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 시드머니(Seed Money)
“그래, 학교는 어때요?”
“번들 게임 날짜 맞추느라 입학식 하고 나서 제대로 학교에 못 갔어요.”
“아이고, 우리 때문에 미래의 게임 개발자가 학고라도 맞으면 큰일인데.”
편집장이 밉지 않게 오버를 떨면서 셋은 잠시 근황 이야기를 나눴다.
“아니, 근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맵 에디터를 만들어서 유저에게 제공한다니?”
“처음부터 그러려고 만든 건 아니구요. 그냥 개발하기 편하려고 만들었던 건데, 저 혼자 가지고 있느니 이참에 공개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크~~, 심지어 그걸로 고객 참여 이벤트까지 만들고. 개발 천재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마케팅 천재인 거 같은데요? 하하하!”
편집장은 황제국을 기분 좋게 띄워주며 호탕하게 웃었다. 사실 맵 에디터를 만들고 공개하는 것은 황제국에게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스타크래프트>나 <워크래프트 3> 같은 게임은 유즈맵 세팅을 제공해 게이머가 마음대로 맵을 편집하고, 전투를 디자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심지어 사람들은 유즈맵 세팅을 이용해 전혀 다른 게임을 만들기도 했다. 전 세계에서 한 달 동안 이용자 1억 명을 달성해 전설이 된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가 <워크래프트 3>의 유즈맵 세팅에서부터 출발한 게임이었을 정도다.
하지만 98년 3월은 <스타크래프트>가 발매되기 직전이었다. 맵 에디터를 함께 제공하는 것이 충분히 참신해 보일만 했다.
“그럼 이제 다음 계획이 뭐예요? 설마 우리 천재 개발자가 입학했다고 공부만 하지는 않을 테고?”
“제가 번들 게임에, 에디터로 이벤트까지 챙겨드렸는데, 벌써 다음 아이템 취재하시는 거예요?”
“아니, 이거 눈치도 장난 아니네, 허허허허!”
편집장은 민망한 듯 웃었지만 황제국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직 명확하게 뭘 만들겠다는 계획은 없어요.”
“아직은?”
“네, 아직은. 하지만 하나는 확실해요. 다음 게임은 무조건 인터넷을 기반으로 많은 사람이 동시에 즐기는 게임이 될 거예요.”
“인터넷에 대한 믿음이 정말 확고하네. 난 아직 모르겠던데.”
“사실 저도 그랬는데, 이제는 제국이가 그렇다고 하니까 무조건 그럴 거 같아요.”
PC 게이머 김성진 편집장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남동진 기자는 이제 완전히 황제국을 믿고 있었다. 황제국은 굳이 편집장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테니까.
번들 비용 입금을 위해 황제국은 주민등록증과 통장을 복사했다. 일을 마치고 편집장은 황제국과 조윤권에게 점심을 사 주었다. 점심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게임 이야기가 나왔다. 조윤권은 자기가 즐겼던 게임과 게임에 얽힌 이야기를 줄줄이 읊었다. 편집장은 입을 떡 벌렸다.
“아니, 게임 지식이 웬만한 우리 기자들보다 나은데? 지금 대학생이라고? 흠, 그럼 혹시 토요일마다 알바해 볼 생각 있어요?”
“네? 저요? 있어요. 완전 있습니다, 편집장님!”
조윤권은 온통 게임에 둘러싸여 일할 수 있는 환경만으로도 이미 눈이 돌아가 있었다. 밥을 먹고 편집장과 헤어지자 조윤권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제국아, 오늘 불러줘서 고마워. 알바지만 벌써 PC 게이머에서 일을 하다니. 전부 니 덕분이야.”
“무슨, 네가 워낙 게임을 좋아한 덕분이지. 일이 잘 풀려서 나도 기분 좋네.”
황제국은 잡지 번들 제작을 마치고, 친구에게 딱 어울리는 일자리까지 연결시켜 홀가분했다. 그는 아직 입금되지는 않았지만 오종석과 차현주에게 저녁을 사기로 했다.
하지만 저녁 먹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서 일단 자주 가던 PC방에 들렀다. 방학 동안 매일 보던 사이라 그런지 못 본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오랜만에 만나는 기분이었다.
황제국은 그가 FTP 서버를 설치한 컴퓨터에 자리를 잡고, 차현주가 가운데, 그 옆에 오종석이 앉았다. 그가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가면서 주인아저씨에게 슬쩍 물었다.
“별일 없으셨죠?”
“응, 그럼~. 근데 요즘 가끔 밤이나 새벽에 인터넷 속도가 갑자기 떨어질 때가 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네.”
황제국은 가슴이 뜨끔했다. 새벽에 속도가 떨어지는 건 그의 게임을 다운로드하려는 네트워크 요청이 몰린 탓일 가능성이 컸다. 그는 얼른 둘러댔다.
