
그에게 설마 잡히기야 할까? 그래도 모른다는 식으로 평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당연히 늦게 출발하기도 했거니와 원래 그녀에게 상대가 안 되는 그는 뒤쳐져 있다. 턴을 하고 나오는 데 그와 교차를 한다. 어쩌면 그보다 한 바퀴 격차를 벌릴 수도 있다. 그런데 그녀의 생각에 미처 정하지 못한 게임 룰이 생각났다.
‘몇 바퀴를 돌아야 하지?’
그녀는 갑자기 진땀이 났다. 물속이라서 그 시원함으로 땀이 안 난다고 생각을 하면 오산이다. 비록 물살에 씻겨 내려갈지라도 인간의 땀구멍에서는 당연히 땀을 배출해낸다. 운동과 땀의 상관관계는 간단하다. 육체의 고됨은 결국 땀이다.
그녀는 갑자기 체력적인 문제가 걸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자신의 경력이 그와는 상대도 안 될 만큼 오래된 선수라지만 그는 남자다. 기본적으로 체력의 한계가 오면 아마추어에게도 잡힐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처음에 몇 바퀴로 규정을 안 해 놓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격차는 좁혀졌다. 그리고 몇 바퀴를 더 돌고 나서 그녀의 귀에 자신의 호흡소리가 들렸다. 힘이 들었다. 이대로 멈추고 싶었다. 그 순간 자신의 가슴을 만지는 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악!”
우혁의 입장에서도 이건 생각지도 못했다. 그 역시 죽을힘을 다해 그녀를 쫓아가고 있었다.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이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그렇게 해서 결국 격차를 좁히고 말았다. 드디어 그녀의 모습이 보일 때쯤 그는 더욱 힘을 내었다.
수영이란 호흡의 힘이 좋은 사람이 결국 유리하게 되어 있다. 그도 숨이 가쁘기는 하지만 물을 들이 마실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여기서 나타난다.
그런데 생각보다 자신의 몸은 더 빨리 나아갔고, 역시 생각보다 더 그녀의 몸이 느려졌다. 이제 잡았다 하는 순간 그녀의 발이 아닌 허리를 그리고 그 위에 가슴을 잡고 말았다. 실수였다. 하지만 물컹한 그 느낌. 짜릿한 그 순간. 마지막으로 그녀의 비명.
“미… 미안해…”
그는 손을 놓았다. 어느새 멈춘 그와 그녀.
이럴 때면 따귀라도 때려야 하는데… 그녀의 입장에서 이야기다.
이럴 때면 그녀가 화를 내는 것을 다 받을 수 있는데… 그의 입장에서 이야기다.
그런데 아무 말이 없다. 그는 그녀를, 그리고 그녀는 그를 쳐다보고만 있다. 그렇게 얽혀든 시선. 잠시 동안 서로를 바라본다. 뭔가 강렬한 게 둘 사이를 오고간다. 시작된 교감. 그리고 신경계에서 분비되는 사랑의 호르몬.
물론 그보다 그녀의 것이 더 강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더 부대끼고 자라온 그녀가 이런 감정도 더 풍부한 법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참 안 되었다. 익숙지 않은 감정을 미래에게서도 빛나에게서도 받기 때문에 잘 모른다. 남과 여의 그 무언가를.
“미안해… 고의가 아니었어…”
그렇기에 이런 말만을 되풀이 한다. 다른 남자 같으면 키스라도 할 터인데…
고개를 숙인 빛나는 그대로 가장자리까지 헤엄쳐 간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성 탈의실로 들어가 버리는 그녀. 심장이 쿵쾅거려서 도저히 같이 못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것도 모르고 우혁은 그녀가 단단히 화가 났다고 생각을 해 버린다.
“치,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그랬는데…”
그 역시 이 정도면 사과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을 했다. 그가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한다는 것은 정말 큰 맘 먹고 하는 것이다. 아직 어리다. 그럴 수밖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내던져진 게 이제 일 년도 안 되었으니 당연하다. 언제쯤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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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렇죠. 힘 닿는데까지. 알겠습니다. 일단 힘 닿는데 연참을 하겠습니다. 3연참입니다. 하악. 하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