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회 - 와인과 샴페인
미국에서 <영건 블러드>를 발매하던 날, 전용선은 서버팀, 그리고 앤소니와 함께 팔로 알토 사무실에서 대기했다. 그들은 새벽까지 데모 서버 머신 일부를 정식판 서버 머신으로 돌리고, 테스트를 진행했다. 온라인 데모 때 다행히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정식 발매의 긴장감은 데모와는 차원이 달랐다.
보통 팔로 알토 사무실은 오전 10시는 돼야 업무를 시작한다. 느지막이 일어나 세수만 하고, 주방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사람이 만든 커피를 마시며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하곤 했다.
이날 아침은 달랐다. 알람도 울리지 않았는데 모두 일찍 눈을 떴다. 보통 방마다 알람을 켜고, 끄고, 켜고, 끄고를 서너 번은 반복한다. 그런데 새벽까지 작업했는데도 전용선은 물론 다른 멤버들도 모두 아침 일찍 일어나 주방에서 멍한 눈으로 앉아 있었다.
“커피?”
박선호가 묻자 전용선과 타쿠르, 앤소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선호는 일어나 커피 메이커에 원두를 넣는 게 아니라 모자를 쓰더니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그는 곧 아메리카노 네 잔과 도넛, 샌드위치를 사 들고 다시 나타났다.
“하아······.”
갓 내린 커피의 향이 코로 들어가 감각을 깨우고, 카페인이 뇌에 알람을 울렸다. 네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대망의 런칭 데이를 준비했다. 그들은 깨끗하게 샤워하고 면도를 끝낸 후, 머리를 만지고 오랜만에 셔츠를 꺼내 입었다. 미팅이 없으면 언제나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들 나름대로 격식을 차렸다.
“그래, 제국아. 어, 매장 오픈했다고? 응, 알았어. 우리도 아까 준비 끝났어. 한 시간마다 문자 보내 줄게.”
아침 10시가 되자 황제국이 전화로 발매 시작을 알렸다. 전용선은 한 시간마다 퀘스트넷 동접자 상황을 문자로 보내기로 했다.
미국 서부의 대형 마트와 전자 상가, 로컬 게임샵들이 오픈할 시간이었다. 실시간 모니터에 그래프가 굼벵이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한 시간 후, 캘리포니아가 속한 태평양 시간대 기준 오전 11시에는 약 600명 정도의 접속자가 있었다. 대부분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영건 블러드> 체험 부스에서의 접속이었다.
수만 명 이상 접속할 수 있는 서버에 겨우 수백 명 접속한 상황. 전용선은 마치 초대형 공연장을 오픈했는데, 정작 좌석은 텅텅 빈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고작 서버 오픈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릴랙스~, 릴랙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는 게이머가 세상에 어딨어? 안 그래?”
“그럼요. 오후는 돼봐야 알 수 있죠.”
전용선이 급해지는 마음을 누르려고 애썼다. 점심은 알토스 피자였다. 피터가 피자 세 판을 들고 나타났다.
“응? 왜 세 판이야? 우리 두 판 시켰는데?”
“한 판은 내가 사는 거야. <영건 블러드> 런칭 축하해, 친구들!”
“오~, 고마워!”
피터는 팔로 알토 멤버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런칭의 기쁨을 함께했다. 그는 랜 파티는 물론 게임 테스트에도 참여할 만큼 뉴퀘스트와 인연이 각별했다.
“상황은 좀 어때?”
“아직 몰라. 이제 막 오픈해서. 동접자는 아직 2K(2천) 언더야.”
피터의 질문에 박선호가 무릎 아래로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피터가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그래서 다들 이렇게 심각한 거야? 지금 몇 신데? 걱정 마. 이제 점심시간이니까 사람들 슬슬 나오기 시작할 거야. 자, 그리고 이거.”
피터가 백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직 비닐도 뜯지 않은 <영건 블러드> 패키지였다.
