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64화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술을 좀 많이 마셨나 보다. 그녀를 바래다주는 매니저가 있는데도, 뒷좌석에서 자신의 어깨에 기대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매니저가 보고 있는데 그는 좀 불편했다. 그렇다고 곤히 자고 있는 그녀를 깨우기도 그렇고.
“미래가 최우혁씨를 많이 좋아해요.”
“아, 네.”
항상 하던 대답으로 그는 그의 말에 답했다. 그 말 이외에는 답변할 게 없다. 사람으로 치면 사실 가장 재미없는 말 상대에 속했다. 그러나 그의 그 성격을 이미 미래가 이야기 했나 보다. 매니저는 그의 답변에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그거 알아요? 미래가 계약을 할 때 남자 친구에 대한 조항은 빼달라고 한 것.”
“그게 무슨…”
“원래 신인들 계약할 때 남자 친구에 대한 조항이 있어요. 다 키워 놓았는데 스캔들 나고 그러면 절대 안 되잖아요. 그래서 종종 이면 계약을 하곤 하는데, 어쨌든 미래는 아예 남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조건을 내 걸었어요. 덕분에 장기 계약을 했지만.”
그는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긴 그녀가 말을 안 하는데 그가 알 턱이 있는가? 그리고 그 조차도 단기 계약과 장기 계약의 장단점을 알고 있다. 그녀가 그렇게 길게 계약한 게 결코 좋을 리가 없다. 어쩌면 한창 전성기 때 소속사에 발이 묶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모르셨네요. 역시… 하긴 미래가 말을 할 리가 없죠. 어쨌든 그렇다구요. 자, 다 왔습니다. 내리시죠.”
“아, 네.”
똑같은 대답을 하는 우혁은 그녀를 결국 깨워야만 했다. 자신의 어깨에 기대고 있지만 아파트에 도착했으니 이제 내려야 하는 것이다.
“우… 혁아. 다 왔어?”
“응. 피곤했니? 아님 술 많이 먹었어?”
“아냐, 별로 안 먹었어. 내가 술이 약해서. 매니저 오빠, 나 오늘 여기서 있을 래요. 먼저 들어가세요.”
“무… 무슨 소리야?”
매니저보다 우혁이가 먼저 반응을 했다. 여기서 있겠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여겼다.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다.
“우혁아, 아무 짓도 안 할게. 걱정 마. 너랑 있는 시간이 항상 너무 짧아서 그래. 오늘만. 진짜 오늘만. 나 소속사에서 유일하게 하루 쉴 수 있는 시간이란 말이야. 아까 회식 때에도 끝나고 너랑 있으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져서…”
“그래도 이건 아니지. 빨리 들어가. 빨리.”
그는 나오려는 그녀를 밀어 넣으려고 했다. 그러느라고 잘 못해서 그녀의 가슴을 만지게 되었다. 화들짝 놀란 그와 그녀. 하지만 이 때다 싶은 그녀는 재빨리 나와서 차 문을 닫았다.
“오빠, 나 그럼 내일 오후에 들어가요.”
“응. 그래. 푹 쉬어.”
차는 우혁이 말릴 새도 없이 그렇게 가 버렸다. 어쩌면 사전에 그녀와 매니저 간에 무슨 약속이 되어 있었을 지도 몰랐다.
“집은 가까운 거리야. 내가 데려다 줄게.”
“새벽 한 시야. 부모님 깨우기 싫어.”
“그럼 외박은? 그럼 부모님 걱정하실 텐데.”
“연기자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이 부지기수야. 어차피 받아들이셨어.”
“좋아. 내가 안 돼. 난 우리 집에 여자를 재울 수 없어.”
“왜? 진짜 아무 짓도 안 한다고 했잖아. 그냥 너랑 이야기 하고 싶어. 어차피 내일 주말이라서 훈련 안 가잖아.”
“그래도 안 돼. 내가 무서워.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그래.”
“그럴 리가? 세상 남자 다 늑대인 줄 알지만 넌 아닌 것 다 알아. 자, 가자.”
“어? 안 된다니까.”
두 발이 달린 그녀다. 자기가 자유롭게 간다는데 그가 잡을 도리가 없다. 더구나 새벽에 시끄럽게 하는 것은 다른 아파트에 민폐다. 그는 자신이 여기 살고 있는 것을 철저히 숨기고 있다. 벌써 누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최대한 조용히 살았다. 이제 와서 불편을 감수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그녀의 뒤를 따라 자신의 아파트에 들어갔다. 주객이 전도 되었다.
“와아, 그동안 모은 이 트로피… 대단한 걸.”
“다 순빈이 형이 장식해 준 거야. 별 의미 없어. 나중에 올림픽 금메달이 진짜지.”
