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회 - 뷔페식 스토리
전유진의 미간은 마치 이진수의 입술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도 이진수의 입술처럼 감정이 복잡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미간은 너무나 투명하게 ‘꼭 그래야만 할까?’라고 황제국에게 묻고 있었다.
“MMORPG라는 게 우리가 지금까지 만들었던 게임보다 규모가 크다는 건 알아. 나도 게임 회사가 몇 년인데. 그건 인정. 근데 회장님도 알지? 나 글 진짜 빨리 쓰는 거?”
“알죠. 아직도 누나가 나한테 그동안 쓴 소설이라며 종이 뭉치를 안겨주던 게 생각나는데요. 저 그때 종이에 깔려 죽는 줄 알았잖아요.”
황제국이 책상 위에 무거운 종이 뭉치를 내려놓는 시늉을 하며 입으로 쿵! 소리를 내자 전유진이 큰 소리로 웃었다.
“뭐야~. 깔려 죽기는 무슨. 과장 좀 하지 마. 하여튼 웃겨, 회장님도.”
“그만큼 잘 알고 있다는 거죠. 하지만 MMORPG는 누나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에요.”
“그래? 그 정도야? 근데 스토리를 팀으로 쓰는 게 과연 가능할까? 그 부분에서 난 마음이 걸려.”
황제국에 농담으로 분위기를 바꾼 덕분에 전유진도 방어적인 자세를 풀고 한결 부드럽게 물었다.
“선배님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아요. 그런데 크게 오해하는 부분이 있어요.”
“내가? 어떤 점에서?”
“우선 첫 번째. 선배님은 지금 MMORPG의 스토리를 일반적인 소설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시간 순서대로 주인공이 어떤 사건을 만나 시련을 겪고 그걸 이겨내는 선형적 구조로요.”
“응, 그렇지. 그게 모든 ‘이야기’의 기본이잖아. RPG나 MMORPG라고 해서 이야기의 근본이 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전유진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황제국이 회사의 대표고, 새로운 MMORPG 프로젝트의 총괄 디렉터지만 세계관과 시나리오를 쓸 사람은 전유진이었다. <영건 블러드> 본편과 확장판의 모든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스핀오프 소설까지 출간한 전유진은 글에 있어서는 뉴퀘스트 최고의 전문가였다. 하지만 MMORPG에 관해 그녀가 아직 모르는 부분이 있었다.
“물론 일반적인 이야기의 형태라면 선배님 말이 맞아요. 시간 순서대로 발단 - 전개 - 결말의 구조로 간다면요. 하지만 MMORPG는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그렇게 스토리를 쓸 수는 있어요. 하지만 MMORPG를 하는 게이머는 <영건 블러드>처럼 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아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준비한 스토리를 전혀 플레이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게임을 하는데 스토리를 안 하고 넘긴다고? 그게 가능해?”
“음,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요? 이걸 한 번 보세요.”
황제국은 잠시 고민하다가 선반에서 체스판을 꺼냈다. 그는 상자에서 종류별로 여섯 개의 체스 말을 꺼냈다. 그리고 순서대로 일렬로 늘어놓았다.
“자, 이건 일반적인 스토리 구성이에요. 여섯 개의 체스 말은 각각 하나의 에피소드예요. 주인공은 폰(Pawn)에서 시작해서 킹(King)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사건을 겪고 점차 성장하죠. 그리고 마침내 최고의 시련인 킹을 이겨내고 승리해서 성취를 이룩해요. 전형적인 선형적인 내러티브 구성이죠.”
황제국은 폰에서 킹까지 손가락으로 이어 선을 그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킹을 딸깍 소리가 나도록 넘어뜨렸다. 전유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다음은 MMORPG의 스토리 형식이에요. 이건 아주 뒤죽박죽이죠.”