“아, 그래요? 뭐 가끔 회선 문제가 생기고 그러잖아요.”
“그런가? 아무튼 골치 아파. PC방 이거 얼마나 더 할지 모르겠어. 유망하다고 추천받아서 내긴 했는데 난 컴퓨터도 잘 모르고. 그냥 정리하고 당구장이나 할까 봐.”
“왜요? 그러지 마시고 몇 달만 더 해보세요. 차라리 좀 더 본격적으로 해보시는 게 어때요? 이참에 컴퓨터도 늘리고요. 책상 배치만 좀 바꿔도 몇 자리는 충분히 더 나올 거 같은데요?”
황제국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만약 지금 면적에서 20년 후 PC방 기준으로 다시 꾸민다면, PC를 2배는 늘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쾌적하지만, 이 상태로는 제대로 수익을 내기 힘들어 보였다.
“컴퓨터를 늘린다고?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자리 늘리면 컴퓨터도 컴퓨턴데, 그 비싼 네트워크 장비 사고, 공사도 새로 해야 하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한 게 아깝잖아요. 제 말 믿으세요. 당구도 재밌지만, 앞으로 당구 하는 사람이 얼마나 늘겠어요? 하지만 컴퓨터 게임은 이제 시작이에요.”
“정말 그럴까?”
“그럼요. 아저씨가 오히려 남들보다 조금 빨리 시작하신 거에요. 아직 존버 타이밍일 뿐이에요.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본격적인 인터넷 게임 시대가 와요.”
“존버? 그건 뭐야?”
“아, 이제 곧 ‘존나 버는’ 타이밍이 올 거라구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제가 한 가지 진짜 중요한 거 알려드릴게요.”
“뭔데?”
“이달 말에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나올 거거든요? 그게 나오면 무조건 컴퓨터 대수 만큼 사세요.”
“전부?”
“네, 싸그리요.”
“야, 그러면 최소 수백 깨질 텐데?”
“그거 RTS 최고봉 <워크래프트>랑 <워크래프트 2> 만들었던 회사에서 이 악물고 만든 게임이에요. 분명 이번에도 히트쳐요. 절 믿으세요.”
“그런가?”
귀가 얇은 PC방 주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제국은 얼른 자리로 돌아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FTP 서버의 운영 상태를 모니터링했다. 그가 번들 제작에 몰두하는 동안 다운로드 숫자가 확실히 늘고 있었다. 좀 많은 날과 좀 적은 날이 있었지만 그래프는 우상향을 그리고 있었다.
“왜? 들켰어? 아저씨가 뭐라 그래?”
“아니, 아직은 괜찮아. 근데 슬슬 위험하려고 그러네. 다른 방법을 찾아 봐야지.”
“뭐냐, 니들? 또 무슨 나 모르는 얘기 꿍시렁 거려?”
“무슨, 그런 거 아니야. 자, 그림 한 번 그려볼까?”
황제국은 차현주에게 약속한 대로 컴퓨터로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차현주는 황제국의 설명을 듣고 마우스를 열심히 딸깍거리며 그림을 그려 보았다.
“음, 이렇게 직선이랑 도형을? 확실히 컴퓨터로 하니까 이런 건 좋네. 모양도 정확하고. 색 넣기도 편하고.”
“그치?”
“응, 근데 딱딱해. 선에 아무런 느낌이 없잖아.”
“아직 어쩔 수 없지. 마우스로는 압력을 조절할 수 없잖아. 근데 이것도 새로운 입력 도구 나오고, 컴퓨터가 더 발달하면 달라질 거야. 그러면 유화나 수채화 느낌도 낼 수 있을 거야.”
“진짜? 그런 날이 올까? 이 그림을 보면 그런 생각 안 드는데.”
“와, 반드시.”
“제국이 너는 다른 건 안 그런데 게임이랑 컴퓨터에 대해서는 정말 확신하네.”
“왜 그런지 가르쳐 줄까?”
오종석이 옆에서 게임을 하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왜? 뭐 다른 이유가 있어?”
“제국이가 나한테만 살짝 알려줬는데.”
“야, 그걸 제국이가 있는 데서 나한테 까는 거야? 하여간 오종종, 입은 싸 가지구.”
“...... 됐다. 관두자.”
“야, 그러면 안 되지. 말만 꺼내놓고 꼬리 말고 도망가냐?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기 있어?”
“아, 얜 또 남자 자존심을, 좋아. 제국이가 그러는데 쟤 미래에서 왔데. 그래서 앞으로 컴퓨터가 어떻게 될 지 안데.”
오종석이 킥킥 거리며 말하자 차현주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순식간에 주위가 싸해졌다. 그녀는 의심의 눈길로 황제국에게 물었다.
“진짜야?”
“아닌데.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야! 와, 황제국, 너!”
“시끄러, 오종종! 하여간 입만 열면 허풍이야!”
