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회 - 퀘스트 엔진 업그레이드
무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릴 무렵, 황제국은 게임 엔진 본부 이진수, 서버 본부 전용선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이제는 황제국이 미국으로 떠난 것만으로도 뉴스에 올랐다.
- 황제국, 미국 출장길 오른다. <젤리 러쉬> 미국 출시 초읽기?
- 황제국, 이진수, 전용선 뉴퀘스트 개발 삼총사 미국 출장 확인.
- 귀여운 젤로들의 질주, 다음은 미국이다! 황제국, 미국 실리콘밸리 오피스로 출장.
- <젤리 러쉬> 출시 위해 미국으로 향하는 황제국, “또 하나의 신화 쓰겠다”
- 부분 유료화 미국에서도 통할까? 뉴퀘스트 새로운 도전 제2막이 열린다.
황제국은 비행기에서 신문 기사를 읽다가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아니, 나는 또 하나의 신화를 쓰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이젠 하지도 않은 말이 막 기사로 나오네요.”
“다~~ 니가 유명해서 그런 거지. 유명인의 운명이라고 생각해라.”
전용선이 관심 없다는 듯 영혼 없이 대답했다. 그는 자기 이름이 기사에 얼마나 나왔는지 체크하느라 바빴다. 옆에서 이진수는 노트북을 켜놓고 퀘스트 엔진 코드를 살피고 있었다.
팔로 알토에 첫 오피스로 마련했던 집은 여전히 뉴퀘스트가 임대해서 사용 중이었다. 황제국이 쓰던 방은 서울이나 유럽 오피스에서 출장오는 사람들을 위한 게스트룸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황제국이 크레이그리스트에서 마련했던 중고 침대가 더 좋은 매트리스로 바뀌고, 방에 침대가 2개로 늘어난 것 외에는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숙소에 각자 짐을 풀고 일행은 팔로 알토 오피스로 향했다. 미국 오피스도 그사이 사람이 늘어나 오피스 공간이 거의 꽉 찬 상태였다.
영건 블러드 라이브팀은 인력에 큰 변화가 없었지만, 게임 엔진 라이선스&서포트 팀은 계속 사람이 늘고 있었다. 황제국의 요청으로 샌디는 게임 엔진 관련 인력을 계속해서 찾고 있었다.
“보스가 원하던 AI 전문가를 이번에 뽑았어요. 라이언헤드 스튜디오에서 <블랙&화이트> AI 개발에 참여한 엔지니어입니다.”
“안녕하세요. 브라이언입니다.”
“갓 게임을 개발하던 분이 오셨네요. 환영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사운드 엔지니어, 케이든입니다.”
“드디어 보스를 만나네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케이든은 돌비(Dolby)에서 다중 채널을 연구하던 엔지니어입니다. 퀘스트 엔진 사운드 부분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반갑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퀘스트 엔진 v2.0에는 멀티채널 사운드를 도입해야 하는데 때맞춰 필요한 분이 오셨네요.”
황제국은 이진수가 퀘스트 엔진에서 3D 그래픽 부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다른 기능 모듈 업그레이드를 담당할 전문가를 계속 찾고 있었다. <영건 블러드> 운영은 안정화되었기에 샌디 역시 게임 인력을 찾는 데 주력했다.
처음에 이진수는 퀘스트 엔진 업그레이드에 여러 사람이 붙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AI는 처음 퀘스트 엔진을 만들 때부터 이진수의 아픈 손가락이었고, 더더욱 직접 업그레이드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이먼과 함께 v2.0 개발을 진행하면서 3D 그래픽 업그레이드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 퀘스트 엔진을 만들었던 때와 비교해 3D 그래픽 기술은 몰라보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프로그래머가 신경 써야 할 부분도 크게 늘었다.
