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회 - 오래전 약속(완결)
결혼식 날 아침, 황제국은 조금 일찍 민소영과 함께 사옥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텅 빈 로비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완공이라니. 여기 있는데도 잘 실감이 안 나요.”
“나도 그래. 참 신기하지?”
사옥이 막 공사에 들어간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며 세계 금융 위기가 닥쳤다. 하지만 뉴퀘스트에게 큰 타격은 없었다. 다양한 게임 IP 포트폴리오 외에도 게임 엔진 라이선스 사업과 ‘퀘스트 스토어’ 글로벌 온라인 게임 마켓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사옥 건축도 일정에 차질 없이 무사히 완공할 수 있었다. 뉴퀘스트 테헤란로 신사옥은 건축비만 1,800억 이상이 들어간 최상급 오피스 빌딩이었다. 황제국은 친환경 소재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건물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데도 신경 썼다. 건축 비용은 많이 들었지만 유지 비용은 비슷한 규모의 오피스 빌딩에 비교하면 훨씬 저렴했다.
두 사람은 한 층, 한 층 찬찬히 둘러보았다. 스타타워에 입주할 때의 전통을 이어 신사옥 역시 각자의 개성에 맞게 업무 공간을 확보하고 꾸밀 수 있도록 했다. 대부분의 오피스 영역은 기둥을 최소화하고, 언제든 가벽으로 손쉽게 공간 구성을 바꿀 수 있도록 만들었다.
구성원이 자기가 쓸 책상을 선택하고 꾸밀 수 있는 것도 여전했다. 조명은 조도와 빛 온도를 바꿀 수 있었고, 개인 조명 기구도 원하면 얼마든지 추가할 수 있었다. 업무 공간도 다양화해서 겉만 화려하고 실제 업무 공간에 소홀한 사옥이 되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갈수록 보안이 중요해지면서 외부인과 미팅할 수 있는 공간은 층을 따로 분리했다. 개발팀 오피스에는 직원만 들어갈 수 있었고, 엔진 연구소나 특별 프로젝트 공간에는 사원증 외에도 별도의 보안키가 필요했다.
그 외 게임 개발에 필요한 자료를 모아둔 라이브러리, 게임 영상을 리뷰하고 영화도 볼 수 있는 극장, 언제든 운동을 하고 건강을 챙길 수 있는 헬스장도 지었다. 매층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무인 카페와 푹신한 소파가 있는 라운지도 만들었다.
최상층에는 직원 식당을 만들고 호텔 출신 쉐프를 고용해 아침, 점심, 저녁에 간식까지 챙겨 줄 계획이었다. 옥상으로 올라가자 진짜 흙이 깔린 옥상 정원이 펼쳐졌다. 조경사들이 아름답게 꾸민 옥상정원에는 다양한 꽃이 조화롭게 피어있었다. 날이 선선할 때면 루프탑 파티를 열 수도 있었다.
“강남에서 이런 정원을 누릴 수 있다니. 진짜 좋다.”
“이만하면 괜찮지?”
“괜찮기는요? 대기업 사옥을 가도 이만한 데 없어요. 절대.”
본래 황제국은 오피스 빌딩보다는 구글이나 애플, 픽사처럼 캠퍼스 형태의 사옥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서울 강남에는 그만한 부지를 구하기는 힘들었고, 외곽 지역이나 경기도로 빠지기엔 직원들의 출퇴근이 문제였다. 결국 빌딩을 짓는 대신 한국 최고의 오피스 빌딩을 짓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뉴퀘스트 사옥은 직원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게임 문화를 함께 만들어 가는 공간도 마련했다.
두 사람은 옥상에서 다시 지하로 내려왔다. 지하에는 대형 연회장이 있었다. 이곳에서 개발자 컨퍼런스, 게임 발표회, 게임 커뮤니티 초청 행사, 게임 대회, 작은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를 열 수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이진수와 진희의 결혼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예쁘다.”
민소영이 결혼식장으로 꾸민 연회장을 둘러보며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메인 무대를 중심으로 가운데에는 레드 카펫이 펼쳐져 있고, 순백의 아름다운 꽃들이 연회장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연회장은 호텔 결혼식장 못지않았다.
그렇지만 벽을 보면 여기가 게임 회사라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연회장 양쪽 벽에는 대형 배너가 여러 개 걸려있었다. 배너에는 신랑과 신부를 정교하게 3D로 모델링한 아바타가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영건 블러드> 장건에 이진수를 합성하거나, 달리는 젤로에 이진수와 진희를 합성하는 등 재미있는 이미지가 많았다.
“정말 영혼을 다해 열심히도 만들었네.”
황제국이 배너를 보며 피식 웃었다. 배너는 모두 차현주와 아트팀의 작품이었다. 배너 중 하나에는 이런 문구가 크게 프린트되어 있었다.
- 나 안 보고 싶었어요?