황제국은 상자에서 체스 말을 더 꺼냈다. 그리고 폰과 킹 사이에 체스 말들을 마구 뒤섞어 세워 놓았다. 시작인 폰과 끝인 킹 사이에는 체스 말들이 무작위로 서 있었다. 전유진은 다시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이게 뭐야? 이게 게임 스토리라고?”
“맞아요. 아까와는 다른 비선형적인 내러티브 구성이죠. 각각의 체스 말은 사실 전부 연결되어 있어요.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져 있어요. 폰이 시작 지점이고, 킹이 최종 보스라는 건 똑같아요.”
황제국은 체스 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아까는 체스 말이 하나의 에피소드라고 했었죠? 여기서는 체스 말이 각각 독립적인 퀘스트라고 생각하세요. 처음엔 폰에서 시작해요. 그런데 MMORPG는 아까처럼 직선으로 따라가는 게 아니에요. 킹까지 최단 거리인 비숍(Bishop)과 나이트(Knight)만 거쳐서 곧장 킹으로 갈 수도 있지만,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퀘스트를 샅샅이 훑으면서 킹까지 갈 수도 있어요. 퀘스트를 진행하는 순서는 게이머의 자유라서 우리가 강제할 수 없어요.”
“그런데도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스토리 순서가 뒤죽박죽되는데? 그러면 다 연결되어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거 아니야? 무슨 스토리가 그래?”
전유진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런 의문이 드는 게 당연해요. 하지만 퀘스트가 독립적이라고 해서 서로 상관없는 건 아니에요. 사실 여기서 몇 개의 퀘스트는 서로 묶여서 하나의 에피소드를 이루기도 해요. 퀘스트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 덩어리를 구성하는 거죠. MMORPG는 수많은 이야기 군집과 독립적인 자잘한 퀘스트들의 집합체에요. 이야기 측면에서 보자면 끝없이 새로운 스토리가 나오는 뷔페라고 할까요?”
“이야기의 뷔페? 비유가 재밌네?”
“뷔페에 가면 음식이 아주 다양한데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지는 않아요. 한식, 양식, 중식, 일식, 해산물, 튀김 등등 비슷한 종류별로 섹션을 구성하고 있죠. 하지만 먹는 사람이 차려진 걸 순서대로 먹지는 않아요.”
“그치. 일단 한번 쓱 보고 입맛대로 골라서 먹지. MMORPG에서 ‘퀘스트’로 구성되는 스토리가 바로 그렇다는 뜻이구나. 뷔페로 설명하니까 조금 알겠다.”
“맞아요. 우리는 최고의 맛을 제공하려고 각종 퀘스트를 준비해서 착착착 내놓지만 게이머는 그걸 다 즐기지 않아요. 한두 개 맛만 보고 가는 사람도 있고, 한 섹션만 집중적으로, 반복적으로 파고드는 사람도 있어요. 반면에 우리가 만든 음식은 맛도 보지 않고 혼자 노는 사람도 있어요.”
“그게 정말 가능해? 뷔페에 와서 차려놓은 음식을 안 먹으면 뭐 해?”
“MMORPG의 세계는 엄청나게 넓어요. 퀘스트를 깨고 보상을 얻어 강해지고 최종 보스를 잡는 게 전부가 아니에요. 하기 싫으면 최종 보스조차 깨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퀘스트 생략해서 각종 자원을 캐서 팔거나, 제작 스킬로 무언가를 만들 수도 있고, 다른 게이머들과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놀 수도 있고, 그냥 아무 목적 없이 게임 속을 탐험할 수도 있어요. 혹은 남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사람도 있죠.”
“에엑? 정말?”
“그럼요. PvP(Player vs. Player, 온라인 게임에서 플레이어끼리 싸우는 것)라고 해서 플레이어 간의 전투는 아주 중요한 요소예요. 이걸 넣느냐 빼느냐에 따라서 MMORPG는 성격이 아주 달라져요.”