“뭐야, 피터? 벌써 산 거야? 나오면 너랑 알토스 피자 사장님한테는 하나씩 주려고 했는데.”
“노노노! 그럴 수는 없지. 자, 뭐해? 한 명씩 사인해.”
피터가 비닐을 벗기고 패키지를 열었다. 게임 CD 두 장과 OST, 매뉴얼과 일러스트집, 포스터까지 꽉 찬 구성이었다. 피터가 포스터를 내밀자 멤버들이 돌아가며 사인을 했다.
“영 보스는?”
“L.A.에. 오픈 날이라서 게임샵 둘러보러 갔어.”
“아하! 그럼 나중에 다시 들러야겠네. 그럼 다들 수고하고. <영건 블러드>는 진짜 최고의 게임이야! 난 너희들이 자랑스러워!”
포스터를 잘 접어서 다시 챙긴 피터가 엄지를 치켜들고는 떠났다. 피터 덕분에 침울하던 사무실 분위기가 조금 나아졌다. 그래도 전용선은 피자를 먹으면서 시선은 계속 모니터링 모니터에 가 있었다.
뉴퀘스트는 정식 게임을 발매했지만 온라인 데모를 일주일 동안 유지하기로 했다. 데모 게임 로비에는 <영건 블러드> 발매를 알리는 배너가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었다.
발매일인 금요일 오전 12시 52분 현재, 온라인 데모는 여전히 5만이 넘는 동접자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식 게임은 아직 데모 게임 동접자의 5%에도 미치지 못했다.
“얘들아, 이제 나가서 게임 좀 사자. 언제까지 데모만 하고 있을 거니? 응?”
전용선은 극명하게 차이 나는 두 서버의 접속량을 보며 답답한 듯 말했다. 때맞춰 오후 1시가 지나자 접속자가 한 번에 몇백 명이 동시에 올랐다. 전용선이 좋아하며 모니터를 가리키자 박선호가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음, 이제 동부에 있는 게임 매장들 오픈한 거 같네요. 거기도 체험 부스 운영하니까요.”
“아~, 그래? 알았다. 니 똥 굵다. 아주 굵어~.”
전용선이 툴툴거렸다. 평소 같으면 박선호도 전용선에게 유치하다며 농담을 했겠지만 오늘은 전용선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보였다.
틱톡. 틱톡.
게임을 런칭한 기쁜 날이지만 팔로 알토 사무실은 조용했다. 가끔 앤서니가 농담을 던졌지만 타쿠르가 딱딱한 목소리로 “호호호”라고 영혼 없이 웃어 줄 뿐이었다. 4시가 지날 무렵 퀘스트넷 동접자는 3~4천 정도였다.
“잘 팔리고 있는 거 맞겠죠? 왜 이렇게 동접자가 낮을까요?”
“제국이랑 통화했는데 L.A. 샵들 둘러보고 있나 봐.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니까 좀 기다려 보자.”
전용선이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알겠다. 게임 사 간 사람들이 지금 다들 싱글 플레이하고 있어서 그럴 거예요.”
“예스! 그거네. 캐릭터들이 대체 무슨 사연인지 궁금하지. 당연하지.”
“그리고 직장인들은 일단 퇴근을 해야 게임을 사든, 접속을 하든 하죠. 5시 이후부터가 진짜죠.”
“그래, 그래.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이유가.”
팔로 알토 멤버들은 나름대로 추측도 해보고, 행복 회로도 돌리며 오후를 보냈다. 그래도 1분 1초가 더디기만 했다.
“우리가 여기 쏟은 돈이 75만 달러. 환율 대충 1,200원으로 계산하면 9억. 패키지 하나가 39.9달러니까 투자금만 회수하려고 해도 최소 6만 3천 장 정도는 팔려야 하는데······.”
