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회 - 멸망 시나리오
황제국 특별법까지 발의된 후, 황제국에게는 온갖 강연,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대부분 그동안 전혀 관계없던 곳에서 들어오는 요청이었다. 황제국은 차기작 개발에 집중해야 한다며 많은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무슨 경제인 오찬 모임이 이렇게 많냐? 또 오찬 모임 초청 요청 들어왔다. 특급 호텔에서 조식도 제공한대.”
“어후, 황금 같은 오전 시간에 무슨 오찬 모임이야. 이번에도 잘 거절해 줘.”
“알았어. 요즘 대한민국은 너 빼면 모임이 안 되나 봐. 이게 대체 무슨 난리냐.”
“그러게. 세상 일이 참 알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요청이 쏟아지자 오종석이 임시로 황제국의 비서 업무를 맡았다. 그는 황제국에게 오는 전화를 대신 받고, 중간에서 꼭 필요한 일을 필터링해 황제국에게 전달했다. 매체 인터뷰도 요청이 너무 많아 가려서 받는 지경이었다.
오공실업은 다큐멘터리 방영 이후 <영건 블러드> 판매량이 다시 폭증하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오리지널 게임을 발매한 지 1년 6개월이 흘렀는데 <영건 블러드>의 인기는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잊을 만하면 새로운 이슈가 등장하며 인기에 다시 불을 지폈다.
“진짜 할 말이 없습니다, 대표님. 매번 여기가 정점이겠구나 싶으면 또 새로운 이슈가 터지네요. 발매 3년 차에도 이렇게 인기를 누릴 수 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다 그때 차장님이 저희를 발견해 주신 덕분이죠.”
“아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표님이 워낙 좋은 게임 만들어 주신 덕분이죠. 저···, 그런데 대표님.”
“네, 차장님?”
“이번에 차기작 언급이 있으시던데 혹시 패키지 게임으로 출시하시나요?”
“아직 개발 중이긴 하지만 아마 패키지 형식은 아닐 것 같습니다.”
“아······, 네······. 이거 제가 괜히 김칫국을 마셨나 보네요, 하하하하! 죄송합니다, 대표님.”
“아닙니다. 그런데 패키지 게임은 아니라도 차기작에서도 오공실업과 함께 할 일은 있을 것 같습니다.”
“아, 그런가요?”
“아직 개발 중이라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기는 어려워요. 출시 일정 등이 좀 더 구체화 되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은 <영건 블러드>에 집중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오공실업의 김상혁 과장은 이제 차장으로 승진했다. 뉴퀘스트의 파트너들은 모두 뉴퀘스트 덕에 크게 성장하고 있었고, 당연히 계속해서 뉴퀘스트와 함께 하고 싶어했다. <젤리 러쉬>는 온라인 게임이라 패키지 유통은 필요 없었다. 하지만 PC방 과금 모델을 만들려면 이미 PC방 네트워크를 축적한 오공실업의 힘을 빌리는 게 나았다.
황제국은 지금 타이밍에 해외 진출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그는 팔로 알토 오피스에서 서버 팀을 이끌고 있는 전용선을 한국으로 불렀다. 미국도 반 년간 퀘스트넷을 운영하고, 영건 아레나까지 성공적으로 오픈하며 충분한 노하우를 쌓은 상태였다.
“본부장님, 이제 새로운 일을 하셔야죠.”
“야, 제국이 니가 날 본부장이라고 부르니까 왜 이렇게 간지럽냐. 그리고, 뭔지 모를 오싹한 기운이 감도는데? 너 설마?”
“외국에 오래 계시더니 개코가 되셨네요. 미국에서 충분한 성과를 올렸으니 이제 유럽으로 가야죠. 유럽에도 퀘스트넷을 만들어 주세요.”
“야, 나 한국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그럼 어떡합니까? 본부장님의 퀘스트넷 기술이 우리 뉴퀘스트 글로벌 확장의 핵심인데요.”