황제국이 시치미를 떼자 차현주는 오종석에게 눈을 흘겼다. 오종석이 세상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소용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PC방 주인에게 주의를 들었고, 차현주가 입을 삐죽거렸다.
“너 때문이야!”
“아니 제국이가 진짜 그랬다니까, 나한테?”
“난 그런 적 없는데? 농담을 해도 그렇게 황당한 농담을 하겠어, 내가?”
“우와~~~, 미치겠네!”
“슬슬 배고프지? 이제 저녁 먹으러 갈까?”
세 사람은 가볍게 저녁을 먹고, 꼬치구이 술집 토다리로 향했다. 이제 대학생이 된 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술집에 갈 수 있었다. 황제국은 꼬치안주 몇 개와 어묵탕, 그리고 레몬 소주를 시켰다. 달달한 레몬 소주를 마시자 옛날 그 시절에 와 있는데도 옛 생각이 났다. 정말 아이러니한 기분이었다.
“와, 맛있다. 쭉쭉 들어가네.”
“조심해. 그렇게 마시다가 갑자기 한순간에 뻗는 게 과일 소주야.”
“괜찮아. 나 OT 가서도 선배들 다 뻗어도 새벽까지 말짱했어.”
“어이구, 오죽했겠냐.”
웃으며 술을 마시던 황제국이 잡지 번들과 돈 얘기를 꺼냈다.
“이번에 <삼국지:공성전>을 잡지 번들로 내면서 500만원을 받기로 했어. 현주, 너도 들었지?”
“응, 입 싼 오종종한테 버~~얼써 들었지.”
“오늘 잡지사에 데이터 넘겨주고, 필요한 서류도 모두 전달했어. 입금되면 너희한테 각각 50만원씩 줄게.”
“어, 진짜?”
오종석과 차현주가 동시에 놀란 얼굴로 황제국을 바라봤다. 50만원이 대단히 큰 돈은 아니지만, 1998년의 대학생에게는 적지 않은 액수였다.
“그래, 내가 게임을 혼자 만든 것도 아니고, 너희 둘이 도와줘서 더 빨리, 그리고 완성도 있게 만들었잖아. 게임에서 수익이 나왔는데 당연히 나눠야지.”
“어, 그래. 우리가 도와준 건 맞는데, 아~ 뭔가 맞는 거 같으면서 아닌 거 같고, 기분 묘하네.”
“오종종,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해? 한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제국이가 알아서 주겠다고 하는데. 고마워, 제국아. 잘 쓸게. 안 그래도 물감 사야 하는데 잘 됐다.”
“야, 아무리 그래도 친구끼리 막 돈거래하고 그런 거 쫌 그렇잖아?”
“아니야. 오히려 가까운 사이일수록 돈 문제가 깔끔해야 하는 거야. 우리가 계약하고 시작한 건 아니지만 현주 말대로 네가 일한 몫이 있어서 주는 거야. 사양할 거 없어.”
“그, 그럴까 그럼?”
오종석도 받아들이자 셋은 레몬 소주로 건배하고 원샷을 했다. 즐겁게 마시는 레몬 소주는 더 달았다. 차현주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내가 어쩐지 제국이 너랑 있으면 좋은 일이 있을 거 같더라. 게임 만드는 것도 재밌었는데 이렇게 돈까지 생길 줄은 몰랐네. 제국이 넌 그럼 우리 주고도 돈이 꽤 남잖아. 그걸로 뭐할 거야?”
“세금 떼고, 너희들한테 100만원 주고 하면 400 좀 안되지. 이건 시드 머니로 쓸 거야.”
“시드머니? 어디 투자하려고?”
오종석이 경영학과답게 물었다. 황제국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음, 투자라면 일종의 투자지. 근데 재테크를 하려는 건 아니야.”
“그럼?”
“우리한테. 우리가 만들 게임 동아리 초기 활동 자금으로 쓸 거야.”
“크으~ 황제 폐하. 역시 생각이 다르네. 그러면 나도 그 돈 안 받을래. 그냥 시드머니에 같이 넣어줘.”
“야, 오종종! 너가 안 받으면 나만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년 되잖아?”
“뭐, 딱히 틀린 말···이지! 누가 차현주보고 이기적이래? 절대 아니야!”
오종석이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말을 바꿨다. 황제국이 웃다가 오종석에게 말했다.
“현주 말이 맞아. 받아서 필요한데 써. 만약 정말 필요한 돈이었으면 처음부터 양해를 구하고 내가 가지고 있었을 거야. 이건 그냥 기분 좋게 함께 애쓴 너희한테 주고 싶어.”
“제국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알았어. 고맙게 받을게.”
“그래, 받아줘서 고마워.”
잠시 생각하던 오종석이 결국 돈을 받기로 했다. 세 사람은 건배하며 게임 동아리와 그들의 미래에 관해 얘기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를 만큼 기분 좋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