황제국과 민소영 만큼이나, 이진수와 진희의 러브 스토리도 사내에서 아주 유명했다. 황제국을 알기 전부터 알던 사이인 이진수와 강진희는, 진희가 뉴퀘스트에 입사하면서 더욱 친해졌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성 관계라기보다는 동네 오빠 동생과 비슷한 관계였다.
그러다 이진수가 퀘스트 엔진2를 개발하느라 미국에 오랫동안 출장을 떠나고 돌아왔을 때, 진희는 이진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응? 으응? 어···? 보, 보고 싶었···지?”
“나두요.”
진희가 이진수를 보고 살짝 수줍게 웃었다.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관계로 발전했다. 그렇게 두 사람을 이어준 대사를 배너로, 그것도 커다란 궁서체로 결혼식장 벽에 걸어놓은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랑과 신부가 도착하고, 결혼식장도 곧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신랑 신부 가족과 친척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뉴퀘스트 사람들이었다. 게임 잡지로의 취재 요청은 모두 정중히 거절했다.
열두 시 정각이 되자 오종석의 사회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신랑, 신부의 앞길을 축복해 주기 위해 찾아주신 내빈 여러분 모두 고맙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신랑 이진수 군과 신부 강진희 양의 결혼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메웠다. 화촉을 밝히고, 신랑 입장 순서가 되자 검은 턱시도를 입은 깡마른 이진수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걸어왔다.
“다음은 오늘의 주인공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신부 입장!”
송보람이 결혼 행진곡을 연주하자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강진희가 진희컴 사장님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진희는 밝게 웃고 있는 반면, 진희컴 사장님은 이미 울음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진수는 주례를 이광철 교수에게 부탁했다. 그는 이제 뉴퀘스트의 사외이사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제가 처음 이진수 군을 수업에서 봤을 때가 생각나네요. 저는 보자마자 느꼈습니다. 아! 이 친구는 무조건 대학원이다! 이렇게 똑똑한 학생은 정말 처음이었습니다. 당연히 대학원에 올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뿔싸! 중간에 황제국이라는 녀석이 나타나더니 창업을 한다면서 이진수를 확 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너무 방심하고 있었던 거죠.”
이광철의 작은 폭로에 연회장에서 웃음이 터졌다. 황제국이 아니었더라도 이진수가 대학원에 가지는 않았겠지만 황제국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이진수의 별명이 뭔지 아시지요? 이름부터가 2진수라서 ‘바이너리’입니다. 그리고 디지털은 0과 1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제 신랑과 신부가 만나 가족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 역시 0과 1이 만나 또 다른 세상을 이룬 겁니다. 앞으로 어떤 코드를 써 내려갈지는 오직 두 사람에게 달렸습니다. 버그 없는 프로그램이 없듯, 앞으로도 분명 인생에서 힘든 순간이 있을 겁니다. 그때는 잊지 마세요. 디지털 세계가 작동하려면 0과 1이 모두 필요합니다. 둘 중 하나만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부부 사이도 그렇습니다. 서로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바로 부부입니다. 앞으로도 이 점을 잊지 말고 부디 행복하게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광철은 이진수의 별명에 부부 사이를 빗대어 주례사를 마무리했다. 축가는 <토템 워> 음악 파트가 준비했다. 그들은 중간에 댄스까지 곁들여 마치 한 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한 멋진 축가를 선보여 사람들에게 엄청난 박수를 받았다.
“흐음.”
“왜요, 오빠?”
“아, 아니. 문득 <토템 워>를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만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황제국은 얼른 아이폰을 꺼내 아이디어를 메모했다. 2007년 스티브 잡스가 맥월드에서 아이폰을 발표하며 스마트폰 대중화의 신호탄을 쏘았다. 황제국도 그 역사적인 프레젠테이션 현장에 있었다. 아직 한국에는 아이폰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황제국은 일찍부터 이용하고 있었다.
일가친척들의 사진 촬영 후 곧이어 친구, 동료들의 사진 촬영이 시작되었다. 진희의 부탁으로 부케는 민소영이 받기로 했다.
“언니, 받으세요!”
진희가 부케를 정확하게 민소영에게 던져주었다. 사람들은 곧 황제국과 민소영의 차례라며 웃으며 농담을 했다.
뉴퀘스트 직장 동료가 워낙 많아서 웨딩 사진도 나눠서 찍어야 했다. 미국에서 샌디와 게임 엔진 본부의 핵심 멤버들도 이진수의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한국으로 날아왔다. 세 번에 걸쳐 사진을 찍은 후에야 사진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이진수가 급하게 황제국을 불렀다.
“제국아. 우리 도, 동아리 멤버들끼리 같이 한 번 찍자.”
“그럴까요?”
이진수와 진희를 가운데 두고 뉴퀘스트 초창기 동아리 멤버들이 나란히 섰다. 더러운 동아리 방을 청소하고 신문지를 깔고 짜장면을 시켜 먹었던 사람들이 고작 10년 만에 글로벌 대기업을 만들어 사옥을 올리고, 이제 사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다.