“그렇게 띄워 줘 봐야 소용없어. 어쩐지~, 날 본부장으로 만들 때부터 내가 알아봤어야 하는데. 하~, 쫌만 기다려 봐. 한국 서버팀부터 좀 정비하고. 태권이랑 알바생들로는 지금 간당간당해.”
“네, 그럼요. 일단 본진부터 든든하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한국에 온 전용선은 퀘스트넷부터 점검했다. 그동안 박태권이 게임 서버 용량을 늘려가며 몇 번의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겨왔다. 겉으로 보기엔 한국 서버가 별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전용선이 보기에는 곳곳에 시한폭탄이었다. 뉴퀘스트는 3명의 서버 엔지니어를 새로 뽑았다.
서버 엔지니어 교육이 끝날 무렵, 황제국 역시 유럽에 게임을 유통할 유통사를 선정했다. 여러 조건을 비교한 후 유비소프트(UBISOFT)와 유럽 지역 독점 유통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유럽 서버는 커뮤니케이션을 고려해 영국에 마련하기로 했다. 전용선은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입 엔지니어 한 명과 다시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에는 같이 못 가서 죄송해요. 그래도 분명 잘하시리라 믿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몰라~. 다 내 맘대로 할 거야. 억울하면 같이 가든가.”
전용선은 공항까지 배웅 나온 황제국에게 끝까지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의 성격을 잘 아는 황제국은 아무 걱정도 없었다. 영국에는 하워드가 동행해 오피스 세팅을 도와주고 오기로 했다.
때마침 일본에서는 스튜디오 X가 <영건 블러드> PS2 포팅 작업을 끝마치고 마지막 QA 작업 중이라고 연락이 왔다.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고, 이 흐름을 그대로 이어 유럽과 PS2 콘솔 시장에서도 성공하면 이제 <영건 블러드>로 이룰 수 있는 성취는 거의 다 이루게 된다.
삼정과의 MP3 콜라보레이션 역시 착착 진행 중이었다. 삼정은 <영건 블러드>가 E3에서 수상하자 주요 일간지에 축하 광고를 냈다. 그리고 때를 봐서 내기로 했던 뉴퀘스트-삼정 MP3 콜라보레이션에 관해 대대적으로 보도자료를 뿌렸다. 보도자료에는 새로운 YAPP MP3에 <영건 블러드>의 주인공 장건이 그려진 시안이 들어갔다.
E3 수상과 황제국 다큐멘터리로 <영건 블러드>에 관한 관심이 최고조에 오른 때를 삼정은 놓치지 않았다. 삼정이 홍보 작업을 시작하자 한국의 신문이란 신문에는 모두 빠짐없이 뉴퀘스트-삼정 콜라보레이션 기사가 올라갔다. 오종석은 다시금 삼정의 조직력에 감탄했다.
“조간, 석간, 경제 신문, 스포츠신문 어디 하나 물샐 틈이 없네. 진짜 철저하다.”
“제대로 굴리기가 어렵지, 방향 잡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진짜 무서운 게 대기업 조직력이니까. 삼정은 우리 이미지를 이용하니까, 우리는 삼정의 조직력과 영업망을 최대한 이용하자.”
“그럼 다음에 <젤리 러쉬> 나오면 또 MP3 콜라보레이션 할 생각이야?”
“일단 영건 에디션이 어떻게 나오는지 봐야겠지만, 삼정에서 적극적으로 나온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픽을 입히는 게 아니라 아예 젤로 모양으로 나오면 진짜 대박일 거 같은데.”
“가능하지. 색깔별로 출시해서 모아놓으면 진짜 예쁠 텐데. 그건 먼 이야기고, 일단 영건 버전 잘 나오게 우섭 대리님이랑 잘 체크해 줘.”
“알았쓰. 걱정마!”
처음 오종석은 하워드 밑으로 조직을 옮겼을 때 약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오종석은 황제국이 게임 만드는 걸 보고 제일 먼저 팀에 합류했다. 그런데 이제 황제국과 다른 조직으로 떨어져 버렸다. 물론 같은 회사였지만 콘텐츠 팀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것은 아쉬웠다.