집에 들어가자마자 거실에 진열되어 있는 각종 트로피. 아마추어 대회라도 메달과 트로피는 수여한다. 그것을 받고 이렇게 장식한 것은 순빈의 몫이었다. 그의 매니저는 우혁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마치 친동생처럼 아끼고 있다. 사실 고맙지 아니한가? 그에게 웬만한 직장 다니는 사람의 연봉을 보장해 주고 있으며, 출퇴근 시간과 주말을 거의 보장해준다. 물론 자청해서 그가 가끔 주말을 반납하고 그를 위해서 여기 저기 분주하게 뛰고 있지만.
“역시, 너의 그 목표. 내가 처음부터 알아봤어. 뭘 했다 하면 반드시 정상에 설 것 같았다니까.”
“정상이라니? 아직 발끝에도 닿지 못했어. 과한 칭찬은 사절이야.”
“말솜씨도 늘었는걸? 이제 조금만 있으면 내가 못 당하겠어.”
“천만에. 여기 네가 끝까지 들어온 걸 봐. 내가 웬만해서는 고집으로 다른 사람을 이기는데, 너랑 빛나…”
그는 말을 하려다 말고 멈추었다. 빛나 이야기. 일종의 자신의 삶에서 요즘 금칙어가 된 느낌이다. 그래서 그랬다. 하지만 미래는 자신을 배려하는 줄 알고 그에게 괜찮다는 싸인을 보냈다.
“왜? 빛나 이야기 나한테 하는 게 좀 그래서? 괜찮아. 알고 보면 걔랑 나 동병상련이잖아.”
“동병상련?”
“응. 걔나 나나 한 남자에게 마음을 다 주었는데, 그 남자는 다른 여자가 있다지 아마.”
그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여자란 인어를 말하는 것이고. 물론 그녀는 그 존재를 모른다. 그가 사랑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면 혹시 거품을 물게 될까? 하긴 그 역시도 요즘은 자신이 인어를 그리는 게 단순히 자신의 생명을 구해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에 빠진다. 그렇지 않은가? 대화도 없었고, 같이 있었던 시간은 짧았던 그 몇 초. 이제는 가끔 그게 꿈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현실성이 없어서 말이다.
“그것은 비슷하지만 빛나는 아니야.”
“응?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아, 말해. 그렇게 중단하면 나 답답하단 말이야. 말 안하면 오늘 너…”
여기서 말을 끊는 그녀. 그 뒤의 이야기에 일부러 여운을 남겨 놓는다. 알아서 판단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효과가 있었다. 그는 그 여운이 남긴 협박성 공백을 참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 둘은 완전히 친구로 남기로 했어. 그게 다야. 그러니까 너랑 다르다는 이야기야.”
“에이, 그건 네 생각이지. 빛나가 그것을 받아들이겠어?”
“그녀가 먼저 이야기했어. 받아들인 것은 내 쪽이야.”
“뭐라고? 정말이야? 정말 빛나가 먼저 친구로 지내자고 했어?”
“그렇다니까. 물어봐, 네가.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무슨… 내가 요즘 빛나랑 연락 안 하고 있다는 것 알면서.”
그녀는 이 믿지 못할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박빛나. 그녀의 절친이었던 사람.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내왔다. 하지만 늘 그녀는 1등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독한 의지 때문이다. 한 번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수영뿐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한 욕심도 그랬다. 뭐 하나를 소유하기 원하면 나중에 반드시 가졌다. 그런데 그녀가 우혁을 포기했다니.
“믿을 수 없어. 어떻게 널…”
빛나가 아니더라도 믿을 수 없다. 그녀의 눈에만 콩깍지가 낀 줄 알았더니 오늘 회식 자리에 나타난 그를 보고 여배우들의 방심은 마구 설레었다. 그것을 느낀 미래. 앞으로 그를 웬만하면 부르지 않으려고 했다. 아까 밖에 나가서 그와 친구 먹었다고 한 세희. 모두가 다 부러워하는 눈이었다. 그는 모든 여자들이 한 번 보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마력을 가진 것 같았다.
그런데 포기라니? 무슨 꿍꿍이 속일까? 혹시 우혁을 안심시켜놓고 다른 마음을 먹은 것일지도.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친구였다. 앞에서 하는 모습과 뒤에서 뭔가를 꾸미는 것은 빛나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연적이지만 그녀를 알기에 무작정 앞과 뒤가 다른 인간이라 생각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럼 왜?’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자신이 빛나의 입장이었다면? 우혁을 포기할만한 몇 가지 상황을 그려 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달라지고 있다. 혹시나 둘이 무슨 일이 있었다면? 친구의 선을 넘을 만했던 일이 있었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그녀도 그랬다. 그 때 우혁과 있었던 일. 누군가의 방해가 아니었다면 선을 넘었을 것이다. 그 이후에 어색하고 힘들었다. 패배감과 수치심. 그래서 홧김에 그냥 친구로 남자는 그의 말을 받아들일 뻔했다.
“혹시 둘이 무슨 일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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