10년 동안 뉴퀘스트의 성장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1998년 뉴퀘스트 매출은 15억 정도였다. 하지만 2008년 뉴퀘스트 매출은 3조 원을 바라보고 있었고, 영업이익은 1조 원을 넘을 것으로 보였다. 투자 은행에서는 뉴퀘스트 기업 가치를 20조 이상으로 추정했다.
글로벌로 사업을 확장하며, 동시에 사업 범위도 늘어났다. 점점 덩치가 커진 퀘스트.tv는 이제는 분사해 뉴퀘스트의 자회사가 되었다. 네드는 창업하는 대신 퀘스트.tv의 CEO로 남았다. 뉴퀘스트는 게이밍 기어에도 투자해 PC용 게임 패드는 물론 게이밍 헤드폰, 키보드, 마우스, 데스크, 스피커 등 하드웨어도 만들었다.
PC게임 다운로드 마켓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퀘스트 스토어는 그중에서 58%의 점유율을 차지했다. 모바일 게임 시장에도 일찍부터 대응하기 위해 한국, 미국, 유럽에서 별도의 추진팀을 꾸렸다. 모바일 팀에는 완벽한 게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 작은 아이디어를 빠르게 구현하고, 많은 시도를 하도록 주문했다. 황제국은 그의 첫 성공작 <삼국지:공성전>을 모바일 버전으로 직접 다시 만들어 무료로 공개하기도 했다.
요즘 황제국은 손정인, 하워드와 함께 주식 상장에 관해서도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2~3년 후 미국 나스닥(NASDAQ)에 상장하는 것이 목표였다.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애플, 구글 등 수많은 IT 기업들이 나스닥에 상장되어 있었다. 손정인도 나스닥 상장에 긍정적이었다.
네 명으로 시작했던 동아리는 이제 전 세계에 수천 명이 근무하는 대기업이 되었다. 이미 미국에도 새로운 사옥과 데이터 센터 건립을 추진 중이었다.
황제국이 만든 게임 제국은 끝없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사진 한 장에는 그토록 너무나 많은 역사가 담겨 있었다.
“우리도 찍어 주세요.”
이진수와 진희는 황제국, 민소영 커플과도 사진을 찍었다. 이어서 친한 동료들이 계속 모여들어 계속 사진을 찍었다. 긴 촬영을 마친 두 사람은 신혼여행을 떠나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1층으로 올라왔다. 1층 후문에는 웨딩카가 준비되어 있었다.
“어?”
후문으로 나온 이진수는 깜짝 놀랐다. 원래 타기로 했던 웨딩카가 아니라 전혀 다른 차가 있었다. 웨딩카는 날렵한 빨간색 스포츠카로, 보닛에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검은색 말 로고가 붙어 있었다.
“이건······. 제국아?”
이진수가 깜짝 놀라서 황제국을 찾았다. 이진수 뒤에서 황제국이 빨간 자동차 키를 흔들고 있었다.
“제가 처음 동아리를 만들고 형한테 같이 게임 엔진 만들자고 했을 때, 3년 안에 빨간 페라리를 탈 수 있게 해준다고 했던 거 기억하세요? 어쩌다 보니 시간이 10년이나 걸렸네요.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결혼선물이에요.”
“제국아······.”
“너무 늦어서 죄송해요. 그리고 결혼 축하드립니다. 너도, 진희야.”
황제국이 이진수에게 자동차 키를 건넸다. 이진수는 황제국을 끌어안고 몇 번이나 등을 두드렸다.
우우우우웅!
이진수가 시동을 걸자 스포츠카 특유의 낮은 엔진소리가 포효하듯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이진수의 입꼬리가 한껏 치솟았다. 안전벨트를 맨 진희가 창문을 내리고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진수도 함께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축하해요!”
“축하드려요~~!”
동료들의 인사와 함께 이진수가 붉은색 페라리를 부드럽게 움직여 도로로 빠져나갔다. 강렬한 엔진음의 여운이 사람들의 귓가에 맴돌았다.
“멋지네! 나도 한 대 살까? 저거 얼마나 해?”
오종석이 거의 넋을 잃은 표정으로 물었다. 황제국이 손가락 4개를 펼치며 대답했다.
“4억.”
“뭐? 그 정도야?”
깜짝 놀란 오종석이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건 안 되겠다. 야, 오해하지 마라. 비싸서 그런 게 아니라 난 페라리 디자인이 나랑 뭔가 안 맞는 거 같아서 그런 거니까.”
“알았어. 가자! 올라가서 밥이나 먹자. 소영아, 배고프지? 얼른 올라가자.”
신랑 신부는 떠났어도 20층 식당에서는 성대한 피로연이 아직 한창이었다. 황제국이 다시 사옥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민소영이 한 손에 부케를 들고 황제국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엘리베이터 문에 두 사람의 미소가 비치고 있었다.
(갓겜의 제국 1998 -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