그렇지만 하워드가 재무를 다루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고, 같은 공간에서 자연스레 대화를 많이 나누다 보니 조금씩 생각이 달라졌다. 경영과 마케팅 부서가 오종석에게 더 잘 맞고, 회사 차원에서도 더 도움이 되는 자리였다.
특히 유명 투자은행에서 일하다 온 하워드는 오종석에게는 걸어 다니는 경영학 교과서나 다름 없었다. 수업 시간에 다루는 케이스스터디보다 하워드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고, 생생하면서 깊이도 있었다.
“공부? 공부 물론 좋지. 회계는 자기가 깊게 파고들어 가보지 않으면 강의만 들어서는 소용 없고. 모든 게 다 그렇지만. 근데 종석아. 너는 지금 회사 일을 잘 하는 거, 뿐만 아니라 이 회사가 어떻게 굴러가고, 누구랑 손잡고, 파트너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잘 관찰해.”
“그게 강의보다 더 도움이 될까요?”
“도움이 되냐고? 지금 나랑 장난해? 경영학에서 케이스스터디를 그렇게 많이 하는 건, 비슷한 상황에서 경영자가 더 좋은 판단을 하기 위해서야. 근데 이제 시작하는 인터넷 게임에서 뭐 케이스스터디 사례가 제대로 있기나 한가? 아마 하버드 MBA 교수가 네 얘기를 듣고 싶어 할 걸?”
“그런가요?”
“기분 나쁠 수도 있지만 솔직하게 말할게. 넌 진짜 씨발 졸라게 행운아야. 황제국 대표님 옆에서 동아리부터 시작한 너는 전 세계 0.001%에게만 허락된 최고의 행운을 누리고 있다고. 그러니까 포커 테이블에서 아무 생각 없이 패나 돌릴 생각하지 말고, 테이블 전체를 봐. 게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봐. 물론 계속 패만 돌려도 여기 있는 한 넌 성공하겠지만.”
하워드의 말을 듣고 오종석은 뉴퀘스트에서 일한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오종석도 자신이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운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는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하기에도 벅찼다.
이제 뉴퀘스트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고, 하워드처럼 다른 분야에서 실력좋고 경험 있는 사람들이 속속 합류했다. 이제 그의 직속 상사가 된 하워드는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는 것은 물론, 미래에 관해 항상 3개 이상의 시나리오를 만들어 두었다.
“대표님은 게임 만드는 건 본질적으로 카오스라서 예측도 불가능하고, 할 필요도 없다고 하지. 근데 그러면서 게임을 착착 만드는 귀신같은 솜씨는 그냥 천재라고밖에 볼 수가 없어. 근데 난 그런 감각은 없거든.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보는 거야. 적어도 세 개는 있어야지. 잘 될 때, 나쁘지 않을 때, 망했을 때.”
“망하는데도 시나리오가 필요한가요?”
“당연하지. 이게 제일 중요한데. 어떻게 해야 프로젝트가 망해도 버티면서 다음을 도모할 수 있을까 미리 선을 그어놔야지. 팔 수 있는 자산은 뭐고, 지켜야 하는 자산은 뭔지. 어느 단계에 가면 구조조정에 들어가야 하는지. 추가 투자를 받는다면 얼마나 받아야 하는지.”
“그런 걸 평소에 미리 다 생각을 하신다구요?”
“닥치고 생각하면 늦으니까. 물론 현실은 시나리오와 항상 달라. 그래도 미리 윤곽을 그려보는 거랑 아닌 거랑은 전혀 달라. 게임 개발이 카오스라고? 그럼 나는 카오스의 비즈니스 모델링을 해야 하는 거야.”
“만약, 정말 만약 <젤리 러쉬>가 망해서 회사가 구조조정에 들어가야 한다면 저는 어떻게 되나요? 본부장님 시나리오 속에 저는 들어있나요?”
“내 시나리오가 궁금한 게 아니라, 고작 그게 궁금한 거라면 글쎄······? 아마도 없을 확률이 높겠지?”