3D 그래픽 카드의 최강자였던 부두는 시장 장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대신 GPU라는 컨셉을 들고나온 엔비디아의 GeForce가 시장을 선도하고 있었고, 캐나다 기업 ATI는 레이지 시리즈를 접고 라데온(Radeon) 브랜드를 런칭해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3D 그래픽에서 GPU 개념이 발전하면서 예전에는 고정된 기능만 수행했던 그래픽 프로세서가 점점 프로그래밍 가능한 프로세서로 진화하는 중이었다. 그만큼 프로그래머가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고, 창의성을 발휘할 부분도 늘어났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다이렉트X 8.0을 발표하면서 엔비디아의 GeForce 3 시리즈를 기본 하드웨어로 채택했다. 동시에 다이렉트X 8.0은 셰이딩(Shading, 물체 표면의 밝기 등을 조절해 원근감, 깊이감 등을 표현하는 것)을 프로그래밍 가능하게 만들었다.
셰이딩은 GPU가 수행하는 대단히 중요한 기능 중 하나다. 렌더링이 형태를 잡는다면, 셰이딩은 표면의 사실감, 입체감 등을 좌우한다. 동일한 렌더링에 똑같은 텍스쳐를 적용해도, 셰이딩을 어떻게 하는 가에 따라 느낌과 분위기까지 달라진다.
이진수는 초창기라 아직 별다른 가이드라인도 잡히지 않은 셰이딩 프로그래밍에 몰두했다. 빠른 3D 그래픽으로 박진감 넘치는 네트워크 플레이어 초점을 맞춘 첫 퀘스트 엔진은, 황제국이 물리 엔진을 업그레이드하며 사실적인 움직임을 더했다.
퀘스트 엔진 v2.0은 1024x768 이상의 고해상도 그래픽에 GPU 성능을 극한으로 뽑아내 최고의 광원 효과와 매끄러운 표면 디테일 묘사가 가능한 게임 엔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진수의 머릿속은 오직 ‘빛’에 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퀘스트 엔진의 다른 기능 모듈까지 직접 손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진수는 다시 한번 황제국의 혜안에 놀랐다. 이진수는 여전히 조직 관리에는 미숙해 게임 엔진 본부 채용과 관리에 황제국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덕분에 AI와 사운드 파트에 타이밍 좋게 꼭 필요한 인재를 영입할 수 있었다.
황제국은 이진수가 귀국할 때 브라이언과 케이든을 함께 한국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뉴퀘스트의 첫 오피스 교환 프로그램으로 최소 6개월에서 1년 정도 퀘스트 엔진 v2.0이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이 이진수와 함께 일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한국 오피스에 미국과 유럽 인력을 주기적으로 초대해 뉴퀘스트가 글로벌 게임 기업이라는 사실을 직원들이 피부로 느끼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황제국은 이진수와 함께 게임 엔진 라이선스팀 사람들을 만나 상황을 체크했다. 초기엔 계약을 따지 못해 고전했던 게임 엔진 라이선스 팀은 이제는 한 달에 서너 건 이상의 신규 계약을 맺고 있었다. 신규 계약이 끊이지 않고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게 고무적이었다.
“현재까지 계약 건의 절반 이상은 장르가 FPS입니다. 그리고 1/3 정도가 RPG구요.”
“RPG는 시점이나 시스템, UI 등에 커스텀이 많이 필요했을 텐데요.”
“아무래도 FPS보다 손이 많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죠. 그래서 저희가 처음부터 RPG 영업용으로 <디아블로 2> 느낌을 손쉽게 낼 수 있는 RPG 영업용 버전이 있습니다. 게임 회사 미팅을 많이 다니다 보니 요즘 회사들이 원하는 스타일이 그렇더라구요. 그래서 아예 샘플 게임까지 만들어버렸죠.”
“한 번 보여주세요.”
게임 엔진 라이선스팀 세일즈 매니저 알렉세이가 곧 퀘스트 엔진으로 만든 샘플 RPG 게임을 실행시켰다. 알렉세이는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스스로 ‘<테트리스>의 피를 물려받은 사나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실제로 그의 <테트리스> 실력은 눈을 의심할 만큼 뛰어났다.
게임을 띄우자 쿼터뷰(사선으로 내려보는 방식) 시점으로 탁 트인 황야에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장착한 기사가 나타났다. 황제국이 마우스 오른쪽 버튼으로 포인트를 지정하자 기사가 움직였다. 조금 움직이다 보니 주변에서 고블린처럼 생긴 녹색 괴물이 나타났다.