전용선은 혼자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성공해 보겠다고 미국에 건너와 정말 피 같은 9억원을 회수도 불투명한 온라인 마케팅이 쏟아부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18만 명이 동시에 즐긴 게임이라기엔 발매 첫날 분위기가 너무 조용했다.
“우리 게임 사지도 않을 놈들 끌어들인다고 몇억을 퍼부었다니. 젠장, 저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영건 블러드> 데모 서버에는 점심보다 더 많은 접속자가 몰려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용선의 눈에 그들은 보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몽땅 체리 피커(비용은 쓰지 않고 자기에게 필요한 정보나 기능만 이용하는 사람)로만 보였다.
“어, 저녁 어떻게 할까요? 뭐라도 시킬까요? 점심은 피자 먹었으니까 저녁은 차이니즈?”
6시를 지나 퇴근 시간이 되고 세상은 러시아워가 한창이었다. 박선호가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보다 물었다. 전용선이 이마의 주름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점심도 피자 시켜 먹었는데, 저녁은 나가서 먹을까? 하루 종일 사무실에만 있었더니 답답하기도 하고.”
“사무실 비우고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지금 1만도 안 나오는데 별일 있겠어? 뭐, 레스토랑 가서 만찬 즐기자는 거도 아니고. 그냥 잠깐 나가서 햄버거라도 하나 먹고 오자. 선호가 남아서 모니터링 좀 하고 있어. 우리 나가서 먹고 들어오는 길에 사 올 테니.”
“아니면 내가 저녁 뚝딱 만들까요? 파스타는 재료 있어서 금방인데. 새로 산 토마토소스도 괜찮던데요?”
“파스타? 으으음······.”
보통 다른 기업에서는 같은 팀이라도 밥은 각자 따로 약속을 잡고 먹는다. 하지만 로렌스를 빼면 팔로 알토에 따로 연고가 있는 사람이 없어서 뉴퀘스트 멤버들은 거의 항상 밥을 함께 먹었다.
전용선이 결국 나가기로 결정하고 점퍼를 챙겨 들었다. 그가 지갑을 챙겨 주머니에 넣으며 마지막으로 모니터링 모니터를 힐끗 봤다.
“응?”
그때 모니터 화면에서 그래프가 꼼지락거렸다. 하루 종일 아주 완만한 기울기로 올라가던 추세와는 달랐다.
전용선은 급히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는 데모 게임 모니터링 그래프는 꺼버리고, 정식 게임 모니터링 그래프만 띄워 더 자세하게 살폈다. 이상 기류를 감지한 멤버들도 전용선 주위에 모였다. 그래프가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움직인다! 움직인다!”
“업(up)! 업! 업! 업!”
멤버들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며 외쳤다. 동접자 그래프는 마치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기라도 한 듯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앤소니! 로비! 로비 상황!”
전용선이 다급하게 외쳤다. 앤소니가 얼른 퀘스트넷 로비에 들어갔다.
“오 마이 갓!”
앤서니가 눈을 크게 떴다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지금까지 접속자 중 상당수가 체험 부스여서 로비 채팅창은 한산했다. 앤소니가 주기적으로 인사를 하면 새로 접속한 사람들이 함께 인사하고, 채팅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게이머들이 밀려오면서 채팅창에 새로운 말이 계속 올라왔다.
- 그뤠이이이~~트! 드디어 나왔다!
- 널 기다렸어, 장건!
- 나도 샀어! 다들 반가워 :D
- 혹시 몰라서 점심에 나가서 게임스탑 가서 사 옴. 오직 퇴근만 기다리고 있었다.
- 이제부터 파티 타임~~~ lol
- 나도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게임만 한다.
- 재밌어 보이길래 일단 샀는데 뭐부터 해야 하지?
- 싱글 플레이 다 깨고 온 사람? 나 마지막에 눈물 흘리고 말았다 :-<
- 사내새끼가 울긴. 엄마 보고 싶냐?