하워드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오종석은 그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잘 해왔지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대표님에게 모든 걸 맡기고 그냥 뒤통수 보고 따라가는 거라면 그게 가장 뉴퀘스트에 어울리지 않는 방식 아닌가?”
“그렇죠. 분명 그래요.”
그리고 하워드는 영국으로 출장을 떠났다. 그사이 오종석은 자기가 했던 일을 다시 점검해 보기 시작했다. 이메일을 뒤적이며 뭘 잘했고,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 어디를 프로세스화 할 수 있었는지, 그 일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뉴퀘스트 오종석만의 케이스스터디를 만들어 보았다.
“뭐해?”
황제국이 창업 지원 센터 오피스에 혼자 남아있는 오종석을 찾아와 물었다. 오종석은 대충 둘러댈까 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팀 옮기면서 솔직히 내가 조금, 회사에서 쩌리가 된 거 아닌가. 중심에서 밀려났나? 이런 생각이 없잖아 있었거든.”
황제국은 오종석의 이야기를 말없이 들었다. 회사의 대표이자 경영자로서 직원과의 면담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종석은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중이었다.
“멸망 시나리오라. 재밌네. 하워드는 잠시도 쉬지 않고 뭔가 하더라니. 혼자 그런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구나.”
“너도 몰랐던 거야?”
“대충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언테테인먼트, 비디오 게임 비즈니스가 워낙 불안하잖아. 예전에 그 잘나가던 아타리가 한순간에 무너졌던 아타리 쇼크도 있었고. 요즘 IT 기업들 줄줄이 무너지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 하워드는 유료 아이템이 꼭 필요하다고 여전히 믿고 있지.”
“어, 그렇지.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 같은 줄 안다니까.”
“올~, 상사가 출장 갔다고 바로 뒷담화 까는 거야?”
“어? 그렇게 되나?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네.”
뉴퀘스트가 미국 시장에 진출한 이후로 두 사람은 친구로 지낼 시간이 별로 없었다. 오종석은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심 아쉬웠다.
“본부장님이 그러더라. 내가 회사가 흔들리는데 내 자리만 생각하고 있다면, 아마 그 이유 때문에 내 자리가 없어질 거라고. 처음 깨달았어. 이 회사에 내 자리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바보같이.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도 자기가 만든 회사에서 쫓겨나는 세상인데.”
오종석은 스티브 잡스를 얘기하며 피식 웃었다. 그가 생각해도 너무 높은 사람과 비교한 것 같았다.
“걱정 마라. 멸망 시나리오가 도래하는 일 따위는 없게 할 테니까. <젤리 러쉬>는 우릴 다음 단계로 점프하게 만들어 줄 거야. 날 믿어.”
“믿지. 세상 누구보다 널 믿지. 근데 그렇게 성장한 회사에 내가 어울릴까는 또 다른 문제라는 걸 요즘 깨닫고 있어.”
“넌 누구보다 잘하고 있어. 그런 걱정하지 마.”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지. 근데 제국아. 마아아아아안약에 내가 회사의 성장을 못 쫓아가서 여길 떠나더라도 우린 친구지?”
“그럴 일 없어.”
“만약에 있다면.”
“설령 그렇다고 해도 넌 당연히 내 친구지. 그건 오히려 내가 부탁해야 하는 거 아냐? 정말 혹시라도 회사를 떠나더라도 날 원망하지 말라고?”
“그럴 일 없어.”
“만약에 있다면.”
“아, 기껏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는데.”
오종석이 화를 내려다가 피식 웃었다. 황제국이 말했다.
“우린 그런 건 생각하지 말자. 멸망 시나리오 같은 건 하워드 혼자 고민하게 맡겨 두자고.”
“그래, 그게 낫겠다. 우린 대박, 아니 초대박 시나리오를 생각하자!”
“나가자. 나가서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해.”
두 사람은 잠시 회사 일을 잊고 학교 앞 작은 술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황제국이 미국 특급 호텔에서 먹던 음식에 비하면 몹시 소박했다. 하지만 황제국은 L.A.에서 마시던 최고급 와인보다 지금 오종석과 마시는 소주 한 잔이 더 맛있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