마우스 왼쪽 버튼을 누르자 기사가 칼을 휘둘렀고 고블린이 썰려 나가며 비명을 질렀다. 고블린이 죽은 자리에는 피가 선명했고, 돈주머니가 떨어져 있었다. 전형적인 서양 중세 RPG 느낌이 물씬 풍겼다. 황제국은 심각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냥 이렇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캐릭터나 몬스터 외모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쿼터뷰 액션 RPG를 퀘스트 엔진으로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만든 샘플이니까요.”
알렉세이는 혹시 황제국이 그의 승인 없이 RPG 샘플을 허접스럽게 만들었다고 화를 낼까 봐 얼른 덧붙였다. 황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도인지 압니다, 알렉세이. 확실히 비주얼은 전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인데 전투는 생각보다 손맛이 있는데요?”
황제국은 계속 고블린들과 전투를 벌이며 말했다. 애니메이션은 그다지 부드럽지 않았지만 칼을 휘두르는 순간 베는 소리와 비명, 피가 튀는 타이밍 등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그저 검을 휘두르는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제법 싸우는 느낌이 들었다. 고블린이 점점 늘어나더니 갑자기 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적이 잔뜩 몰려오네요. 마법 같은 건 없나요?”
“RPG에 마법이 빠지면 되나요? 숫자키 1~5 중에서 눌러 보세요.”
황제국이 3을 누르자 기사가 하늘로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번개가 비처럼 쏟아지며 스파크가 번쩍거리더니 고블린 무리가 전멸했다.
“호쾌한데요?”
“어차피 샘플인데 밸런스 같은 거 따질 필요 있나요? 그냥 최대한 쿨하고 강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샘플은 팀에서 제작한 건가요?”
“네, 테크니컬 서포트팀에 RPG 개발하던 친구가 두 명 있거든요. 두 사람에게 부탁했죠.”
“만나보고 싶네요.”
황제국은 두 사람을 호출했다. 네이트와 올슨은 갑자기 사장이 호출하자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황제국은 두 사람의 인사 카드를 확인하고 마치 면접을 다시 보듯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디아블로>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개인적으로 딱히 좋아하지는 않아요. 수많은 인물과 대화를 하고, 문제를 찾아다니며 온 대륙을 쏘다니는 게 RPG의 매력인데 <디아블로>는 RPG를 온통 때려 부수는 액션으로 쪼그려뜨려 놨어요.”
“저는 네이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요. <디아블로>는 RPG의 물줄기를 바꿔버린 게임입니다. 열쇠 하나 찾겠다고 온 대륙을 쏘다니는 걸 모험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지루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더 많아요. 울티마, 위저드리, 마이트&매직 같은 명작 시리즈가 많지만 <디아블로>가 등장하고 모두 쓰러졌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RPG의 재미가 빠른 전투와 성장이라는 걸 <디아블로>가 증명한 거죠.”
“아니, 올슨. 나는 <디아블로>가 나쁜 게임이라고 한 적은 없는데. 나도 게임의 업적은 인정해. 대단한 게임이야. 그런 방식으로는 아주 매끈하게 잘 만들었지. 나만 내 취향이 아니라는 거야.”
“적어도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라면말야, 네이트. 자기의 취향과 게임에 관한 평가는 분리해야 하는 거 아냐? 자기 취향에 갇혀 버리면 시야가 좁아져서 더 좋은 게임을 만들지 못한다고.”
“아니, 그건 아니지. 전혀 달라. 오히려 게임 개발자라면 자기 취향을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해. 자기가 정말 사랑하고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야 해. 그래야 게이머들도 좋아한다고. 내가 진심으로 즐길 수 없는 게임을 어떻게 남에게 팔 수가 있어?”
“니가 그렇게 앞뒤 안 가리고 네 생각만 하니까 전 회사에서도 쫓겨난 거야.”
“왜 여기서 그 얘기가 나와? 그리고 쫓겨난 거 아니라니까? 매니저가 하도 태클을 걸어서 내 발로 나온 거라니까?”
