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 비주얼 담당(1)
여자는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 황제국을 보고 당황했다.
“야, 오종종! 손님이 있으면 있다고 얘기를 했어야지. 나만 갑자기 미친년 됐잖아?”
“지가 그냥 벌컥 들어와 놓고는 무슨. 그리고 첨보는 사이도 아닌데 뭔 야단이야?”
“응? 본 적 있다고? 가만? 그러고 보니······?”
“나 황제국. 종석이한테 방송반 때문에 몇 번 찾아왔을 때 봤던 거 같은데?”
황제국이 손을 들어 먼저 인사했다. 98년으로 돌아와 오종석 외에 다른 친구를 만나는 게 처음이었다.
“아~~~, 맞네 맞네. 이제 기억난다. 교복이 아니라서 잠깐 착각. 내 이름은 알지? 현주야. 차현주.”
“쯧쯧, 사람 얼굴도 저렇게 못 알아 보면서 무슨 그림을 그린다고.”
“야! 한국 입시 미술이 눈으로 보고 그릴 수 있을 만큼 그렇게 호락호락할 거 같아? 수백 번 그리면서 석고상의 근육, 힘줄, 핏줄 하나하나까지 싹 외워서 그리는 거야.”
“오~, 니 머리로 그걸 다 외운다고? 입시용 석고상이 하나 밖에 없나 보지?”
“뒤질래?”
“아! 야, 아파! 진짜 아파!”
차현주가 오종석에게 주먹질을 하자 오종석이 엄살을 부렸다. 황제국이 그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래서 어디 합격한 거야?”
“어, 맞네? 아까 들어오면서 합격했다고 했지? 그럼 너도 S대 입학 한 거야?”
“응, 서양화과!”
“오오오오오~!!!!!”
차현주가 손으로 V자를 그리며 웃었다. 물론 황제국은 차현주가 자기와 같은 S대에 붙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가끔 오종석과 함께 만났고, 그녀의 졸업전시회에도 갔었다.
이후 그녀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주목받는 신인으로 가끔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하지만 끝내 화가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황제국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듣기로 미술계 역시 작품만큼이나 화제성이 중요하고, 갤러리와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했다. 갤러리에서 얼마나 밀어주느냐가 작가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치 게임 회사가 좋은 퍼블리셔를 만나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하지만 차현주는 종종 갤러리와 마찰을 빚었고 전시회도 점점 뜸해졌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소식을 듣지 못했다.
황제국은 이렇게 연락이 끊겼던 옛친구를 다시 보니 기분이 묘했다. 고3 시절의 차현주는 그의 기억보다 훨씬 앳되고 귀여웠다. 황제국은 그녀의 대학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아저씨 둘이서 뭐 하고 있었어? 설마 대낮부터 야한 사진 보고 있었던 거야?”
“야이씨, 그런 거는 중학생 때 다 졸업했거든?”
차현주의 질문에 오종석이 발끈했다. 황제국이 말했다.
“우리 요즘 게임 만들고 있어.”
“게임? 오락실에서 하는 거 말이야?”
“아니. 컴퓨터로 하는 거야.”
“컴퓨터 게임? 그걸 만들 수 있다고? 너희가?”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종석이는 어제부터 날 도와주고 있고.”
옆에서 오종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현주가 두 사람을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쳐다봤다. 황제국은 어쩌면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가 차현주에게 슬쩍 물었다.
“한번 볼래?”
“야, 쟤 보여주려고?”
오종석이 화들짝 놀랐다. 그러자 차현주가 오종석을 째려봤다.
“왜? 난 안 돼?”
“아니, 벌써 외부인한테 보여주기는 쫌 이르지 않나··· 싶어서. 그래픽도 미완성이고.”
“괜찮을 거야. 자, 이리 와서 앉아.”
황제국이 컴퓨터 앞 의자를 차현주에게 내줬다. 그리고 <삼국지:공성전>의 알파테스트 빌드를 실행시켰다. 그리고 오종석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일러주었다.
“이건 프로토타입이라고 초기 버전이야. 아직 변변한 그래픽도 없어. 이미지는 네가 상상하면서 해야 해. 미대생이니까 그 정도는 문제없지?”
“아유~, 당연하지.”
차현주는 ‘미대생’이라는 말에 입꼬리를 올리며 금방 반응했다. 그런데 디펜스 게임은 아니어도 다른 컴퓨터 게임을 많이 해 본 오종석과 달리 차현주는 처음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할 수 없이 황제국이 먼저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었다.