- 응, 너네 엄마랑 어젯밤에 했는데 또 보고 싶네 :-D
- XOXOXOXOXOXOXOXOXO
- 캐릭터 엄청 많네. 누구로 하는 게 제일 재밌어?
- 호호호! 내가 왔다!
- 나도 한 판만 하고 싱글플레이하러 가야지. 싱글플레이도 재미남?
- 끝장난다. 꼭 해라. 무조건해야 함.
“뭐야, 이 녀석들! 다들 어디 있다가 이제서야 기어 나온 거야? 응?”
전용선이 채팅창을 보면서 웃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녁 7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퀘스트넷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팔로 알토 멤버들은 갑자기 반전된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때마침 황제국에게 전화가 왔다.
“응! 응, 제국아. 안 그래도 마침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어때요? 저희는 이제 L.A.에 있는 매장들은 대충 다 둘러보고 저녁 먹으려고요. 매장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아직 판매량 집계하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하네요.”
“어, 그렇겠지. 이 넓은 땅에 매장이 몇 갠데. 그게 금방 집계가 되겠어?”
전용선이 이제는 짐짓 여유로운 말투로 말했다. 박선호가 달라진 전용선의 태도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선배님, 저희 술은 어떤 게 좋을까요? 와인? 아니면 샴페인?”
“술? 술 말이지? 흐음······.”
와인과 샴페인이라는 말 자체가 두 사람 사이의 암호였다. 와인이면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는 뜻이고, 샴페인이면 성공이 보인다는 뜻이었다. 만약 ‘소주는 없어?’라고 하면 암담한 상황이었다.
전용선은 치솟기 시작한 동접자 그래프를 보며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황제국과 통화하는 이 순간에도 접속자는 계속 늘고 있었다. 한 번 속도가 붙자 순식간이었다.
“일단 한인 타운 아니면 소주는 패스하고.”
“네, 소주는 패스. 와인과 샴페인 중에는요?”
“와인 비싸냐?”
“어······, 종류는 여러 가지 있는데 그냥 작은 레스토랑이라 100불 이상은 별로 없어요.”
전용선은 일부러 와인 리스트를 물어보며 뜸을 들였다.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황제국의 목소리는 어느새 살짝 톤이 다운되었다.
“별로 괜찮은 게 없네. 그냥 샴페인 마셔라.”
“네?”
전용선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하루종일 지지부진했는데 이제 좀 속도 붙기 시작했다. 오늘 동접 1만은 충분히 찍어. 이 추세면 아마 1.3만~1.5만 정도까지 가능할 거 같다.”
“아~, 진짜. 이런 장난 좀 치지 마세요. 가슴이 다 철렁했잖아요.”
“하하하하! 그랬어? 내가 뭐라 그랬어. 오늘 하루는 일단 기다려보자고 했지? 커트라인은 넘은 거 같으니까 걱정 말고 마셔! 팍팍 마셔! 자, 얘들아. 제국이한테 한 마디 해줘라.”
“돈 워리, 보스!!!!”
팔로 알토 멤버들도 황제국에게 큰 소리로 인사하며 자기들끼리 소리를 질렀다. 황제국도 그제야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뭐라 그래요?”
황제국이 전화를 끊자 저녁 메뉴를 고르던 로렌스와 JD, 크리스가 황제국을 보며 물었다. 그들은 이미 황제국의 얼굴을 보고 승리의 기운을 느꼈다.
“지금 동접자 10K가 코앞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매자가 동접자의 몇 배수는 될 테니까 오늘 적어도 3만 장은 팔리지 않았을까요?”
“그레이트!”
황제국의 말에 JD가 크게 기뻐하며 휘파람을 불어 종업원을 불렀다. 그들은 황금빛 샴페인을 잔에 가득 따르고 건배했다. 샴페인에서 피어나오는 고운 거품이 황제국의 목을 간지럽혔다. 그토록 꿈꾸던 달콤한 성공의 맛이었다.