네이트와 올슨은 황제국이 앞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황제국은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그런데, 네이트. <디아블로>가 썩 마음에 들진 않는다고 했는데 RPG 샘플은 그 스타일을 잘 따라 했던데요?”
“그건 올슨이 어떻게 해야 비슷한 느낌을 낼 수 있는지 정리를 잘 해줬거든요. 일단 머릿속에 이미지가 잡히면 퀘스트 엔진으로 만드는 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엔진이 워낙 좋으니까요.”
“네이트 성격 아시겠지만 이 녀석은 뭐가 맘에 안 들면 그걸 고치든지, 아니면 쫓겨나든가 하는 놈이거든요? 이 친구가 게임 엔진 서포트 팀에 순순히 들어온 걸 보면 엔진이 정말 마음에 들거나, 아니면 통장 잔고가 제로거나 이것도 둘 중 하나가 분명합니다.”
“쫓겨난 거 아니라니까?”
황제국은 곧 두 사람의 스타일을 파악했다. 올슨은 분석력과 이해력,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난 반면, 개발 능력은 네이트가 더 좋았다. 다만 네이트는 자기가 원하는 방식이나 스타일이 아니면 개발에 속도를 내지 못하는 타입이었다. 황제국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는 괜찮은 콤비로 보였다.
“RPG 샘플은 잘 봤어요. 혹시 두 사람, 사이드 프로젝트 해 볼 마음 있습니까?”
“사이드 프로젝트요?”
“어떤 거죠?”
“두 사람이 RPG에 관한 애정과 지식이 얼마나 깊은지 알 것 같아요. 뉴퀘스트도 이제 제법 커졌고, 차기작을 위해 RPG 전투 시스템을 테스트해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RPG 전투 시스템 개발을 사이드로 말입니까?”
“맞아요. 내가 매니저에게 일러둘테니 시간 구성은 두 사람이 편하게 조정하세요. 사이드는 일과의 30% 이내 수준으로요. 만약 사이드 프로젝트 결과가 좋다면 나중에는 이쪽이 풀타임이 될 수도 있겠죠.”
네이트와 올슨은 순간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이 0.1초 만에 눈빛으로 대화를 마쳤다.
“좋습니다. 다른 회사 게임을 위해 하루종일 엔진만 수정하는 것보다는 재밌을 거 같네요.”
“저도 좋습니다.”
“좋아요. 그럼 두 사람은 RPG 게임을 위한 전투 시스템을 연구하고, 다양한 모델을 만들어 보세요. 게임 시점, 타겟팅 혹은 논타겟 방식, 근거리와 원거리, 마법 등등 자유롭게 프로토타입을 개발해 보세요.”
“그냥 뭐든 만들어도 상관없나요?”
“물론입니다. 퀘스트 엔진으로 무엇을 할 수 있나, RPG로 어디까지 만들 수 있나 실험한다고 생각하세요.”
황제국은 네이트&올슨 콤비에게 테스트 삼아 RPG 전투 시스템 개발을 맡겼다. 그는 시대에 어울리는 시스템을 보기 위해 일부러 가이드도 주지 않았다.
‘만약 생각보다 좋은 시스템이 나오면 시스템은 미국에서, 콘텐츠는 한국에서 개발하는 글로벌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겠네.’
황제국의 마음속에는 조금씩 차기작 아이디어가 움트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회사에 오픈하지 않았다. 좀 더 생각이 무르익을 때까지 다양하게 테스트해보며 길을 찾을 생각이었다.
이진수가 새로운 팀원들과 퀘스트 엔진을 업그레이드하는 사이, 황제국과 전용선은 미국에서 <젤리 러쉬> 오픈 준비를 시작했다. 샌디는 젤리 러쉬 라이브팀 인력을 찾기 시작했고, 젤리 러쉬팀이 들어갈 사무실도 함께 알아봤다.
<젤리 러쉬>는 이미 한국에서 검증이 끝난 게임이고, 번역조차 거의 필요 없었다. 미국 시장을 위한 새로운 콘텐츠와 마케팅이 로컬라이징에서 더 중요했다. 미국에 출시할 때는 한국과는 다른 맵을 추가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황제국은 서두르지 않았다. 2001년 9월이 오면 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사건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