“잘 봐. 지금 조조가 쳐들어오는 상황이야. 우리는 놈들이 오는 길목에 병력을 배치해서 막아야 해. 이렇게 마우스로 여기를 클릭해서 이렇게.”
황제국이 차현주가 잡은 마우스 위에 손을 얹고 게임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스테이지 1을 클리어하자 차현주도 감을 잡은 듯 직접 게임을 조종했다. 오종석처럼 기본적인 전략을 짜거나, 컨트롤을 하지는 못했지만 어떻게 어떻게 스테이지를 클리어했다.
“와, 이거 재밌다! 조작도 별로 어렵지 않고. 허수아비들도 귀여워!”
“응?”
“병사들이 꼭 어릴 때 만든 수수깡 인형 같지 않아?”
황제국은 그녀의 반응에 어리둥절했지만, 컴퓨터 게임을 처음 하는 차현주도 좋아하자 게임에 더 강한 확신이 들었다. 화면이 바뀌어 공성전이 시작하자 차현주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니아니, 거기 말고. 여기여기! 야, 거기서 죽으면 안 돼! 막아! 막아!”
“야야, 진정해! 키보드 부서져!”
성벽이 조조군으로 뒤덮이자 차현주는 패닉에 빠져 마우스를 마구 클릭하고, 스페이스 바를 마구 두드렸다. 갑자기 입력이 늘어나자 컴퓨터가 삑-! 소리를 내며 멈췄다. 오종석이 화들짝 놀라서 컴퓨터로 달려갔다.
“야! 이거 산 지 2주일도 안 된 건데! 작작 좀 하라니깐!”
“뭘! 뭘! 내가 안 그랬어!”
오종석은 씩씩거리고, 차현주도 당황해서 뻔히 보이는 발뺌을 했다. 황제국은 머릿속으로 너무 많은 입력이 들어와도 게임이 멈추지 않도록 코드를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오종석은 모든 컴퓨터의 만병통치약, 재부팅을 시행했다. 컴퓨터가 문제없이 다시 부팅에 성공하자 그제야 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야, 잘 되네. 자기가 꼬진 컴퓨터 사 놓고는.”
“야, 이거 내가 제국이랑 용산을 완전 샅샅이 뒤져서 최고로 맞춘 거거든? 알지도 못하면서.”
차현주는 괜히 미안하면서 컴퓨터 탓을 했다. 황제국은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웃었다.
어린 시절의 그였다면 아마 오종석과 같이 벙쪄서 그녀에게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도 그저 잘 몰라서 그랬을 뿐이고, 미안하지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보였다.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황제국이 차현주에게 물었다.
“어땠어? 게임은?”
“응? 어, 재밌어. 나 이런 거 처음 해보는데 별로 어렵지도 않고. 이게 뭐라고 막 가슴 쫄리고 그러네? 이거 진짜 너가 만든 거야?”
황제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현주가 새삼 감탄했다.
“진짜 대단하다. 난 컴퓨터는 잘 모르는데. 이런 걸 막 쉽게 만들 수 있는 거야? 아직 대학도 안 갔는데.”
“너도 아직 대학도 안 갔는데 그림 진짜 잘 그리잖아.”
“야, 제국이 니가 쟤 그림을 언제 봤다고.”
“봤는데? 너희 방송부에서 포스터 걸면 거의 다 현주가 그리잖아. 복도에서 많이 봤어.”
“아, 그거 봤어? 에이, 그거 그냥 쉬는 시간에 대충 그린 거야. 오종종이 하도 귀찮게 굴면서 그려달라고 하니까.”
“와! 와!”
오종석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하지만 차현주가 째려보자 오종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지는 어때? 게임을 하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습이 있었어?”
“음, 그렇지? 보기에는 밋밋하긴 한데 그게 또 약간 빈 스케치북 같다고 할까? 난 <삼국지>는 잘 몰라도 그림이나 사극에서 본 이미지가 있으니까. 대충 비슷하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지.”
“그럼 혹시 한 번 그려볼 수 있어?”
“지금?”
“응.”
“여기서?”
“응.”
“음···, 동양화 쪽은 내 전문이 아닌데.”
“왜? 못하겠냐? 어렵지?”
오종석이 빈정거리며 끼어들자 차현주가 발끈했다.
“야, 누가 못한데? 그냥 동양화풍은 해본 적이 없다 이거지.”