“아, 뭔가 혼란스럽다. 내가 열심히 만든 이야기를 사람들이 하나도 즐기지 않을 수도 있다니.”
전유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소설, 그것도 종이책으로 순서대로 따라가는 이야기 구조에 익숙한 전유진은 MMORPG의 구성 방식이 낯설었다. 본질적으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지만, 하나도 플레이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구성 방식이 모순으로만 생각됐다.
“그런데 그런 방식이면 게이머가 우리가 준비한 스토리나 세계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나? 그렇게 메뚜기처럼 띄엄띄엄 플레이하는데?”
“그래서 MMORPG는 스토리를 어떤 식으로 배치하고 구성할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해요. 완전히 비선형적인 구성으로 갈 것인가, 최대한 선형적으로 이야기를 즐길 수 있도록 어느 정도 강제할 것인가를 정해야 해요. 독립적인 퀘스트라도 게이머가 큰 주제 아래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느껴야 하구요.”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네. 그냥 사건을 연결해서 쭉 쓰는 방식으로는 어림도 없겠구나.”
“비선형적 구성으로 극한까지 가면 오픈 월드라고 해서 게임에서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만들어요. 게이머에게 게임으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자유를 주는 거예요.”
“근데 그러면 재밌어? 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오히려 혼란스러울 거 같은데?”
“사실 오픈 월드 게임은 재밌게 만들기 정말 어려워요. 흥행한 게임도 별로 없구요. 아무래도 주어진 이야기를 따라가는 방식이 편하고 익숙하긴 하죠. 하지만 분명한 건 MMORPG는 선형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없어요. 특정 구간은 몰라도 전부를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우리는 오픈 월드와 선형적 내러티브 중간 어디쯤에서 절묘하게 발란스를 맞춰야 해요.”
“와, 말만 들어도 어렵다.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혼자서는 못하죠. 이건 캐릭터 잘 만들고, 스토리 잘 쓴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전반적인 게임의 시스템을 이해하고 있어야 해요. 그런데 선배님은 아무래도 게임 경험치가 떨어지니까요.”
“우리 회장님, 말 참 예쁘게 한다 증말. 근데 내가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네.”
전유진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녀는 이미 몇 년이나 황제국을 겪으며 장점은 명확하게, 단점은 더욱 명확하게 피드백하는 황제국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이 어려운 미션을 수행할 기회를 주겠다. 하지만 MMORPG 시스템을 잘 이해하는 다른 스토리 작가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 말이지?”
“맞아요. 그리고 팀을 구성해야만 하는 다른 이유가 있어요.”
“또 있어? 이번에는 또 뭔데?”
전유진이 반쯤 포기한 듯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황제국은 체스 말을 그러모아 상자에 담으며 말했다.
“MMORPG는 눈에 보이는 스토리가 전부가 아니에요. 사실 스토리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인 세계관 구성이 필수예요.”
“응, 그건 나도 알아. 대륙이나 종족 같은 판타지 세계의 필수적인 설정 말하는 거지?”
“비슷해요. 우리가 <영건 블러드>를 만들 때 ‘스팀펑크 만주’라는 세계관을 먼저 세우고, 그 위에 인물과 사건을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MMORPG는 <영건 블러드>보다 세계관이 훨씬 크고, 복잡해요.”
“그럴 수밖에 없겠지. 거대한 월드와 수많은 퀘스트들이 전부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거니까. 자칫하면 여기서 벌어지는 일과 저기서 벌어지는 일이 서로 모순되거나 충돌할 수도 있고.”
“우리가 기획하는 MMORPG는 기본적으로 원시 신앙인 토테미즘(Totemism, 야생 동물이나 식물 등을 신성시하여 형성되는 신앙이나 사회 체제)에 기반하고 있어요. 각 부족은 토템으로 숭배하는 동물이 있고, 그 신앙심이 힘의 원천이 되죠. 그럼 토템으로 어떤 동물을 세울 것인가, 토템을 통해 전사는 어떻게 성장할까, 토템 종족들의 역사와 관계는 어떻게 될까 등 이 세계의 역사와 근간을 구성해야 해요. 그게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이니까요.”