“괜찮아. 그냥 생각나는 데로 그려봐. 그냥 한번 보고 싶어서 그래. 너도 내가 만든 게임 했으니까 나도 네 그림 한 번 볼 수 있잖아?”
“에이, 그래! 실기 끝나고 연필 처음 잡아보겠네. 야, 오종종. 방에 종이랑 연필은 있지?”
차현주가 조금 고민하다가 결국 오종석의 노트를 펼치고 샤프펜슬을 잡았다.
“보자, 음······. 게임을 하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라면······.”
차현주가 잠깐 고민하더니 노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먼저 길을 따라 선을 그린 다음, 비어있는 공간에 풀과 나무, 바위 등 자연물을 쓱쓱 그려 넣었다.
그리고 그녀는 길 위에서 싸우는 병사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칼을 맞대고 싸우는 보병, 뒤에서 창을 찌르고 던지는 창병, 멀리서 활을 당기는 궁수들의 동작과 표정에서 생생한 감정이 느껴졌다.
어느새 방에는 종이 위에 샤프펜슬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차현주도 그리다 보니 집중했고, 황제국과 오종석도 말없이 그림이 완성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 간만에 집중했네. 됐지?”
차현주가 샤프를 내려놓으면서 손을 털었다. 오종석이 그림을 보며 감탄했다.
“와, 차현주. 성격은 더러워도 역시 그림은 진짜란 말야.”
“성격 더러운 누나한테 죽을래?”
그림을 다 그리자마자 두 사람은 또 투닥거렸다. 그러다 차현주는 친구들과 술 마시러 가기로 했다면서 부리나케 나가버렸다.
“하여튼 정신없는 기지배. 나중에 누구랑 결혼할지, 남편이 벌써 걱정된다. 걱정돼.”
오종석이 혀를 끌끌 차는데, 황제국이 말했다.
“종석아, 결정했다.”
“뭘?”
“<삼국지:공성전> 비주얼 아티스트.”
“뭐? 누구로? 너? 설마?”
오종석이 차현주가 나간 방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황제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딱이야.”
“왜? 이유가 뭔데?”
“첫째, 게임을 모르지만 우리 게임을 해보고 금방 이해했어.”
“그거야 우리가, 아니 너가 게임을 잘 만들어서 그런 거지.”
“둘째, 허수아비 게임 그래픽만 보고도 전장의 이미지를 아주 생동감 있게 그려냈어.”
“그거야, 미대 갈 애잖아. 당연하지.”
“아니. 당연하지 않아. 아무런 레퍼런스도 없는데, 즉석에서 머릿속 이미지만으로 게임이랑 잘 어울리는 그림을 척척 그려내는 사람은 별로 없어.”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거야?”
“물론이지. 게임에서 비주얼 아트를 담당하려면 눈에 보이는 걸 똑같이 따라 그리는 기술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러면?”
“게임 컨셉에 맞춰서 적절한 분위기를 내는 멋지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거. 그냥 그림을 잘 그리는 거랑은 달라. 자기만의 창의력이 있어야지. 앞으로 컴퓨터가 더 발전하면 이미지 리터치 기술도 훨씬 발전해서 사실 기술은 크게 문제가 안 돼.”
오종석은 조금씩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건 게임 컨셉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이미지를 제시하고, 창조할 수 있느냐 이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리고, 넌 현주한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보는 거야?”
“응. 적어도 가능성은 충분해.”
“흐음······.”
“봐봐, 이 그림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바꾸고, 색을 입혀서 게임 도입부에 넣으면 어떨까? 타이틀 이미지로 딱이잖아?”
오종석은 황제국의 말에 차현주가 그린 그림을 펼쳐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솔직히 현주 쟤가 게임 관련 그림을 그린다는 게 잘 상상이 안 되는 긴 하는데. 리더는 너니까. 네가 마음에 들면 그렇게 해야지. 그럼 쟤를 어떻게 영입할 건데? 미리 경고하는데 쟤 성격 있다.”
“그게 중요한데.”
황제국이 오종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너 현주랑 친하지? 잘 부탁한다.”
“어? 야?! 잠깐만! 나보고 쟬 설득하라고?”
“응, 니 손에 <삼국지:공성전>의 그래픽 퀄리티가 달렸어! 파이팅!”
“파...파이팅!”
황제국이 오종석을 보며 힘차게 외쳤다. 오종석은 울며 겨자 먹기로 같이 주먹을 쥐며 파이팅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