“나는 샤머니즘(Shamanism, 신적인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교류하는 무당 등의 샤먼을 중심으로 한 신앙 체계) 요소를 더하면 좋을 거 같아. 부족마다 주술사가 있어서 부족의 토템 전사들에게 축복을 내려주면 더 강해지는 거야. 왜 고대에는 정치보다 종교 지도자가 더 힘이 강했잖아?”
“좋네요. 그런 식으로 세계관을 만들어 나가야 해요. 주술사는 축복을 내릴 수도 있지만, 저주를 내릴 수도 있겠죠. 그들은 아사달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부족마다 사회를 구성하고 지배하는 구조가 조금씩 다를 거예요. 늑대 토템과 소 토템은 전투 방식뿐만 아니라 사고방식도 달라야 해요. <반지의 제왕>에서 엘프와 호빗이 서로 다르듯이요.”
“맞아 맞아. 시작할 때 토템 부족 중에 하나를 고르겠지? 분명 나중에 다른 부족도 해볼 텐데 부족마다 분위기랑 느낌이 달라야 계속 게임을 하겠지.”
“그렇게 층층이 수많은 설정의 토대를 쌓아야 해요. 그렇게 세계관이 단단해질수록 할 수 있는 이야기도 풍성해지고, 드넓은 월드도 만들 수 있죠. 세계관이 빈약하면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대충 익숙한 내용을 살짝 바꿔서 급하게 만들어야 해요. 오픈 후에는 계속 업데이트가 이어지니까 게임은 갈수록 누더기가 되고, 나중에는 게임의 시초가 뭐였는지 알아볼 수도 없는 지경이 돼 버려요.”
“회장님 꼭 벌써 한 번 해본 사람처럼 말을 하네?”
“그냥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에요.”
황제국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티나지 않게 얼른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렇게 쌓아 올린 세계관에서 나름대로 균형을 맞추고 이어져 오던 아사달에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서 굳건하던 세계에 균열이 생겨요. 갑자기 외부에서 악마나 몬스터 같은 악의 존재가 나타나거나, 아니면 내부에서 누군가 오랜 규칙을 뿌리째 뒤흔들 수도 있죠. 그 균열의 지점이 우리 게임의 시작점이 될 거예요. 주인공은 균열로 인해 예정된 파멸을 멈추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운명을 타고난 존재구요.”
황제국이 체스 말 중 폰을 흔들면서 말했다. 전유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후좌우 없는 비선형적인 스토리 구성도 골치 아픈데,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이 뒤섞인 독특한 동양 판타지 세계관 구성까지 해야 하니 도저히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이거지?”
“이제 제가 왜 혼자서는 안 된다고 하는지 이해하시겠죠? 정말 이 모든 걸 혼자 다 할 수 있다면 저도 굳이 말리지 않을게요.”
“됐네요. 그걸 무슨 수로 혼자 다 해? 그랬다간 내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이 게임만 붙들고 있겠어. 알았어. 회장님 말대로 할게. 대신 좋은 사람으로 구해줘야 해. 알았지?”
“그럼요. 저희가 채용에 얼마나 신경 쓰는지 잘 아시잖아요? 요즘은 신우 차장님이 저보다 더 까다로워요.”
전유진은 황제국의 제안을 수락했다. 황제국은 전유진을 중심으로 MMORPG 세계관 및 시나리오팀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독특하고 깊이 있는 세계관에 풍부한 콘텐츠를 갖춘 최고의 MMORPG를 만들고 싶었다. 그를 위해서 기획 초기부터 세계관과 시나리오에 아낌없이 투자할 생각이었다. 분명 쉽지 않은 도전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도전할 가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